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의 인문학 7】 "초록, 천상의 색이자 죽음의 색"
천상의 색으로 존경 받은 것도
죽음의 색으로 멸시 당한 것도
자연의 초록으로 되살아 난 것도
저 푸르른 초록의 운명이야
천상의 색
우즈베키스탄 히바(Hiva) 이찬칼라(Ichan-kala)의 초록
노란색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눈물겹게 이야기했어. 참 나 원, 그깟 고생이 무얼 그리 한스럽다고 볼멘 소리하는지. 나는 천상의 색이라 칭찬도 받았지만, 죽음을 부른다고 얼마나 구박 받았는지 몰라. 보기에 한없이 온화한 내게 죽음 냄새가 난다고 가까이 못 오게 했어. 그깟 배신자 노랑이라는 소리야 듣고 한쪽으로 흘리면 되지만,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다니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어.
577~492nm의 파장을 가진 나는 초록이야. 자연이 곧 나고, 내가 곧 자연이지. 지금부터 내 아픈 과거를 이야기 할게. 나는 죽음을 부르는 색과 악마의 색이라 멸시 받았어. 위험과 평안, 생명과 죽음의 양면성을 가진 게 바로 나야. 지금은 자연스러움, 성장, 살아 있음을 상징하는 색으로 존중받으니 기분이 좋아. 사람 팔자도 알 수 없지만, 색 팔자도 알 수 없어.
나는 천상의 색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색이야. 한여름이 되면 나는 기운이 펄펄 넘쳐. 광폭한 태양에 감히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어. 태양이 뜨거울수록 나는 윤기가 나고 색이 짙어져. 무난하게 보이지만 내게도 사연이 많아. 7월과 8월의 태양은 너무 이글거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더위 먹어 흐느적거리는데, 유일하게 초록만은 제 세상 만난 양 해사한 얼굴을 빳빳이 쳐들어.
많은 문화권에서 녹색은 초록 식물의 정원이나 녹색 새순 돋는 생명의 탄생을 떠올려. 앙증맞게 작은 연두색 새싹이 돋아나는 걸 생각해 봐.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니. 특히 이슬람 세계의 녹색은 낙원이라는 뜻이야. 끝 간 데 없는 사막을 상인들이 걷는다면 느낌이 어떨까. 메마른 사막 끝에 만나는 초록의 나무와 우물은 말 그대로 오아시스야. 깝죽거리지 말고 인내하고 기다리라는 것은 녹색이 한 말이야.
예언자 무함마드는 녹색을 사랑했다고 해. 그는 녹색 옷을 입고, 녹색 터번을 둘렀데. 그것도 모자라 그는 주변을 녹색 직물로 장식했고, 녹색 터번을 왕위 계승자의 표식으로 삼았어. 심지어 전쟁할 때도 녹색 깃발을 달았지. 오늘날에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초록이 성스러운 색깔로 통해. 이란, 방글라데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 녹색이 빠지지 않는 까닭이 이 때문이야. 이슬람보다 더 초록을 숭배하고 사랑하는 종교는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야.
처음에는 서양 사람들도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어. 그리스도교에서 초록은 봄과 부활을 상징하는 색이었어. 중세 초기 유럽은 염료를 혼합해서 염료를 만드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어. 색의 순수성을 해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은 자연에서 나는 초록 풀로 녹색을 만들었어. 이렇게 만든 초록은 아쉽게도 색이 선명하지도 않고 풍성하지도 않았어. 옷이나 물체에 초록 물이 들었지만, 햇빛에 쉽게 색이 바래는 게 흠이라 사람들이 싫어했어.
그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었어. 이슬람 국가들이 초록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반사적으로 십자군은 초록을 달갑지 않은 색으로 여겼어. 시간이 지나자 잘 변색하고 질 낮은 초록은 악마의 색으로 자리하게 되었지. 중세 후기 기독교에서 초록은 악마를 상징했어. 희귀한 녹색 눈을 가진 사람은 마법사나 마녀로 악마의 부하라고 오해받기도 했어. 유럽에서 초록은 악마나 마귀와 관계 깊다는 평을 받는 딱한 형편이 꽤 오랫동안 계속됐어.
죽음의 색
사우디아라비아 국기
초록이 죽음을 부른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초록을 말하는 게 맞나? 그런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다. 자연의 초록은 온화하고 평온한 색이야. 파릇파릇한 나뭇잎과 싱그런 풀잎은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훌륭한 색이야. 초록의 숲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자연에는 초록이 지천으로 넘치는데, 그것을 염료로 만들기가 어려웠어. 전통적으로 자작나무, 오리나무, 사과나무의 새싹과 나무껍질 같은 자연에서 나는 식물을 통해 초록 염료를 추출했지. 초록 옷감을 물들일 때만 해도 그래. 녹색 식물로 죽을 끓인 후 그곳에 옷감을 여러 날 담가 끓였어. 초록 물이 들긴 했지만, 햇빛에 쉽게 색이 바래는 게 흠이었어.
어렵사리 구한 녹색 염료는 자연의 색만큼 강렬하지 않았고, 윤이 나지도 않았어. 아쉽게도 햇빛을 받고, 계속 세탁해도 바래지 않는 선명한 녹색 색소를 가진 식물은 없다. 자연은 그리도 선명한 녹색을 자랑하지만, 정작 사람에 그걸 내주지 않았어. 화가들은 오랫동안 쉽게 바래고 변색하는 초록을 구할 수 없어 애를 먹었어.
녹색은 시간이 지나면서 흉측하게 변해. 그래서 녹색은 때때로 괴물의 색으로 등장하기도 해. 사람들이 징그러워하는 뱀과 같은 파충류의 색깔이 녹색이 많아. 중세 시대의 회화에 등장하는 악마와 악령이 보통 녹색으로 칠해진 이유야. 이런 사유로 녹색이 갖는 죽음과 변절의 냄새가 이미지에 투영되기 시작했어.
사정이 이렇다 보니 화가들은 질 좋은 녹색 염료를 갈망했어. 화가들은 제대로 된 녹색 염료를 만들지 못해 안달 났지. 그러다가 1775년 스웨덴 화학자 카를 빌헬름 셀레가 '셀레그린(Scheele의 Green)'이라는 아름다운 녹색 안료를 발명했어. 화가들은 이 안료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어. 물감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지. 그뿐 아니라 양탄자, 직물, 벽지, 심지어 음식의 색소로도 사용했어.
사람들은 그렇게 바라던 질 좋은 초록을 만들었다고 좋아했어. 드디어 아름답고 온화한 자연을 집안으로 들인 거지. 하지만 웬걸,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건이 터졌어. 갑자기 사람들이 죽어 나갔어. 처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었지. 나중에야 이 풍성한 녹색 안료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걸 알았지. 셀레 그린이 들어간 비소 성분이 문제였어.
사람들이 녹색 안료에 들어 있는 비소가 죽음을 부른다는 사실을 알아챘어. 비소의 치명적인 독성은 강력한 쥐약으로 사용되고 있었지. 그때부터 사람들은 녹색을 죽음을 부르는 색이라 불렀지. 이렇게 큰 피해를 몰고 온 셀레그린이 40년이나 더 버젓이 팔렸어. 왜냐고? 다 돈 때문이야. 당장 멈추기에는 셀레그린 시장의 규모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야. 그때는 사람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한 시절이었어. 하기야 지금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보장이 없긴 하니 씁쓸하지.
초록은 본성은 따뜻하고 온화해. 어두운 과거 때문에 죽음을 부르는 색이라고 오해받기도 했어. 변절자의 색이니 악마의 색이라는 조롱도 받았지. 어떤 색도 아픔 없이 등장한 것은 없어. 뒤늦게 이름을 얻은 오렌지색이 그나마 흑역사가 덜하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픈 과거를 딛고 영광을 차지하는 거야. 현실이 고통스럽고 아파도 참고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