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전설, 이범석 장군 서거 48주기
▲ 한국광복군 간부들과 미국 OSS 대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 (출처:독립기념관)
1900년 서울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범석 장군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을 하게 됩니다. 망명 후 이범석 장군은 상해에서 신규식 선생, 조성환 선생, 신채호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이라는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운남강무당 기병과를 수석 졸업한 뒤 촉망받는 기병장교 생활을 하던 이범석 장군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장교를 그만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취임해 독립군 장교 양성에 전력을 다하던 이범석 장군은 1920년 북로군정서의 요청을 받아 북로군정서군의 군사 교관으로 부임했습니다. 당시 이범석 장군이 가르친 생도들은 체코군으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무장하면서 최정예부대로 성장하였는데요, 이 부대가 바로 청산리대첩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 청산리대첩 기록화 (출처:독립기념관)
1920년 10월 21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계곡에 매복해 있던 이범석 장군은 먼저 진입한 야스가와 추격대의 첨병소대를 격멸하고, 뒤이어 도착한 본대까지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어 천수평, 어랑촌, 고동하곡, 천보산 등지를 옮겨다니며 치른 10여 차례의 격전에서도 승리를 거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에 1,200여 명의 전사자와 2,1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에 비해, 독립군은 130여 명의 전사자와 220여 명의 부상자만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 한국광복군 참모장 시절의 이범석 장군 (출처:독립기념관)
이후 1940년 한국광복군의 초대 참모장으로 부임한 이범석 장군은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고자 참모장 자리를 내놓고 자원하여 제2대장으로 부임하는데요.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서 한국광복군을 교육하는 것은 물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습니다.
▲ 미국 OSS의 훈련을 마치고 공작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는 날 광복군과 이범석 장군 (출처 : 독립기념관)
광복 후 1946년 6월 3일 이범석 장군은 500여 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귀국길에 올랐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기여했습니다.
▲ 상해 가든브릿지에서 부대 대원들과 함께한 이범석 장군 (출처:독립기념관)
오늘은 이범석 장군 서거 48주기입니다. 투철한 군인정신과 굳은 의지로 한국 독립군의 희망이자 전설이 된 이범석 장군을 함께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