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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뜬 맹인
요한복음 9:1-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넷째주일이다. 40일 가운데 이제 막 중반을 지났다. 여러분의 사순절은 안녕하신가? 올해 사순절을 시작하며 성회수요일 기도회에서 ‘침묵’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색동 까페에 이런 제안 글이 올라왔다. 미국 유니세프 사이트(tap.unicefusa.org)에서 하는 운동이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제안한 방법에 따라 내가 사용하는 스마트 폰을 잠시 중단하겠다는 마음으로 내려놓는다. 그렇게 하면, 10분이 경과할 때마다 물을 정화시키는 알약 한 개씩을 물이 부족한 나라의 어린이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따라해 보았다. 어떤 큰소리로 하는 호소보다, 침묵을 통한 진지한 참여가 좋게 느껴졌다. 오늘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침묵을 손꼽는다. 너무 입으로만, 말로만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한다. 사랑도 입으로만, 경건도 말로만, 기도도 소리로만 한다.
사람들은 교회가 좀 더 조용해졌으면, 침묵을 사랑했으면, 그럼으로써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라틴 속담에 “소리는 많으나 음성이 없다”는 말이 있다. 특별한 열심으로 세상의 소란함을 부추기지 말고, 넘쳐나는 소리의 볼륨을 낮추어, 고요함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사순절기에 하루 10분 만이라도 하나님의 고요하심에 묻히기를 소망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때이다. 내면에서 두드리는 그 세미한 음성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다. 10분에 하나씩 알약이 제공되어 내 심령을 청결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런 사순절을 바란다.
1)
오늘 설교 제목 ‘눈 뜬 맹인’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눈 뜬 맹인’에서 ‘맹인’에 방점을 찍어 보자.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눈을 떴다는 것이다.
또한 ‘눈 뜬 맹인’에서 ‘눈 뜬’에 방점을 찍는다.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으나 편견과 불신 때문에 맹인과 다름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9장은 유명한 실로암 못에서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야기다. 단순한 기적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무려 41절 동안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눈 뜬 ‘맹인’에서 ‘눈 뜬’ 맹인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의 치유 기적은 맹인에게 베푸신 자비의 메시지를 넘어선다. 더 나아가 스스로 뜬 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면 자신은 맹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하신다.
맹인이 아닌 우리도 종종 스스로 맹인임을 고백할 때가 있다.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컴맹(盲)’이다. 컴퓨터 문맹을 의미한다. 외국어 문맹(文盲)도 있다. 자기 주관이나 분별력이 없는 상태를 맹목적(盲目的)이라고 한다든지, 관찰력이나 보는 눈이 없을 때 안목(眼目)이 부족하다고 한다.
우리 몸을 10할이라고 한다면, 눈은 9할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신체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눈이라고 한다. 군포지방 교역자회의가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어떤 분이 요즘 기억력이 뚝 떨어져서 걱정이란 이야기를 하였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였다. 듣고 있던 맹인 박흥윤 목사님이 이렇게 웃으며 대꾸하였다.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이 무슨 걱정입니까?”
듣고 보니,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을 곁에 두고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 미안하더라. 과연 나는 볼 수 있지만, 정말 맹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본문은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 받은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한 맹인을 만났다. 그는 늘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이어서 누구나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자들은 그 맹인을 끌어 들여 화제로 삼았다. 유대인들다운 방식이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유대인들은 인생의 괴로움을 죄와 연관시켰다. 그들의 생각에 질병과 장애는 죄의 결과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인생의 고통과 그의 죄는 무관하다고 선언하신다. 그동안 육체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정죄라는 이중, 삼중의 괴로움에 시달린 장애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아마 맹인은 그 마음에서부터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정한 빛은 눈을 보고, 못 보고가 아닌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맹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맹인 단체인 새빛맹인선교회의 안요한 목사는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책과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단체는 두 가지 편견 때문에 오해를 받아 운영이 늘 힘들다고 한다.
첫째는 주소가 서초구 방배동이다. 사람들은 부자동네 맹인이구나 싶어서 도울 마음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애초에 그들이 찾아낸 터전은 가난한 변두리 방배동이었다.
둘째는 책과 영화로도 소개되었으니 돕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들에게 손을 내미는 영세 맹인단체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새빛맹인선교회는 그저 하루하루 운영하는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일 년 혹은 한 달 예산이 없다고 한다. 그럴만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껏 가장 큰 후원자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놀랍게도 그때그때 마다 채워주셨는데, 사람들은 이를 ‘징검다리 축복’이라고 부른다. 맹인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을 배운다고 하였다.
새빛맹인선교회의 표어는 ‘우리가 실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9:3)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2)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사람들, 괴로움을 겪는 사람 앞에서 부질없는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물리치신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신 직후 이내 그를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방법은 토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방식을 보라. 먼저 땅에 침을 뱉는다. 젖은 진흙을 갠다. 맹인의 눈에 바른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진지하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까? 주변에서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조바심을 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언하신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
성경은 부연 설명하기를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맹인은 누구의 도움으로 실로암 못에 다가 갔을 것이고, 마침내 실로암 못에서 눈에 묻은 진흙을 씻어낸 후 밝은 눈이 되었다. ‘눈 뜬 맹인’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참 현명한 의사이시다. 예수님은 맹인의 마음을 먼저 고치시고, 그 다음 그의 믿음에 따라 육신의 눈도 뜨게 하셨다. 다른 복음서의 치유 기적 이야기들은 종종 놀란 목격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써 끝이 나는데,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렇게 끝맺지 않는다.
오히려 논쟁으로 가득하다. 왜 그럴까? 육체의 눈이 먼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더 치유하기 어려운 ‘믿음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의 결과를 접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의아심, 의견 분열, 당혹감이었다.
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치유 받은 사람이 정말 맹인이 맞냐는 사실성, 안식일에 치유해도 되느냐는 합법성 그리고 과연 치유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정체성 등에 대해서 논쟁하고,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한다. 한 마디로 예루살렘이 시끄러워졌다.
맹인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헬렌 켈러이다. 그가 오하이오 주 맹인협회의 초청을 받아 클리블랜드을 방문하였다. 선생님인 설리반 메이시 부인도 함께 왔다. 메이시 부인은 헬렌의 예민한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입술과 목을 만지며 대화하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그런 맹인의 대화를 실습해 보던 맹인협회 회장 베이커 박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헬렌 켈러는 즉각 이렇게 반박하였다. “그렇지만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불행입니까?”
3)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신 기적은 모든 맹인에게 얼마나 부럽고, 놀라운 일일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눈 뜬 머무나 분명한 사건을 눈앞에 두고서 ‘이 사람이 전에 구걸하던 그 자인가?’,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이 맞느냐’, ‘안식일에 눈을 떴으니 그를 고쳐준 자도 죄인이다’라는 말로 상황을 덮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맹인이 눈뜬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들의 편견을 합리화 하려고 애썼다. 바로 육체의 눈은 떴으나 마음의 눈이 어두운 ‘눈 뜬 맹인’의 모습이었다.
이와 달리 실로암 못가에서 눈 뜬 당사자는 자신이 얻은 결과가 너무나 눈에 선명해서, 바리새인들의 트집이나, 억측, 또 다른 정죄 따위에 당당히 맞선다. 이젠 눈이 떴으니 뵈는 게 없을 만큼 용기 있게 행동한다. 육체의 눈 뿐 아니라 마음의 눈까지 치유 받았기 때문에 분명한 확신이 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눈 뜬 것을 기뻐해 주기는커녕 그를 협박한다. 맹목적인 종교는 얼마나 위험한가? 진리를 잃어버린 종교는 얼마나 옹졸한가? 그러나 맹인은 마침내 예수님을 다시 찾아가 당당히 고백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38).
맹인은 점점 빛을 찾아 가지만 유대인들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
때때로 우리는 눈 뜬 맹인의 모습을 한다. 비록 육체의 눈을 떴으나 실상 영혼의 눈은 감긴 상태이다. 아예 맹인보다 못한 상태에 빠질 때도 있다.
헬렌 켈러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블랙’에 이런 대사가 잇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선한 눈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성한 눈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다면,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 눈은 얼마나 어두운 것인가?
오래 전 일이다. 일본의 어느 나병환자병원에 옷을 잘 차려입은 여성이 찾아와 병원에 입원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시설은 너무 열악하여 상류사회의 환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곳은 나병도 나병이지만 하류사회에서 천대받던 거지 환자들로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원장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이 매우 낙심하여 돌아섰다. 그때 그 뒷모습을 불쌍하게 바라보던 원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나가서 거지가 되어서 오시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오”.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갔다. 그는 예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그곳에 간 것이다. 보냄을 받았다는 자각이 그의 눈을 뜨게 하였다.
아무 뜻 없이 우연히 던져진 인생이란 운명론적인 생각에 머무는 한 우리는 인생을 고침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보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 존재와 삶의 눈은 완전히 새롭게 열린다. 예수님과 만남은 필연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자각의 자리 곧 실로암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예순님을 만날 때 우리의 눈을 뜰 수 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 13:3).
자신이 죽음의 잠에 들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실토해야 한다. “주님, 나는 눈 뜬 맹인입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맹목과 편견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참 빛을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
첫댓글 설교 말씀중에서 그동안 방점이 눈뜬에 있는 눈뜬 맹인으로 살지는 않았는지 뒤돌아 보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