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豫章沙門 宗鏡提頌綱要 序
宗鏡:觀夫空如來藏하고 碎祖師關하여 獨露眞常이 無非般若로다
說誼:如來藏은 有空如來藏과 有不空如來藏이니 空如來藏은 所證眞理也요 不空如來藏은 能證眞智也라 眞理를 謂之空如來藏者는 眞理絶相함이 如彼太虛하여 廓無纖?故也요 眞智를 謂之不空如來藏者는 眞智照理함이 如彼赫日하여 當空顯現故也니라 皆謂之藏者는 藏之爲物이 中虛且實하니 中虛故로 可比於空也요 且實故로 可比於不空也니라 今所謂空如來藏者는 蓋異於空不空之空藏也니 以碎祖師關으로 爲對故也니라 物所畜而封不露曰藏이니 八識之藏이 隱覆自性如來로 故名如來藏이니라 關者는 以不通去來로 爲義니 祖師眞機는 聖解難通이요 凡情莫透일매 故名爲關이니라 不妄曰眞이요 不變曰常이니 眞常者는 生佛平等之大本也라 空彼如來藏하고 碎彼祖師關하여 令眞常獨露되면 無非般若之功也니라
종경:무릇 공한 여래장을 관하고 조사의 관문을 부셔서 참됨이 항상 한 것을 홀로 드러내면 반야 아님이 없도다.
설의:여래장은 空여래장과 不空여래장이 있으니, 공여래장은 증득할 바의 진리이고 불공여래장은 능히 증득할 참 지혜이니 진리를 공여래장이라 하는 것은 진리가 相이 끊어진 것이 마치 큰 허공과 같아서 확연히 조그만 가림도 없는 까닭이요, 참 지혜를 불공여래장이라 하는 것은 참다운 지혜가 이치를 비추는 것이 마치 빛나는 저 태양과 같아서 허공에 환하게 나타나는 때문이니라. 그 모두를 藏이라 하는 것은 속이 비고 또 꽉 차 있기 때문이니, 그 속이 빈 고로 가히 허공에 비유하고, 또한 꽉 차 있는 까닭에 不空(아주 비어 단멸 해 없는 것이 아닌)에 비유함이니라.
지금 이른바 공여래장이라 한 것은 空이다 不空이다 하는 空藏과는 대체로 다르니, 祖師의 관문을 부수는 것으로써 상대가 되는 까닭이니라.
무엇을 쌓아두고 봉해서 드러나지 않음을 藏이라 하는 것이니 八識(아뢰야함장식)의 藏이 자성여래를 가렸으므로 여래장이라 이름함이니라.
關이란 가고 옴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祖師의 참된 기틀은 성인도 이해로 통하기 어렵고 범부의 뜻으로 더욱 뚫을 수가 없어 빗장 친 것이라 하느니라. 망령되지 않음이 眞이요 변치 않음이 常이니, 眞常이란 중생이나 부처님의 평등한 큰 근본이어서 저 여래장을 비우고 저 조사관을 부수어서 참으로 항상함이 홀로 드러나게 되면 반야의 공덕 아님이 없느니라.
청봉착어:법신을 가지고 있는 여래장이 공함을 요달하면 그 실상이 항상하며 일체의 나툼이 반야지혜 아님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공여래장은 일체가 공함을 증오해야하는 것이고, 불공여래장은 아주 없이 공한 것이 아니라 묘유해서 그 성품이 일체를 나투는 지혜를 스스로 구족해 있음을 증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또한 텅 비기(空)도 하고 꽉 차기(不空:일체를 머금고 있음)도 하는 것이다.
宗鏡:三心이 不動하면 六喩全彰이 七寶로 校功컨데 四句倍勝이나 若?循行數墨하면 轉益見知라 宗眼이 不明하여 非爲究竟이니라
說誼:三心者는 第八根本心과 第七依本心과 前六起事心이 是니 一眞이 獨露하여 三心이 不動하고 三心이 不動으로 六喩斯彰이니라 六喩者는 識心이 不動하면 業障이 自除라 靑色으로 可以爲喩也하니 靑色은 能除災厄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無漏功德이 自然具足이라 黃色으로 可以爲喩也하니 黃色은 隨人所須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無生智火가 生焉이라 赤色으로 可以爲喩也하니 赤色은 對日出火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凝濁이 自淸이라 白色으로 可以爲喩也하니 白色은 能淸濁水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恒住眞空이라 空色으로 可以爲喩也하니 空色은 令人으로 空中行坐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三毒이 自消라 碧色으로 可以爲喩也하니 碧色은 能消諸毒故也니라 功用之所以至於如此者는 只緣持無相經하고 悟無我理하며 行無我行故也니 雖布施七寶之功이라도 不若受持四句之爲愈也니라 布施七寶가 所以爲劣者는 七寶는 人間世之所重也라 布施에 但感有漏之果하여 終未免於輪廻이니라 故로 劣也요 受持四句가 所以爲勝者는 四句는 超凡悟道之具也라 受持면 超生脫死하여 以至究竟이니 故로 勝也니라 優劣은 且置하고 只如四句를 如何受持하여야 便得超生脫死리오 言言이 冥合本宗하고 句句를 廻就自己하나니 其或未然이면 增長我人知見하여 終無解脫之期리라
종경:三心이 동하지 않으면 여섯 가지로 비유한 것이 온전히 드러나니 칠보로 功을 비교하건대 사구(金剛經 4句偈)의 게송이 배나 뛰어 나지만 만약 이에 글줄이나 따르고 글자나 헤아리면 더욱 알음알이만 더하는 지라, 안목이 밝지 못해서 성불(究竟:覺)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설의:三心이란 것은 第八根本心(아뢰야식:선?악의 종자를 갈무리하는 근본마음)과 第七依本心(말라식:근본을 의지하는 나라고 집착하는 마음)과 前六起事心(전육식:6경에 끄달리는 마음)이 이것이니, 하나의 참다움이 홀로 드러나매 三心이 움직이지 않고, 三心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여섯 가지 비유가 이에 드러나느니라.
여섯 가지 비유란
① 識心이 부동하면 업장이 저절로 없어지므로 푸른색에 비유하니 靑色은 능히 재액을 없애는 까닭이니라.
② 識心이 부동하면 항상 하는 샘(흘러 없어짐)이 없는 공덕이 자연히 구족하여서 누런색으로 비유하니 黃色은 사람이 바라고 구하는 것(일체경계)을 따르는 까닭이니라.
③ 識心이 부동하면 남이 없는 지혜의 불이 나므로 붉음으로 비유하니 적색은 태양이 불을 내는 까닭이니라.
④ 識心이 부동하면 의심과 혼탁이 저절로 맑아져서 흰색으로 비유하니 백색은 능히 혼탁한 물을 맑히는 까닭이니라.
⑤ 識心이 부동하면 항상 眞空에 머묾으로 색 없음으로 비유하니 공색은 사람으로 하여금 공한 가운데서 다니고 머물게 하는 까닭이니라.
⑥ 識心이 부동하면 삼독(탐,진,치)이 저절로 녹으므로 옥색에 비유하니, 碧色은 능히 모든 독을 녹이는 까닭이니라.
功用이 이와 같은 데 이른 까닭은 다만 모양 없는 경을 가지고 내가 없는 이치를 깨달으며 무아의 행을 행하는 까닭에서이니, 비록 칠보로써 보시한 功이라도 금강경 가운데 사구게를 받아 지닌 것만 못하도다. 칠보를 보시하는 것이 못하게 되는 까닭은 칠보는 사람들이 다 중히 여기지만 보시하면 다만 항상 하지 않는 과보를 얻어서 마침내 윤회를 면치 못하므로 못하다 함이고, 사구를 받아 지니는 것이 뛰어나다 하는 것은 사구는 범부를 뛰어 넘어 도를 깨닫는 도구가 되므로 수지하면 생을 뛰어넘고 죽음을 벗어나 구경(涅槃)에 이르므로 뛰어남이라 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뛰어나고 못한 것은 그만두고 다만 저 사구게를 어떻게 받아 지녀야만 당장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가? 말과 말이 전부 근본종지에 계합하고 구절 구절을 돌이켜서 자기(本性:本覺)에게 돌아가게(회광반조:始覺) 해야하니 혹 그렇지 못하면 더욱 ‘사람이다, 나다’하는 소견만 길러서 마침내 해탈을 기약할 수 없으리라.
청봉착어:금강경에서 석가 세존이 비유한 6가지는 일체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불 같다고 하시고, 말과 글을 쫓지 말고 그 뜻을 근본(自性)으로 계합해 돌려서 아상, 인상 등 4상을 여의지 못하면 해탈할 수 없다 하신 것이다.
또 청, 황, 적, 백, 공, 옥색의 여섯가지 비유는 금강석의 빛을 들어 불성의 묘한 이치를 비유한 것이다.
宗鏡:嗚呼라 微宣奧旨여 石火電光이요 密顯眞機여 銀山鐵壁이로다 瞥生異見하면 滯在中途하여 進步無門이며 退身迷路로다 聊通一線하여 俯爲初機하시니 良馬는 見鞭에 追風千里矣리라
說誼:奧旨는 言旨之玄奧難測也요 眞機는 言機之純而無雜也라 眞機는 一似銀山鐵壁으로 堅固難透며 高逈莫攀이니 奧旨는 如石火電光하여 燦然可見이나 神速難追이니 況今佛이 宣而微宣하시며 顯而密顯하시니 那容擬議於其間哉리오
若是過量漢이면 石火電光을 一捉便捉하며 銀山鐵壁을 一透便透이나 其或未然이면 滯在中途하여 進退俱失이니 由是로 欲爲後學하여 開介徑路하시고자 遂於三十二分에 隨分提綱하고 隨綱著頌하노니 利根者는 把來一看하면 則一經之奧旨와 諸佛之眞機를 便見昭昭於心目矣리라
종경:오호라! 미묘하게 깊은 뜻을 펴심이여, 불꽃 튐과 같고 번개불 같고 은밀히 나툰 참된 선기(禪機)는 은산 철벽(뚫기 어려운 벽)이로다. 문득 다른 소견을 내면 도중에 머물러서 나아갈 문이 없고 뒤로 물러날 길도 잃어 버리도다.
오로지 한 가닥의 길을 펴서 통하게 하고 구부려서 처음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르셨으니 훌륭한 말은 채찍만 봐도 바람 쫓아 천리를 달리게 되는 것이다.
설의:오지(奧旨)는 그 뜻이 오묘하고 그윽(奧旨)하여 측량키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요, 실다운 기틀(自性)은 그 기틀이 순수해서 잡됨이 없음이라.
眞機(진실한 선기)는 마치 은산 철벽과 같아서 견고하여 뚫기 어려우며 높고 멀어서 오르지 못하니 오묘한 뜻은 마치 돌 부딪치는 불빛과 번개불같이 찬란하여 볼 수는 있으나 신속해서 잡기 어렵거니와, 하물며 이제 부처님께서 펴시기를 미묘하게 베푸셨으며 나투시기를 은밀히 나투시니 어찌 그 사이에 사량분별을 용납하겠는가? 만약 뛰어난 근기를 갖춘 이라면 석화전광을 단숨에 휘어잡으며 은산 철벽을 단번에 확 뚫거니와, 혹 그렇지 못하면 그 도중에 머물러서 진퇴를 잃게 되는 연유로 이로 말미암아 후학을 위해서 길을 열어 주고자 하여 드디어 三十二分에 각각 분을 따라서 종지의 긴요한 것을 들고 그에 따라서 偈頌(노래 글귀로 칭송한 글)을 짓노니, 영리한 자는 근기(根機)를 지닌 자로 펴서 한번 보면 곧 이 經의 깊은 뜻과 모든 부처님의 참다운 기틀이 문득 마음의 눈에 밝게 드러남을 보리라.
청봉착어:최상근기는 이 금강경을 한번 읽으면 단박 계합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근기들은 글에만 쫓아 그 오묘한 선지를 계합할 수 없겠으므로 그들을 위해 三十二分으로 나누어 놓은 각각 구절에 긴요한 부분을 들어 게송을 지으니 이로써 부처님의 참다운 기틀을 쉽게 깨우치게 되리라고 하셨다.
金剛般若波羅蜜經
說誼:一切衆生이 內含種智하되 與佛無殊이나 但以迷倒로 妄計我人하여 淪沒業坑하고 不知反省하니 所以로 釋迦老人이 示從兜率로 降神王宮하고 入摩耶胎하사 月滿出胎시어 周行七步하시고 目顧四方하시고 指天指地하시며 作獅子吼하시되 天上天下에 唯我獨尊하다 시니라 年至十九에 四門遊觀하시고 觀生老病死의 四相相逼하고 子夜에 踰城出家하시어 入雪山하여 六年苦行하시다 臘月八夜에 見明星悟道하시고 初遊鹿苑하시어 轉四諦法輪하시고 次說阿含方等等部하시고 漸令根性純熟케 하시어 方說此般若大部하시어 開示悟入佛之知見하시니 夫大雄氏之演說般若는 凡四處十六會라 經二十一載에 說半千餘部하시니 於諸部中에 獨此一部를 冠以金剛으로 以爲喩者는 此之一部가 以約該博하고 金剛一喩가 廣含諸義라 故로 以爲喩也니라 般若는 此飜爲智慧니 何名爲智慧하면 虛空이 不解說法聽法하며 四大가 不解說法聽法이나 只今目前에 歷歷孤明한 勿形段者가 能說法聽法也니라 此說聽底一段孤明이 輝天鑑地하며 曜古騰今하여 行住坐臥와 語?動靜하는 一切時一切處에 昭昭靈靈하며 了然常知하니 此所以得名爲般若也니라 喩以金剛하신 意謂何以인가 此一段孤明이 處萬變而如如不動하며 淪浩劫而宛爾常存하니 宜乎比乎金剛之堅也요 截斷竹木精靈을 截斷彌天葛?하니 宜乎比乎金剛之利也하니 喩以金剛하신 其意以此니라 亦名摩訶般若니 摩訶는 此飜爲大니 何名爲大인가 此一段孤明이 語其明則明逾日月하고 言其德則德勝乾坤이며 其量이 廣大하여 能包虛空하며 體遍一切하여 無在不在라 三世에 初無間斷時이고 十方에 都無空缺處하니 此所以得名爲摩訶也니라 波羅蜜은 此飜爲到彼岸이니 何名爲到彼岸인가 迷之者曰衆生이요 悟之者曰佛이니 雲收雨霽하며 海湛空澄하여 霽月光風이 相和하고 山光水色이 互映은 此悟者之境界也요 霧?雲籠하며 上明下暗하여 日月의 掩其明하고 山川이 隱其影은 此迷者之境界也라 迷之而背覺合塵을 名在此岸이요 悟之而背塵合覺을 名到彼岸이니 此所以得名爲波羅蜜也니라 經者는 徑也이니 詮如上之妙旨하시어 開後進之徑路하여 令不涉乎他途하고 能直至乎寶所니 此所以得名爲經也니라 又略而釋之則摩訶般若者는 通凡聖該萬有하고 廣大無邊之智?닷?요 金剛般若者는 堅不壞利能斷하여 鎔凡鍛聖之智慧也니라 波羅蜜者는 悟如是旨하고 行如是行하여 超二死海하여 達三德岸也니라 經者는 以如是言으로 詮如是旨하여 現益當世하고 成轍後代也니 或名金剛般若波羅蜜經하며 或名摩訶般若波羅蜜經이 其義以此니라 題以八字로 摠無量義하고 經以一部로 攝難思敎하니 題稱八字에 念過一藏이니라 經持四句는 德勝河沙니 經義與果報를 佛稱不思議가 蓋以此也니라 然이나 此는 只是約敎論耳이니 若約祖宗門下一卷經하여 言之則入息出息에 常轉經이거늘 豈待形於紙墨然後에 以爲經哉인가 所以로 古人이 道하되
般若波羅蜜이여 此經非色聲이것만
唐言?飜譯하고 梵語强安名이도다
捲箔秋光冷이요 開窓曙氣淸이니
若能如是解하면 題目甚分明하니라
설의:일체중생이 안으로 種智(모든 지혜:본래 구족한 불성의 모든 지혜 종자, 일체 진리를 아는 지혜)를 머금고 있는 것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지만 다만 미혹함으로써 망령되이 나다, 사람이다 분별해서 업의 구덩이에 빠져 반성할 줄 모르므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으로부터 왕궁에 내리시어 마야부인의 태에 들어가셔서 달이 차서 출생하시어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시고 하늘과 땅을 가리키시며 사자후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느니라.
나이 19세가 되시어 네 방향의 문을 두루 돌아보시고 생로병사의 네 가지 모습이 서로 핍박함을 보시고 한밤중에 성을 넘어 출가하시어 설산에 들어가셨느니라. 육년 고행을 하시다가 섣달 팔일(음12월 8일) 밤 샛별을 보시고 진리를 깨달으셨도다. 처음 녹약원에서 사제법(고,집,멸,도)을 펴시고 다음에 아함과 방등같은 법을 설하시고 차츰 근기따라 법을 순수하고 성숙하게 하시어 바야흐로 이 반야대부를 설하시어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보여서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시니 크신 분(부처님)이 반야를 연설하신 것은 무릇 네 곳에서 16회 달하셨으며 二十一년 동안 六百여부를 설하시니 여러 부 가운데서
비단 이 일부를 金剛이라고 이름 붙이고 비유로 삼으신 것은 이 일경이 간략하지만 많은 뜻을 지니고 있고, 금강이라는 하나의 비유가 온갖 뜻을 널리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까닭으로 비유로 삼은 것이니라.
반야는 지혜라 번역되니 무엇을 이름하여 지혜인가? 허공이 설법이나 청법할 줄 모르며 사대육신 또한 설법, 청법 할 줄 모르나 지금 눈앞에 역력히 분명한 형상 없는 것이 능히 설법, 청법 하느니라. 이 말하고 들을 줄 아는 홀로 밝은 한 물건이 이 하늘과 땅에 꽉 차 빛나고 있으며 옛과 오늘에 빛나고 드날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하는 일체시 일체처에 또렷또렷하게 항상 분명히 아나니 이것을 반야라 이름한 까닭이니라.
금강으로써 비유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하나의 홀로 빛나는 것이 온갖 변화에 처하되, 여여해서 움직이지 않으며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항상 있으니 금강의 견고함에 비유한 것이 마땅한 것이요, 흔들리는 대나무 같은 심정(알음아리)을 베어 끊으며 하늘에 가득한 번뇌와 망상들을 절단하니 금강의 예리함에 마땅히 비유할 만 한 것이니 금강으로써 비유하신 그 뜻이 여기에 있느니라.
또 마하반야라고도 이름하는 것은 마하는 크다고 번역하는데 무엇을 이름하여 크다고 하는가? 이 하나의 홀로 빛나는 것은 그 밝기를 말하면 해와 달보다 밝고, 그 덕을 말하면 그 덕이 하늘과 땅보다 뛰어나며 그 양이 광대하여 능히 허공을 에워싸고 그 체가 일체에 두루하여서 있고 있지 않음이 없는지라. 과거, 현재, 미래에 한 순간도 끊일 사이가 없고 시방에 도무지 빈곳이 없으니 이것이 마하라 이름한 까닭이니라.
또 바라밀은 도피안이라 번역하니 무엇을 이름하여 도피안이라 하는가? 미혹한 사람을 중생이라 하고 깨달은 사람을 부처님이라 하나니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며 바다가 맑고 하늘도 맑아서, 개인 달과 맑은 바람이 서로 화하고 산색과 물빛이 서로 비침은 깨달은 사람의 경계요, 안개가 덮이고 구름이 끼며 위에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의 그 밝음을 가리우고 산천이 그 자취를 숨김은 미혹한 사람의 경계로다. 미혹하여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 속에 있음을 이 언덕(此岸)에 있다 하고 번뇌를 등지고 깨달음에 합함을 도피안(저 언덕에 이르름)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까닭이니라.
經이란 길(徑)이니 위와 같이 묘한 뜻을 말씀하시어 후진들이 가야 할 길을 열어서 다른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고 능히 보배의 장소에 곧바로 이르게 함이니, 이것이 經이라 이름한 까닭이니라.
또 간략하게 해석한다면 마하반야는 범부와 성인에 다 통하고 우주간의 모든 것을 전부 지니고 있는 광대 무변한 지혜요, 금강반야는 견고해서 파괴되지 않고 예리해서 능히 모든 것을 끊으니, 범부를 녹이고 성인을 단련하는 지혜니라, 바라밀은 이와 같은 뜻을 깨닫고 이와 같은 행을 행해서 二死海(생사 고통의 바다)를 뛰어넘어 三德(법신, 지혜, 해탈의 덕)의 언덕에 도달함이니라.
經이란 이와 같은 말로써 이와 같은 뜻을 설명해서 當世에도 이익을 주고 후세 사람에게도 법도를 이룸이니 그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며 혹은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한 뜻이 여기에 있느니라. 제목 여덟 자로 한량없는 뜻을 함축하고 있고 이 경 한 권으로 사량할 수 없는 일대 가르침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제목 八字(마하반야바라밀경, 금강반야바라밀경)를 외움(念:뜻을 계합하여 생각함)은 부처님의 일대장경을 한꺼번에 모두 념하는 것이니라. 경의 4구게를 받아 지니는 것은 그 덕이 항하사 보다 뛰어나(殊勝)나니 경의 뜻과 과보를 부처님께서 불가사의하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느니라. 그렇지만 이는 교학적인 입장에서 논했을 뿐이니 만약 선종(祖宗門下)에서 이 경을 요약하여 말하자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항상 경을 굴리거늘, 종이에 글로 형상화시킨 것을 기다린 연후에만 어찌 경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시되
반야바라밀이여!
이 경은 모양과 소리가 아니건만
한자로 부질없이 번역하고
梵語로 억지 이름을 두었도다.
발을 거두매 가을빛이 차고
창문을 열매 새벽 기운이 맑으니
만약 이렇게 능히 안다면
제목이 심히 분명하다 하니라.
청봉착어:중생의 근본 바탕이 본래 일체를 구족하고 있으나 무명으로 인해 망령되이 我執(나라고 고집)으로 실체가 없는 나에 집착해서 업을 쌓아 윤회를 받음을 안타까이 생각하시어 석가세존이 대자비심을 일으키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 깨우친 뒤 49년 설하신 가운데 반야대부를 4처에서 16회 6백여부를 21년간 설하셨으며 그 가운데 이 경을 금강에 비유하신 것은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니 반야는 지혜이며 금강은 바로 이 지혜를 비유한 것으로 중생의 일체 망념을 이로써 끊기 때문이다. 마하는 견줄 수 없는 우주 삼라만상을 모두 포섭하니 시공을 초월해 크다는 뜻이며 바라는 건너다(到)는 뜻이며 밀다는 彼岸(곧 청정한 마음 땅)이니 이렇게 깨달아 알면 곧 해탈로써 생사 고해를 뛰어 넘게되는 것이다. 경이란 길이란 뜻이니 이 말씀(眞理)을 깨달아 피안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목 가운데 오묘한 뜻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하신 것이다. 이 경 가운데 4구게만 수지해도 어떤 복덕보다 수승하거늘 하물며 이경의 전체를 수지하는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이니, 경을 굴릴지언정 경의 굴림을 당해(말과 글에 끄달림)서는 그르친다는 설명이다.
雙林傅大士 贊(칭송하는 게송)
六祖大鑒禪師 口訣(문자가 아닌 말로 전하는 오묘한 뜻)
圭峰密禪師 纂要(경의 요긴한 뜻을 모아 해석함)
冶父?川禪師 頌(게송:긴요한 대의를 노래 싯귀로 읊음)
豫章鏡禪師 提綱(종지의 대의를 들어 설명함)
涵虛堂得通 說誼(바른 이치를 설명함)
圭峰密禪師 疏論纂要 幷序
圭峰:鏡心은 本淨하고 像色이 元空이라 夢識이 無初이나 物境이 成有하니 由是로 惑業이 襲習하여 報應이 綸輪하여 塵沙劫波로 莫之?絶이니라
說誼:心也者는 ?虛妙粹하고 炳煥靈明하여 如彼古鏡이 體自虛明하여 瑩徹無?라 妙絶名相之端하고 淨無能所之跡이니 故로 云하되 鏡心이 本淨이라하니라 內而根身과 外而器界를 皆謂之像色이니라 阿賴耶識一念之妄이면 變起根身器界하나 若離妄念하면 卽無一切境界之相이라 故로 云하되 像色이 元空이라하니라 夢識은 只因不覺而有니 心若常覺이면 夢識이 無由現發이니라 故로 云하되 夢識이 無初라 하니라 不覺心動을 名爲覺明이요 因明起照하여 見分이 俄興하고 由照立塵하여 相分이 妄布니라 於是에 根身이 頓起하여 世界成差이니 故로 云하되 物境이 成有라하니라 根身이 旣興하여 世界已成하니 根塵이 相對하고 識風이 相鼓하여 鎖眞覺於夢宅하여 ?智眼於風塵하여 沈迷三界之中하고 匍匐九居之內하여 生死循環하여 無有窮已이니 故로 云하되 由是로 惑業이 襲習하여 報應이 綸輪하여 塵沙劫波로 莫之?絶이라하시니라
규봉:마음 거울은 본래 깨끗(빔)하고 형색은 원래 공한 것이다.
그러나 형상도 없이 있으며 알 줄 아는 것(夢識)은 처음이 없으나 사물인 경계가 있음을 이루니, 이로 말미암아 온갖 미혹의 업이 쌓여 과보가 계속 줄을 이어서 모래 먼지와 같고 파도 같이 많은 세월동안 끊기질 않는 것이다.
설의:마음이란 깊고 텅 비고 미묘하고 오롯하고 찬란하여 밝고 신령함(炳煥靈明)이 옛 거울이 본체가 스스로 비고 밝아 걸림이 없이 밝게 비치는 것과 같은지라. 妙하여 이름할 실마리가 끊어지고 깨끗하여 能所(주관과 객관)의 자취가 없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마음 거울이 본래 깨끗하다”고 한 것이니라. 안으로의 몸의 근원과 밖으로 중생계의 경계를 모두 일러 형상이라 하나니 제8함장식(我賴耶識)의 한 생각이 망념을 일으키면 몸의 뿌리(五根)와 중생계로 변하여 일어나나니, 만약 이 망념을 떠나면 일체 경계의 상이 없으므로 형상은 원래 공하다 하셨느니라. 환 같은 아는 것이 나라는 것이 있음으로 소견 짓는 것(夢識)은 다만 깨닫지 못함으로써 있으니 마음이 만약 항상 깨어 있으면 몽식이 나지 않으므로 이르기를 몽식은 처음이(始作) 없다고 하시니라.
마음이 움직임을 깨닫지 못한 것을 이름하여 각명(覺明:깨달아야할 마음)이라 하고, 밝음으로 인해서 비춤을 일으켜서 아는 소견이 갑자기 일어나고 비춤으로 말미암아 티끌을 일으켜 상이 있는 것으로 삼게 되(相分)어 망령되게 퍼지는 것이니라. 이에 근신(몸의 뿌리인 오음)이 몰록 일어나서 세계가 온갖 차별을 이룸으로, 이르되 사물인 경계가 있음을 이루었다 하는 것이니라.
몸의 뿌리가 모두 일어나서 세계가 이미 이루어지니 망념(根塵)이 서로 마주하고 인식작용(識風)이 서로 부딪혀서 참다운 깨달음은 夢宅(환몽의 집)에 가두어 지혜의 눈이 풍진(風塵)에 미혹되어 멀게 하여 삼계 가운데 어리석게 빠지고 九居(중생이 머물기를 원하는 9가지 주처)안에서 기어다니며 나고 죽기를 거듭하여 끝날 때가 없으므로 이르되 “이로 인하여 미혹된 업장이 무르익고 과보(果報)가 이어져 모래 수 같고 끝없는 파도같이 끊어지지 않는다”하시니라.
청봉착어:마음 거울(比喩)은 본래 있음이 없어 빈 것이나 이 거울로부터 일체 경계가 나투어지는 것이나, 그 근본 바탕을 관해 보면 일체가 공적할 뿐인데 망념을 일으켜 꿈같은 알음알이를 내어 있음을 집착함으로서 업을 짓고 그 과보로 끊임없이 육도 윤회를 받는 것이다.
圭峰:故我滿淨覺者가 現相人中하시어 先說生滅因緣하시고 令悟苦集滅道하시니 旣除我執이나 未達法空이라 欲盡病根하여 方談般若하시니 心境이 齊泯이라 卽是眞心이요 垢淨이 雙亡하면 一切淸淨이로다 三千瑞煥하시고 十六會彰하시니 今之所傳은 卽第九分이라 句偈隱略하고 旨趣深微하여 慧徹三空하고 檀含萬行이로다 住一十八處하시어 密示階差하시고 斷二十七疑하시어 潛通血脈하시니 不先遣遣이며 曷契如如리오 故雖策修나 始終無相이로다 由斯로 敎理皆密하고 行果俱玄하여 致使口諷牛毛나 心通麟角이도다 或配入名相하여 着事乖宗하여 或但云一眞이라하여 望源迷派하니 其餘胸談臆注는 不足論矣로다 河沙珍寶와 三時身命도 喩所不及인데 豈徒然哉리오 且天親無着은 師補處尊이거든 後學은 何疑하여 或添或棄리오 故今所述은 不攻異端하노니 ?是論文이리라 乳非城內하니라 纂要名意와 及經題目은 次下卽釋이니 無煩預云하니라
稽首牟尼 大覺尊이 能開般若 三空句하시어
發起流通 諸上士하노니 冥資所述 契群機하소서
규봉: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맑게 깨달으신(확철) 분(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사람 속에 나타내시어 처음엔 생멸 인연을 설하시고 고집멸도를 깨닫게 하시니, 그리하여 아집은 없앴으나 法空은 통달하지 못했음으로 병의 뿌리까지 뽑고자 하여 바야흐로 반야를 설하시니, 마음과 경계가 함께 없어짐이 곧 참마음이요 더럽고 깨끗함이 모두 멸하면 일체가 청정한 것이다.
삼천 대천세계에 상서로움을 나투시고 十六회에 드러내시니 지금 전하는 바는 第九分에 해당한다. 글귀와 게송에 간략하게 숨어있고 그 뜻이 깊고 미묘해서 지혜는 三空(아공, 법공, 구공)에 사무치고(平等) 보시(檀)는 모든 행(차별상)을 머금은 것이다. 十八처에 머무시며 세밀히 차례로 가려 보이시고 二十七가지 의심(일체의 의심)을 끊으시어 그윽이 혈맥을 통하게 하시니 먼저 버렸다는 마음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어찌 여여함에 계합하리오.
그러므로 모름지기 경책해서 닦으나 처음과 끝이 相이 없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교리가 모두 은밀하고 행한 과보가 함께 그윽함을 갖추어서, 입으로 외우는 이는 소털과 같이 많으나 마음으로 통하는 이는 기린의 뿔과 같이 귀하게 되는데 이르른 것이다. 혹은 명자(名字)와 차별상에 끄달려 事(현상)의 뜻에 집착하여 근본 뜻을 어기며, 혹은 다만 一眞(하나의 참다움)이라 하여 근원(源:定)만 바라보아서 한쪽(慧:用)은 어두우니 그 나머지의 자기 주장(胸談臆注)은 족히 논할 것도 없도다. 항하사 같은 진귀한 보배와 하루 세 번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도 그 비유가 미치지 못한다 하거늘 어찌 부질없는 짓이랴. 또 천친과 무착은 미륵 보살을 스승으로 하셨거늘 (규봉 찬요에 미륵보살 80송과 무착, 천친론 등이 포함됨) 후학은 무엇을 의심하여 혹 첨부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서술한 바는 異端을 공박하지 않으니 疏는 論文(천친, 무착의 뜻을 끌어옴)이라. 우유는 성안의 것(가짜가 아님)이 아니어야 한다. 纂要한 이름의 뜻과 경의 제목은 다음에 해석하게 되므로 번거로이 미리 말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