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무하유지향
春川 할머님은 떠나셨다. 장자가 말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그곳으로 서둘러 떠나신 것이 아닐까?
무하유지향은 글자 그대로 세속적인 번거로움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곳, 즉 이상향이다. 우주, 우주적 존재 우주 밖으로 나가서 무하유의 고을에서 논다는 뜻이 아닐까? 좋아하시던 내 글 한 줄은 밑줄까지 쳐 영혼에 담으시고 그곳 자연의 낙토에 안착하신 것일까? 아니다. 극락왕생이 아닌 구중심처에서 굽어보시며 연일 내 글을 바라보며 계시는지도 모른다.
어둠이 소리 없이 퍼붓는 공간을 정신 이상자가 되어 무심히 바라본다. 어느 공간으로 문학소녀이신 춘천 할머님이 당도하셨을까? 그곳은 어떤 곳일까?
春川 할머니와의 사랑 이야기가 여기저기 비 온 뒤 개삼 터지듯 무질서하게 영혼을 적신다. 마치 끈 떨어진 호박? 탯줄이 잘린 신생아? 홀로서기하며 높은 절벽에서 여린 날갯짓을 하며 뛰어내린 노란 입에 꼬리가 짧은 새끼 원앙이 틀림없다.
언젠가 노란 살구를 가지고 춘천 할머님 댁을 찾을 때였다.
-작가 선생님! 너무 고맙네요. 이 할미를 누가 이렇게 생각해 주겠어요. 아들보다도 더 중하기까지 하네요.
-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 역시 작가로 등단해 처음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아 항상 힘이 넘쳐요. 만족해요.
-항상 걷지를 못하지만 또 심장이 약해서 늘 가슴을 풀어놓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신다면 그래도 할미가 여자이기에 가슴도 처매고 단정히 옷을 매무시를 하고 기다리곤 했지요.
문학소녀처럼 또박또박 거침없이 던지시던 말들이 다시 가슴을 친다.
남녘에서 태풍과 엉기어 태질하던 며칠 전, 저기압성 강우와 전선성 강우가 목마르던 중부지방에 상륙한다던 그날이었다. 뻥 뚫린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어 작은 도서관에서 수십 장씩 낙서하며 텅 빈 영혼을 채우고 있었다.
도서관 앞 후박나무가 드디어 맑은 빗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후두득-. 흩어진 영혼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창가에 선다. 소나기 장마가 드디어 이 고장에 당도한 모양이다.
-정말 떠나신 것일까?
이름 없는 글쟁이 작품에 흠뻑 취해 행복했노라던 春川 할머님의 사랑이 목마르다.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 짓고 천상에서 올라 메마른 글쟁이에게 단비를 뿌려주는 것이 분명했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평생 처음 가르쳐 주신 春川 할머님-.사랑이란 무엇인가? 고작 이성 간의 사랑만은 아니다. 지팡이로 두 다리를 제어하며 항상 남의 글을 암송하고 작가에게 흠뻑 힘을 실어주시던 春川 할머님의 사랑이 진정 값지다. 내뿜던 향기가 이제 사랑이란 그릇에 담겨 실핏줄 곳곳까지 전해온다. 인향만리(人香萬里)였던가!
고희 중반에서 희수(稀壽)를 눈앞에 둔 春川 할머님은 남달리 심장약 외에 복용하신 약이 없으셨다. 소양강 상류의 빙어처럼 투명하시다. 요즘 유행해 회자되는 로얄 프로폴리스, 6년산 홍삼 관절약, 활력을 자신한 건강 기능식품은 아예 외면이셨다.
내 육신은 굳어가고 있지만 작가와의 교감으로 영혼은 하늘을 난다라고 입버릇처럼 속삭이며 문학에 늦깎이 소녀처럼 선호하던 春川 할머니의 빈자리는 너무 크다. 죽을 때까지 사춘기로 사신다며 젊고 건강하다고 연부역강(年富力强)이란 단어를 팻말처럼 앞세워 힘을 주시던 그 분은 진정 스러져가는 내 인생 하반기에 하늘이 보낸 천사가 틀림없다.
혈 팬이기도 한春川 할머님은 떠났다.
꽃 한 송이 놓고 신선이 된 그분께 허리 굽혀 인사 한번 못한 죄책감들이 몰려온다. 사모님께서 들려주신 미국 따님의 말이 떠오른다.
-할머님께서 숨을 거두시고 한 줌의 재로 C 공원묘지에 모셨는데, 오죽하면 할머님이 좋아하시던 德田선생님 작품을 코팅해서 비문 옆에 새겨 거치하고 미국으로 가셨대나봐요.
-???
-네 요즘 광고가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돌에 코팅해 천년만년 비석 옆에 세웠대나봐요.
혼잣말처럼 코팅 이야기가 페부를 찌른다. 살아오면서 과연 누구에게 진정한 사랑을 빗물처럼 받았던가? 그저 인사 치레로 지났던 春川 할머니에 대한 태도-. 강렬하게 내뿜는 春川 할머님의 눈길과 한 구절 한 구절 어렵게 이어 가시며 암송하시던 열정이 세월의 늙음도 감히 넘보지 못하셨으리라. 즐겨 쓰시던 연부역강은 또 무엇일까? 천명이시리라,
그럴 때마다 월리엄 텔의 화살처럼 가난한 지방 무명 글쟁이 가슴을 꿰뚫은 장본인이 틀림 없다. 어설픈 글 한 자락이 진정한 사랑을 받아 값지다. 저녁이면 春川 할머님은 하늘 어딘가에 별이 되어 오늘도 나를 응시하시리라. 더 좋은 시화를 보내면 문학소녀처럼 암송하겠다고 샛별같이 두 눈을 반짝이시리라. 작가와 독자의 사랑 이야기-. 허기진 모습으로 글 한 줄 끼적이던 시골 무명 글쟁이의 명의(名醫)는 진정 春川 할머님이 분명하다. 수필가의 사랑 이야기가 가을장마로 비바람에 전신을 감싼다. (103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