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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차기 제5세대 지도자 국가부주석 시진핑(習近平) | ||||||||||||||||||
서민풍에 유연한 실용노선 | ||||||||||||||||||
‘저장성?상하이’ 당서기 등 핵심요직 두루 거쳐
[조은뉴스= 소정현 기자] 2012년에 개막될 중국의 제18대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에서 누가 중국 공산당의 최고의 정점을 구축할지 그 뜨거운 열기가 벌써부터 감지된다. 2012년 전인대의 초미의 관심사는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에 이어 어느 인사가 '제5세대 지도자'로 낙점되느냐이다.
이미 중국은 지난 2007년 17차 공산당 대표대회를 통해 후진타오 지도부를 승계할 5세대 정치 체제의 기본 골격에 초식을 다진 바 있다. 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뜨지 않는 한 중국은 2012년 제18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57) 국가부주석이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극에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인다. 시진핑은 공직의 대부분을 푸젠성에서 헌신하였으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저장성 서기, 2007년 상하이시 당 서기를 지냈다.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2008년 국가부주석에 올랐다. 이렇듯 시진핑의 무한질주 고속성장의 배경에는 온갖 고초를 겪은 그의 산전수전 이력이 단단히 한몫 거들고 있다. 그러나 시진핑은 그의 부친으로 인해 유년기에는 연신 추락의 부침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인생은 새옹지마인 것이다. 시진핑은 태자당 계열(공산혁명 원로의 자제나 친인척) 출신성분으로 그의 부친은 덩샤오핑보다 한발 더 앞선 개혁?개방을 선도했던 시중쉰 前 부총리(習仲勛ㆍ2002년 사망)이다. 혁명원로 시중쉰은 문혁당시 숙청됐다가 이후 복권되었는데, 중국에서 경제특구 구상을 처음 내놓은 인물이다. 광둥(廣東) 성 서기 겸 성장으로 있던 1979년 초 경제특구 구상을 제시했고 덩샤오핑이 이를 전격 수용하여 선전 등에 특구를 설치했다. 시진핑의 출생 당시 그의 부친은 당 선전부장 겸 정무원 문교위원회 부주임을 맡고 있었다. 시진핑은 문화혁명으로 아버지 시중쉰이 전격 숙청되면서 하루아침에 노동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는 출생지인 베이징을 떠나 허난성에서 웅지를 튼다. 허난성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시진핑! 그는 1972년 지식청년분자로 찍혀 노선교육까지 받았다. 하루하루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박해의 연속이었다. 1975년 부친의 복권과 함께 베이징에 금의환향한 시진핑은 명문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국무원 판공청에서 겅뱌오 부총리의 비서로 일하다 1982년부터 허베이성 정딩현 부서기를 시발로 공직 생활에 본격 입문한다. 시진핑은 무려 20여 년 동안 지방에서 다양한 현장 경험을 쌓았다. 그의 값진 노력은 서서히 빛을 발해가고 있었다. 2000년에는 푸젠성장의 중책을 맡아 푸젠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중국 전역에서 8위로 급상승시켰다. 2002년 10월 제16회 당대회가 소집됐다. 당시 한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이 10년 전 후진타오와 마찬가지로 아직 50살이 안 된 리커창(李克强, 現부총리로 차기 총리로 유력시)과 시진핑 중 한명을 16기 중앙정치국상무위원에 발탁해 대항마로 키우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쩌민은 "현재 50세 이하의 동지는 아직 연공을 많이 쌓지 않았다. 장래에 보다 큰 정치적 과업을 착오 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요 현장에서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2002년 10월에 시진핑은 저장성 성장에 임명됐다. 한 달 후에 그는 저장성 당서기에 선출됐다. 저장성은 경제대성으로 GDP 전국 4위로 광둥, 산둥, 장쑤성 다음의 서열에 포진하고 있었다. 시진핑은 후진타오가 제기한 ‘조화사회와 과학적 발전관 사상’에 기반해 '평안저장(平安浙江)', '법치저장(法治浙江)', '녹색저장(綠色浙江)'이라는 실시구시 통치이념에 기반하여 취임 후 9개월 동안 전성의 90개 현·시 중에서 69개 현·시를 시찰했다. 이후 저장성은 연평균 14%정도라는 경이적 성장을 거듭했다. 불과 5년 만에 저장성을 민간 기업이 가장 비약적 발전을 이룬 지역으로 변신시키는 등 경영에서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에게는 '경영의 마이더스'란 닉네임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녔다. 40대 후반에 중앙정부의 주목을 받으면서 일약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2007년 3월 상하이시의 서기,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에 임명됐다. 이젠 중국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시진핑의 부인은 산둥(山東)성 보통 농가의 딸 출신으로 중국의 국민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47)이다. 펑리위안은 중국에서 갓난아기도 알 정도로 유명한 가요계의 스타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민족 성악의 대표가수'란 수식어가 늘 붙는다. 민족 성악이란 민요 창법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중국 특유의 음악장르. 빼어난 미모에 5옥타브를 현란하게 넘나드는 음역, 막힌 것을 토해내는 듯한 힘차게 내지르는 고음이 매력인 그녀는 1982년 중국 국영TV인 CCTV가 주최한 가요대회에서 '희망의 들판에 서서'라는 노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가요대회는 춘절(春節, 중국의 설날)을 맞아 '희망의 들판에 서서'라는 노래는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노래 실력뿐 아니라 연기력 역시 출중해서, 중국 TV에선 그녀가 여러 배역으로 출연하는 콩트나 가극을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그녀는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문공단(文工團, 중국에서 공산당 지도방침에 기반하여 가요·무용·연극 등의 문예활동을 통해 선전활동에 매진하는 종합적 문예단체)에 띄어 해군서 여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그녀는 중국음악학원 성악부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저명한 성악교사인 진톄린(金鐵霖)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본과와 대학원서 수학했다. 민족성악석사학위도 받았다. 1986년 말 시진핑은 '이립(而立, 30세)'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샤먼(厦門)시 상무부시장이 됐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시진핑이 펑리위안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인기 절정을 구가하는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산하 가무단 소속 국가 1급 가수였다. 시진핑을 첫 만난 순간 펑리위안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시진핑 첫인상에 대해 촌티에 매우 늙어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농촌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 시진핑이 자신보다 더 고생을 많이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한마디에 그녀는 생각을 단번에 바꿨다. 시진핑은 "요즘 유행하는 노래는?"라던가 "출연료는 얼마?"라는 진부한 질문 대신에 "성악에는 노래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나요?"라고 물었다. 펑리위안이 대답하자, 다시 시진핑은 "미안한데 내가 TV를 잘 보지 않아서요. 당신은 요즘 어떤 노래를 부르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희망의 전야에서'를 불러요"라고 담담히 대답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둘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펑리위안의 순박하고 선량함에 마음을 뺏겼고, 그녀는 시진핑의 성실함, 인내심, 업무에 대한 열정에 호감을 갖게 됐다. 하지만 펑리위안의 부모는 딸의 상대가 고급간부의 아들, 게다가 시중쉰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는 고개를 저었다. 펑리위안 부모들은 고급간부의 아들 가운데 '도련님'이 많고, 게다가 허황된 꿈을 꾸고 싶지 않아 하셨다. 시중쉰 부부는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 중 아들은 시진핑과 시위안핑(習遠平)이다. 시위안핑은 주위에서 '도련님' 대접을 받았고 여성문제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에 시진핑은 펑리위안에게 구애의 결장타를 날린다. "내 아버지는 농민의 자식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상관없어 하신다. 우리 집 형제들은 모두 평민의 자녀들과 결혼했다. 게다가 내 가족들이 우리와 평생 같이 사는 것도 아니다.” 시진핑과 펑리위안은 1987년 9월1일 서둘러 식을 올렸다. 결혼사진 촬영도, 결혼 등기증 제출도 속사포식으로 진행했다. 당시 시장에게 결혼보고로 '밤 7시 집합, 식사'라는 초대장을 보낼 정도로 단 하루 만에 결혼 수속을 모두 마무리 지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 헤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시진핑은 결혼 이후 공사를 엄격히 규율했다. 부인의 동석이 가능한 장소에도 '아내를 따르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듣겠는가. 좋지 않은 여파가 있을 것'이라며 동반하지 않았다. 시진핑은 펑리위안에게 엄격함을 요구했다. "나는 당간부이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조직에서 주최하는 것 이외의 공연에 절대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펑리위안도 기꺼이 이를 존중했다. 이렇듯 시진핑은 장래를 위해 명예를 소중히 가다듬었다. 현재 펑리위안은 중국 1급 가수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위원을 세 번째나 맡고 있으며, 소장으로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시진핑과 펑리위안은 슬하에 딸이 한 명 있다. 이름은 시밍쩌(習明澤)로 어릴 적 이름은 무쯔(木子). 현재 항저우 외국어학원서 수학하고 있다.
중국은 차세대 지도부에 관한 한 멀리 내다보고 선택한다. 현재 후진타오 국가주석 역시 덩샤오핑에 의해 장쩌민에 이은 차기 지도자로 가닥을 잡은 후 철저한 훈련과정을 거쳤다. 중국이 초고속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배경에는 정치적 안정이 있고‘ 이의 기저에는 당과 국가의 최고 지도부를 선발하는 엄격한 조련 시스템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어서이다. 중국의 4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오는 2012년 퇴임하면, 이른바 '5세대 지도자들'이 그 뒤를 잇게 된다. 여기의 정점에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우뚝 서있다. 전직 부총리의 아들이지만 서민과 애환을 함께 해온 시진핑! 무엇보다 후덕하고 검소한 성품과 대범한 정치 스타일의 소유자 시진핑 국가부주석은 대내외로 중국 최대 과제로 떠오른 조화사회 건설을 무난하게 구현할 최적임자라는 평가를 후하게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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