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내 교회를 세우리니!
렘 5:1, 26-31, 롬 1:16-17, 마 16:18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지난 9월 우리 교단은 ‘종교개혁 500주년,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주제로 101회 총회를 개최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만, 세세하고 복잡한 내용은 신학자나 목회자의 몫으로 하고 여러분은 이 주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서 종교개혁의 역사와 교회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년 2017년은 종교개혁(1517년)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기장은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해요, 한국교회는 선교 130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인용한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주제로 총회를 열고 있으니 아직도 한국교회는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전제가 이 주제에는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며 탄식하셨던 예수님께서 아직도 하나님의 교회가 “도난당하고, 농락당하고, 변질하였다.”라고 슬퍼하시는 현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이 이런 주제를 정하게 된 배경입니다.
루터가 1517년 <95개조 논제>를 발표하던 시기를 빗대어 ‘교회의 바벨론 포로기’라고들 이야기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힌 시대처럼, 당시 교황중심의 성직체제로 인해서 교회가 <바벨론 포로기>를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교회는 더 심각하고 더 철저하게 새로운 시대의 <신바벨론포로기>를 살아가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1953년 우리 교단이 출범할 때, 양과 질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옳지만, 선택하고 결단할 때에는 ‘질’을 선택하겠다는 신념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정체성의 혼돈이 생기기 시작했고, 양과 질 모두 상실한 군소교단으로 추락해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양적인 성장을 추구했던 교회들 역시도 방향성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깃들어야할 교회가 조롱거리가 되고,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너희들이 꾸려가는 교회는 ‘내’교회가 아니니 나는 ‘내 교회를 세우련다!“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 어떤 다른 소유자나 힘 있는 자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입으로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권력들로 인해 교회는 끊임없이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하 깊은 터널 끝에 공간이 있고, 노예들은 쇠사슬에 손발과 머리를 고정 당한 채로 벽면 한 곳만 바라보도록 묶여 사는 생활을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생활을 한 사람들은 세상은 온통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벽면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실재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두운 환경에 적응되어 살아왔기에 밝은 빛을 싫어하고, 빛을 보면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느 용감한 노예가 쇠고랑을 풀고, 긴 동굴을 걸어나와 동굴 입구에 도달하고 마침내 동굴 밖에 광명천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동굴에 갇혀 사는 친구들이 불쌍해서 본래 동굴로 돌아와 자기가 본 광명 세상을 말하고 모두 쇠고랑을 끊고 나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정신 병자로 몰고, 선동자로 매도하여 박해하고 처단한다는 은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거짓 주인의 첫번째 형태는 정통 신학교리체계에 굳어진 이들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교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자신들에게 귀속시킨 자들입니다. 둘째로, 냉전 시대의 정치이데올로기입니다. 모든 것을 이념 논쟁으로 몰아가고 거기엔 광기와 형제 살인의 증오심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130년 동안 양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뤘지만, 130년 교회사 중에서 가장 무시당하고 비판받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신자유주의 이념이라는 세계관입니다. 힘의 숭배와 물질적 행복추구와 무한경쟁을 찬양합니다. 교회는 이 신자유주의 이념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때문에 교회가 세상을 변혁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에 완전히 먹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1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교회당과 교회가 혼동되어버린 시대
120-130년전 처음 기독교를 믿었던 우리 선조들은 교회당과 교회를 분명하게 구별할 줄 아는 언어생활을 했습니다. 일반 신도들은 ‘교회당’보다는 ‘예배당’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예배 드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은 기독교의 여러 가지 종교적인 행사가 이뤄지는 공간적인 상징물로 인식되었기에 1970-80년대에도 교회당에 군홧발을 들이미는 것은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회’와 ‘교회당’을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부터 기독교 안에서 교회와 교회당과 혼동하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양적으로 급성장하면서 대형교회마다 큰교회당 짓기 경쟁과 교회개척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건물로서의 ‘교회당’이 들어서면 ‘교회’가 섰다고 동일시하는 풍조가 발생했고, 교회당을 세우면 곧 ‘교회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교계신문에 ‘교회 양도, 판매, 교환’한다는 상업광고가 버젓이 나가는 기가 막힌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 교회당의 혼동, 이것은 ‘언어의 타락’입니다. 언어의 타락은 곧 정신의 타락이요, 영혼의 타락을 반영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난 130년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지만, 그로인한 희생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콩깍지와 콩알은 함께 자라는 법입니다. 콩깍지는 콩알을 보호하고 감싸줍니다. 순서대로 말하면, 처음엔 콩깍지가 더 뚜렷한 형태를 이룬 후에 콩알은 배아처럼 작게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농부의 농사 목적은 콩깍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콩알에 있습니다. 추수 때 콩깍지는 따로 분류되어 땔감이 되거나 소죽을 쑬 때 사용되고, 콩알만 창고에 들입니다.
교회당 건물, 성직 질서, 각종 신학과 교리 등은 알고 보면 콩깍지입니다. 그 안에서 자라는 신령한 콩알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유전자를 품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으로 영구는 것이요, 그들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몸이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세포마다 동일한 유전자가 있듯이, 교회의 본질은 예수의 마음과 영을 가진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인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3. 종교개혁의 3대 과제
올해 우리 교단 총회의 주제는 <종교개혁 500주년, “내 교회를 세우리니!”>였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단지 500살 생일을 기념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500년이 지나는 동안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이 변질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성찰을 하자는 의미입니다.
종교개혁의 3대 표어는,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 오직 성서만 sola scriptura, 오직 은총만 sola gratia 였습니다. 그런데 500년이 지나는 동안 이 3대 표어에 변질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기독교가 병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 이제 우리는 교리신앙에서 인격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과 신실하심을 굳게 믿는 인격적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13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갖은 교리로 무장한 한국교회는 심지어는 자신의 뿌리조차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지경에 서있습니다.
오직 성서만 sola scriptura, 종교개혁 당시만 해도 성경은 라틴어 성경이 대부분이었고, 그것도 성직자만 가지고 있었고, 일반 신도들은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성경보다 우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생각에 항거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경전에 메인 종교, 책 종교, 문자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설교나 말씀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청중을 웃기고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코미디가 되었거나, 전하는 자가 말씀의 깊은 뜻도 알지 못할뿐 아니라 자신은 그렇게 살 생각도 없으면서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야 할 때이며,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만 합니다.
오직 은총만 sola gratia, 중세시대에는 공로신앙, 공적신앙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런 공적은 은밀한 거래로 이뤄졌고, 고해성사나 면죄부 등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것에 반기를 든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오직 은총으로만!’은 본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 응답하는 섬김과 자발적인 봉사, 사랑의 실천신앙을 잃어버리고 <싸구려 은총신앙, 앉은뱅이 신앙, 입술로만 믿는 신앙인>을 양산했고, 언제부턴가 공로신앙이 한국교회에 은근슬쩍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해외선교사업이나 국내선교사업의 은근한 실적자랑과 열심과시 같은 것들이 자기과시의 기회로, 공로신앙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한남교회가 개혁되어 살아나면 우리 교단도 살아날 것이요, 우리 교단이 개혁되어 살아나면 한국 기독교가 살아나고, 한국 기독교가 살아나면 한민족이 다시 살아나고, 한민족이 새로운 인류문명의 산파 역할을 하면 인류가 멸망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로부터 이 거룩한 개혁은 시작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개혁의 주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시고, 그렇게 교회를 세운 이들에게 은총을 주시고, 그 은총이 감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욱 든든하게 서갈 것입니다. 우리 한남교회가 주님이 세우시는 귀한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