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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 ‘주타
타비야’에서 바라본 사라예보 시내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Sarajevo)가 우리 귀에 익숙한 것은 1984년 제14회 동계 올림픽 대회 때문이다.
사라예보는 해발 약 537m 분지에 자리한, 아름다운 도시다. 그 아름다움 속에는 무수한 흰색의 묘비가 알맹이처럼 박혀있다. ‘발칸의 화약고’라
불리는 사라예보에는 아직도 그 아픔이 부유(浮遊)하고 있다.
올드타운에 남은 오랜 역사의 흔적들 신유고슬라비아의 중심지였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사라예보 행(약
300km) 버스를 타고 거의 8시간 만에 사라예보에 도착한다.
세계1차대전의 시발점이 됐던 곳, 보스니아 내전을 겪었던 이 나라의 첫 느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름답다’이다. 아픔이 덕지덕지 배어 있을
것 같은 선입견과는 달리 올드타운을 찾아 가는 길목의 밀야츠카(Miljacka) 강과 높은 산이 어우러진 사라예보의 풍치는 평화롭기만
하다.
세헤르 세히야(Seher Cehaja) 다리 옆에 있는 국립대학도서관의 현대적인 건물이 눈길을 끈다. 오스트리아 제국시절에 건축돼
1945년까지 시청사였던 이 곳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직전에 들른 곳이기도 하다.
도서관 뒤켠의 올드 타운은 ‘사라치’ 골목이다. 지중해 풍의 기와가 얹어져 있는,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단층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틈새 없이 샵, 레스토랑이 이어진다. 구리, 주석, 은 등을 수공으로 만들어낸 물건들이 골목을 빽빽하게 채워낸 옛 터키
직인거리(일명 망치소리 거리), 15세기 중엽, 중세시대의 문물이 만나고 남북의 교역이 이뤄지던 베지스탄(Bedesten, 중앙시장)에는 잡화가
한가득이다.
16세기 무역상들의 여관으로 사용됐던 2층 구조의 목조건물인 모리차 한(Morica’han)은 호스텔이 됐다. 체바피(Cevapi),
부렉(burek)등 전통음식을 파는 집에는 손님들이 줄서서 기다린다. 무엇보다 골목마다 놓인 야외 테이블에는 물담배 피는 연기가 뽀얗다.
골목마다 남녀 불문하고 젊은이들이 물담배 피느라 여념 없다. 골목마다 희뿌연 안개가 피어난다. 전쟁 때 쓰던 총알등을 공예품으로 판매하는 샵은
이 나라의 상흔을 보여주고 있다. 터키식 향긋한 길거리 커피가 흐르는 사라치 골목은 오스만 시대를 재연해 놓은 세트장 같다.
길고도 긴 역사가 뒤섞여 있는 사라예보의 올드타운. 관광객들은 보는 재미에 빠져드나 가난을 극복해내려는 상인들의 몸짓을 감지한다. 아직도
아프디 아픈 전쟁 상흔들을 이겨내려는 현실적인 몸부림이 안타깝다.
보스니아는 고대에는 알바니아계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일라이리언(Illyrians)들이 정착했다. 기원전(BC) 3세기 무렵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6세기 후반부터 슬라브족들이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이후 동로마 비잔틴(1018~1462)의 지배를 받다가 415년간
오스만투르크(1463~1878)의 지배 하에 있게 된다. 이때 현재의 국명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된다. 이 시대에 보스니아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회교도로 개종했다. 그러니 현재 보스니아에 오스만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러시아-터키
전쟁(1877∼1878년) 뒤 열렸던 베를린 회의를 거쳐 보스니아의 통치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간다. 그 제국때 사라예보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1863~1914)의 암살 사건(1914년 6월28일)이 발생한다.
1차 대전의 도화선 된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고 이때부터 ‘세계의
화약고’란 악명을 얻게 된다.
그 암살 자리가 ‘라틴(Latin)다리’ 앞이다. 200여년이나 된 돌다리(길이 39m, 폭 4.3m, 높이 2.4~3m) 앞에 사라예보
박물관(Muzej Sarajevo, 2007년 재개장)이 있다.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을 박물관 건물 벽엔 당시의 기록 사진들이 걸려있다.
실내에는 오스트리아 점령 40년(1878~1918)과 피살 당시 황태자 부부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조피(Sophie
Chotek)의 밀랍 인형이 만들어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패배했다. 그리고 신유고슬라비아가 등장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가 공산 정권을 수립하면서 여섯개 공화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과 두개 자치주(코소보, 보이보디나)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 유고연방)이 탄생한다. 그러나
‘티토’가 죽고 나서 균열이 났고 여섯나라가 독립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살육이 빚어지는데 치명적으로 당한 곳이 보스니아와 코소보다.
1991년 크로아티아에 이어 1992년 보스니아마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는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내전 4년 동안 25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구 400만명 가운데 40%가 난민이 되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결국 UN이 개입하면서 내전은 종결됐지만 그 끔찍한
흔적은 묘지로 남아 있다. 사라예보를 한눈에 조망하려면 브라트닉 요새(Vratnik Fort)로 올라가면 된다.
사라예보 북동쪽의 국립묘지를 비껴 언덕위로 올라 시로칵(Sirokac) 타워의 문을 넘어 더 올라가면 ‘비옐라 타비야(Bijela
Tabija)’다.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도시를 조망할 수도 있다. 이곳보다 더 올라가면 주타 타비야에 이른다. 부서진 성곽이 위태롭게 남아
있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사라예보 풍광에 넋을 잃는다. 사라예보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그러나 세곳도 넘는 넓은 공동묘지를 보면서 유고의
고도(古都)인 사라예보에 스며있는 아픔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언제쯤에나 이 아픔이 회복될 수 있을까?
■여행정보 ○ 항공편 : 직항은 없다. 대신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있다. 국제선 노선만을 운항하며
정기편으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터키 이스탄불,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 대부분 나라의 직항 노선이 운항된다. ○ 버스나 기차편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나 크로아티아에서 모스타르를 거쳐 접근하면 편리하다. ○ 현지교통 : 매우 낡은 트램과 버스가 있다. 표가 다르기에 굳이
1일권을 살 필요는 없다. ○ 관광안내소 : 국립 안내소와 시립 안내소 두군데가 있다. 시립 관광안내소에 가야만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시립 안내소:www.starigrad.ba 전화: +38733282385, 이메일:info@starigrad.ba ○ 언어 :
공용어는 세르비아어나 크로아티아어다. 키릴 문자나 라틴 문자를 주로 사용한다. 음식정보 : 음식이 아주 맛이 좋다. 이 나라의 전통음식으로는
체바피(Cevapi), 부렉(burek)이 있다. 부렉은 파이 형태의 빵 속에 고기, 야채, 치즈 등을 넣어 만든 빵이다. 또 올드타운의
ascinica bistrica는 닭스프를 비롯해 음식들이 맛있고 저렴하다. 단 낮 장사만 한다. 체바피는 Petica Cevabzinica가
유명하다. 손님이 너무 많을 때는 포장도 가능하다. 요새 가는 길목에 있는 Bijela Tabija레스토랑도 피자가 맛있다. 사라예보의 외곽에
있는 일리자(ilidza)에는 Restoran Brajlovic가 유명하다. 화덕에 굽는 고기요리가 푸짐하다. ○ 숙박정보 : 숙박비가
저렴한 편이다. 마하라(Mahala) 게스트하우스(41번지)는 가정집을 개조한 곳으로 가격이 저렴하며 주인 내외가 매우 친절하다. 몬테네그로
대사관을 기점으로 골목 위로 쭉 올라가면 된다. ○화폐 : ‘보스니아 마르카(Marka)를 쓴다. 현지에서 ATM에 카드로 인출하면
된다.주변 볼거리 : 트램이나 버스를 타고 일리자에 가면 넓은 공원, 스파, 보스나 강의 발원지(Vrelo Bosne)를 볼 수 있다.
발원지까지 이어지는 가로수 길이 아주 아름답다. 마차를 타거나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