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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중국문자의 형성시기
최초의 중국문자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산동 거현의 능양하 대문구문화 말기 유적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대는 약 기원전 2500 - 2000년의 도기 위에 새겨진 부호이다. 그것은 (아침 단) 자의 초기 자 형으로 구름이 감돌고 있는 산 위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산간에 살고있는 단족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조자법에서 볼 때 이는 이미 원시적인 상형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며 응당 제2류의 회의자 또는가장 진보된 형태인 제3류의 형성자이다. 이 대문구 도문은 한자의 꼴을 갖추고 있는 갑골문의 선구가 된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기원전 2000년 전에 중국은 모종의 계통을 지닌 문자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중국문자의 기원문제는 여전히 더욱 많은 자료의 출토를 기다릴 일이지만 상나라 후기의 갑골문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성숙된 문자체계를 갖추고 있다.
II. 서사 공구와 서사 재료
중국 문자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글을 쓰는 방향이 위에서 아래이며 좌에서 우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 것은 모두 서사 공구, 즉 모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붓 필)자의 초기 형태는 (오직 율) 자이다. 갑골문의 율자는 한 손으로 붓의 필관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필관은 대남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뒤에 와 율위에 (대나무 죽)이란 의부를 더하여 필자가 되었다. 갑골문의 서자는 손에 잡은 붓이 먹물병 위에 있는 모양이며, 점은 먹물을 묻혀야 글씨를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상대에는 보편적으로 붓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기원전 4000여년의 반파유적지의 도기 위에 그려진 채색 그림에 서도 붓을 사용한 흔적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상나라 사람들이 글자를 썼던 중요한 재료는 죽간이다. 대나무를 길게 쪼개어 생긴 평탄한 표면에 글씨를 썼으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는 종서가 횡서 보다 편했으며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왼손으로 댓조각을 잡아야 했으므로 글씨를 다 쓰고 난 뒤에 는 우에서 좌로 하나하나 배열하는게 쉬웠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써나가는 중국 특유의 서사습관이 되었다.
III. 서체의 변천
서는 문자를 소재로 하는 조형적인 선의 미술이며, 작자의 미의식가 그 생명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 주로 수필을 사용해 왔는데 모필만큼 치묘한 작용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 서의 소재인 한자의 발 생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4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회화문자 즉 상형에 발단하여 처음에는 부호시 대에 사물의 기억, 기술등 오로지 필요한 일을 충족할 따름이었으나, 시대의 추이에 의해 문화의 진전 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 왔다. 그간 많은 통달한 사람들이 미적표현을 하게되자 감상의 대상이 되어 동양예술의 정수라 일컬을 만큼 승화하였다.
전 서
사 주는 갑골문, 금문 등을 간소화하여 대전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서적은 석고문이다. 그 모양은 북과 비슷하며 글씨가 크고 잘 정돈되었다. 그 후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이사에게 소전을 만들게 하였다. 대표적인 글씨로 태산각석이 있다.
예 서
한 나라때 완성된 예서는 글자의 모양과 필법에서 전서와 다른점이 많다. 예서가 만들어진 까닭은 전서의 결구가 복잡하여 실용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초기의 예서는 직선에 가까운 소박한 획이었으나 파책이 생기는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서적으로 조전비, 예기비, 사신비등이 있다.
해.행.초서
중국의 삼국 시대와 육조 시대는 해서, 행서, 초서가 완성된 시기이다. 초서는 예서의 점, 획을 단순화하여 빨리 쓸 수 있게 만들었고, 해서는 예서의 파책을 억제하여 자형을 방정하게 나타내었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과 안진경의 가묘비는 해서의 대표적인 서 적이다. 초서를 읽기 쉽고, 해서를 빠르게 쓸 수 있도록 절충하여 만든 서체가 행서이며 동진 시대의 왕희지, 왕헌지 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 갑골문 , 금문 , 석고문 , 대전과 소전, 전서의 특징
가. 갑골문
갑골문은 선조에 대한 제사와 농작물의 풍흉, 폭우, 오랑캐의 정벌, 10일 마다의 재앙, 꿈의 뒷탈 등에 대하여 점을 친 내용을 담고 있다. 상왕국의 통치 질서는 신정적 결합과 혈연적 조직이 복합되어 있었다. 신정적 결합은 연맹 관계에 있던 각 부족을 대표한 정인들로 구성된 정인 기구를 통하여 신의 뜻을 파악하고 정사에 반영하는 점복 행사와 각 부족의 수호신을 상왕실의 주관아래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혈연적 조직은 상왕의 왕자들을 비롯한 상왕실의 근친을 특정한 지역에 파견하여 다스리도록 하는 소위 분봉 및 상왕실이 다른 부족과 결혼을 통해 유대를 강화하는 통혼관계가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통치조직을 가지고 있던 상왕은 점복을 통하여 파악한 신의 뜻을 지상의 질서에 반영하는 대리자로서 신권통치가 가능하였다. 문자의 결합이나 구성 등으로 보아 아직도 원시성을 보여주는 면도 있지만 회화문자의 단계는 이미 벗어난 것으로 설문의 육서에 의하여 분류하면 확실히 상형과 지사의 비율이 높지만 이미 회의와 형성자도 상당한 양을 점하고 있다. 가차(임시로 빌림)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진화가 이루어진 문자라고 할 수 있다. 문구는 매우 간단하고 질박하여 어느 정도 원시성을 보여주지만 문장의 결구와 품사등을 통하여 볼 때 오늘날의 중국어의 기본형식을 이미 갖추고 있다. 갑골문은 1899년 청말의 앙의영에 의하여 최초로 그 존재가 인식되어 20세기 초반 안양의 발굴에 의하여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은허는 상의 7번째이자 마지막 도읍으로 기록된 곳으로 갑골문은 이 시기, 즉 상말(기원전 15 -12세기)의 유물로 본다.
(1) 갑골문의 서풍변화
갑골문을 5기로 나눈 동작빈은 그 분류기준의 하나로 서풍의 차이를 들고 있다.
제 1기의 서풍은 다양 한데 주로 웅혼하며 힘이 있다.
제 2기는 근칙하며 일반적으로 문자의 외형은 단장, 대소가 조화되고 행간도 균등하고 정돈되어 조밀도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제 3기는 퇴미(점차로 쇠퇴함)라고 평한 것이 주다.
제 4기는 경초하여 문자는 험하게 우뚝 서고 또 호방한 곳이 있다 .제 5기는 엄정하며 규칙 이 있어 변별이 쉽다. 갑골문 서풍 변천의 흐름은 처음에는 규모가 크고 위엄이 있는 것이 있고 다음에 는 기술이 발전하여 잘 다듬어진 것이 나타나고 이어서 퇴폐적인 것이 출현한다. 그 다음에는 복고조가 나타나며 최후에는 잘 다듬어지고 있으나 규모가 작고 약한 것이 된다. 상대의 금문과 갑골문의 서체를 비교해 볼 때 결각한 것(갑골문)과 주조한 것(금문)의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는 서풍에 있는 것이며 문자의 구조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상대 금문의 서체는 갑골문
제 5기의 서체에 가까운 것이 많다.
(2) 재례각사
제을 또는 제신 시대 사슴뿔에 새긴 각사로 제 5기 갑골문이다. 한면에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다 른 한면에는 2행 28자가 새겨져 있다. 상왕이 사냥하면서 신하 재풍에게 상을 내린 일을 기록하고 있어 재풍각사라 한다. 이것은 서예에 심오한 조예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3천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작품이다.
나. 금문
학자들이 한 대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삼대(중국 고대 3왕조)의 것으로 간주되었던 많은 청동제의 제사용 그릇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경의 북송왕조 때부터였다. 최근세기 동안에 이들 청동기는 미술사가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중요한 연구의 초점이 되면서 일본과 서구의 박물관 수집품 사이에 모습을 나타냈다. 현존하는 상과 주의 청동기 가운데 아주 일부에만 있는 명문은 제품 전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음각으로 주조되었다. 가장 짧은 명문은 하나의 문자로만 되어있으며 가장 긴 것으로 알려진 서주의 명문은 497개의 문자에 달하는 명문이다. 모든 명문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부호와 설명이다. 부호(기호, 도상기호)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그 청동기를 사용했거나 그 청동기가 바쳐진 대상의 조상 집단이나 개인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상기호 부갑으로 구성된 것은 도상기호로 표시되는 성족에 속하는 아버지 (갑)헝로 해석된다. 대부 분의 도상기호는 주보다는 상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선조의 기호를 사용한 것은 상말기의 제도로 간주되어 왔다. 설명문을 싣고 있는 명문에서도 시호까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들은 대게 그 그릇으로 주조하게 되었던 상황에 관한 설명이다. 상의 것으로 간주되는 청동기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설명 문이 있는데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금문은, 서주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50 개 문자 정도의 비교적 짧은 문장이다.
(1) 금문의 서풍 변화
서주 시대의 청동기는 시기에 따라 그릇의 종류, 형태, 문양 등에 변화를 보이는데 명문,즉 금문의 서체, 서풍, 내용 등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상 말기로부터 서주 전기의 강왕까지 의 것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유동감이 있는 선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문자의 크기는 가지런하지 않으나 생기가 넘치고 있다. 중기에 이르면 전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긴장된 선으로 문자의 크기도 균일하게 쓰여졌고 상하좌우의 간격도 가지런하다. 전기의 것과 같은 생기는 없으나 아직은 운필에 따라 다소의 유동 감이 남아 있다. 후기에 이르면 펜글씨와 같이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필력을 잃고 있으며 특히 말기에 이르면 문자나 서풍이 어지러워진다. 전체적으로 생기도 없고 아름다움도 상실된다.
(2) 작품 소개
금문을 또한 종정문 이라고도 하는데 서풍의 시대적이 특징으로 삼을만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주장반의 명문은 처녀처럼 조용한 특색이 사람들에게 조용하고 온순 편안한 느낌을 준다. 모공 명문은 주장반과는 또 다르다. 자형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곡선은 미끈하여 마치 봄빛에 나부끼는 화려한 꽃가지와도 같다. 산씨반 명문은 몸단장을 대충하고 화장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동시에 거친 야성이 보인다. 이자백반 명문은 맑고 깨끗한데 점차 말쑥하게 분장하여 대가집 규수처럼 기색은 맑고 신선하며 행동은 적당히 조신하다. 대맹은 주 강앙 때의 그릇이며 명문은 주 금문서예 중에서 걸출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주 목왕 때의 제기로 명문의 서법은 한적하며 소박하고 자연 스러워 힘들여 새기
지 않은 격조를 지니고 있어 서주 금문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 석고문과 봉산각석
석고문은 현존하는 최초의 각석문자로 모두 10 개의 석고(북모양의 돌)에 차례대로 10단락이 한 조가 되는 사언시를 새긴 것인데 그 중심 내용은 임금이 사냥한 일을 기술한 것이다. 당 초에 발견되었으며 흔적은 이미 절반 이상이 훼손되고 없으며 제 9단은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가장 훌륭한 탁본으로 북송 때의 것이 있다. 운필, 구성, 장법, 격조는 물론 글자의 구체적인 모양이 모두 위 로는 괵계자백반의 명문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태산각석과 상통하고 있다. 즉 주대의 금문과 진대의 소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서예역사에 있어 크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으며 청대 전서로 유명한 서예가 오창석,곽석여,오대징 등ㅇㄴ 석고문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겠다.(진전은 진대의 전서 다시말
해서 소전이고 청전은 청대 오창석 등의 전서를 말한다.)태산각석은 시황제 28년( 기원전 219년) 동으로 순수할 시 태산에 올랐다가 승상 이기등이 진시황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165자가 실려있 다. 소전은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 이사에게 대전을 근거로 하여 통일되지 못했던 문자를 정리하고 수정하여 획의 순서를 정하고, 행을 나누는 표준자체를 만들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사의 서체 흔적으 로는 봉산각석 등이 있다.
D.대전과 소전
소전이 만들어 지기 이전의 문자이며 중국의 넓은 땅 만큼이나 문자 또한 지방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 했는데 이것이 대전이다. 소전은 진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여러 가지 문자를 한가지로
통일하기 위해 재상인 이기에게 명령하여 만들어진 문자이다.
E.전서의 특징
전서는 각국이 문자를 달리하고 있는 혼란시대에 나타났다. 시황은 제상인 이기에게 명하여 종래의 문자를 정리하여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이체문자는 폐지하였다. 한의 전서는 남아 있는 것이 적으며 후한의 허신의 작 설문해자 15편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자전의 사조라 말할 수 있다. 전서는 장식성 이 풍부하고 아름다워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전서의 자형은 선의 굵기가 비슷하고 시작되는 부분과 끝 부분이 둥그스름 하며, 특히 소전은 자측과 우측이 대칭을 이루는 것이 많고 대체적으로 세로를 길 게 쓰며 정중하고 경건한 문자이다.
**예서 : 예서의 특징 , 팔분서
A.예서의 특징
예서는 주대에 제정되었으나 실용서체에는 적합하지 않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막이란 자가 각고십 년, 옥중에서 만들었다고 한다.전서가 색세이며 장방형인 것을 방세로 바꾸어 옆을 넓게 하고 획을 생 략하였기 때문에 훨씬 쓰기 쉽게 되었다. 주로 잔역에 종사하는 자가 사용하였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 다.예서는 또한 전서의 보조체로서 탄생딘 것이지만 진이 멸망하고 한이 되자 시대의 정체로서 표면 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서는 소전 이후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서체이며 시대적으로 수많은 예서가 쓰여 왔는데 전서보다 쓰기가 편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히, 진나라때 한 사람이 시황제에 게 죄를 지어 감옥에 있으면서 만들어낸 서체라 하여 진예라고 하는 명칭도 있다.예서의 자형은 팔자 모양으로 양쪽이 균제하여 안정감이 있으며 획의 질이 상당히 부드러우며 같은 방향의 획간은 거의 평행 균등하고 명쾌하다.
B.팔분서
예서 가운데의 한 서체이며 글씨 모양이 양쪽으로 팔자 모양으로 쓰여 이쓴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서 : 해서의 변천사
A. 해서의 변천사(위진의 서 , 남조의 해서 , 북조의 해서)해서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접하고 있는 글씨체이다. 해서의 (해) 자는 (본뜨다. 본보다.)와 같 은 의미를 가진 문자로서, 해서라고 하면 가장 규범이 되고 표준이 되는 글씨라는 뜻에서 진서, 혹은 정서라고 불린워진다. 일반적으로 해서는 한말에 시작디어 위진남북조 시대에 성행하였으며 당 나라 때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여 서법을 완전히 정착시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발달되 어 현재에 사용되고 있는 해서를 해서의 양대 산맥으로 분류되는 육조해와 당해를 중심으로 꼭 필요 하다고 생각되는 서가와 유적을 기술해 보았다.
1.해서의 출현과정과 한왕조
중국 역사상 문자가 서로써 가장 찬란하게 꽃피었던 시대는 한 대로써 진왕조로부터 삼국 시대로 옮겨가는 약 400년간 게속된 왕조이다. 이 시기는 정치 .문화의 발달은 물론이고 서예사에서 보아도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문자를 정리 분석한 (설문해자)가 완성되었고 , 종이 의 제조법도 이때에 확립되었다. 이 시대에는 서사 도구 즉, 붓이나 죽, 목간, 종이 등이 발달하였고 따라서 글씨는 실생활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글씨가 실용화 되면서 비문등의 글씨와는 다른 빠르고 단순한 형태의 글씨를 요구하게 되었는데 예서와 결합하여 행서가 생겨났는데 이 모든 서체들이 복합적으로 정리 발전되면서 해서가 출현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서의 기반위에서 초서,행서,해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 대야 말로 모든 서체가 다 나타난 시기로써 서예사에서 가장 지대한 공헌을 남긴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위진남북조 시대의 해서
한 대의 장초를 이어받아 행서와 초서가 발전되었으며 해서가 정착된 시대로서 북조에는 석비가 주류 를 이루었고 남조에는 첩서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북비, 남첩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 다.
가.위.진의 서
위(A.D.220 - 265)에서 서진(A.D.265 - 316)까지의 시대로 해서의 형태가 채 정리되지 못하고 예서 의 자취가 남아있던 시기인데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좋은 문서에는 행압서가 사용되었고 한편으로는 한의 장초에서 비롯된 초서가 발달된 때였다. 또 이 시대는 위엣 금비령을 내렸고, 서진때에도 역시 무제의 금비령 때문에 전하는 묵적이 극히 적다. 그러나 이때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해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종요이다. 종요 외에도 이 당시에 많은 서가들이 있으나 전하는 묵적 으로는 종요의 것 외에는 거의 없다.
1)종요의 서(A.D.151 - 230)
종요의 자는 원상,위나라 장시사람.벼슬이 상국에 이르렀고 그의 유적은 모두 해서인데 현존하는 것 들은 위작으로 보인다.
2)해서의 발전과정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찬보자비등이 있으며, 또 서진 이후 130여년간 계속 된 5호 16국 시대에도 광무장군비가 있는데 예서의 필의이나 해서에 가깝다.
3)위.서진의 서풍
삼국에서 서진 5호 16국에 이르는 이 시대는 중국 서예가 쇠퇴해가는 시대였으나 행초서는 발전하여 훗날 왕희지의 서에 영향을 주었다.
나.남조의 해서
영가의 난에(316) 의해 밀려난 진왕실의 일족이 강남지방의 통치에 힘쓰다 318 년에 제위에 올라 진 강(남경)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것이 동진이다. 이 왕조는 문벌귀족들에 의해지지되었으며, 그중에서 도 특히 명문으로 불 리는 가문이 왕씨였다. 이때의 서가들은 위진의 서풍을 계승하게 되었으나, 진 무 제의 금비령이 풀리지 않았던 때여서 서가들이 비단이나 종이에 글씨를 썼기 때문에 행초가 발달하였 다. 이때에 서성으로 존경받는 왕희지가 출현하여 중국서도사에 빛나는 장을 열었다.그 후 앙희지가 나왔다.
1)왕희지의 서
동진의 서법은 왕희지 부자에 의해 집대성되었으며, 그 경지는 오늘날까지 아무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왕희지의 생졸년대는 두 가지 설이 있다. (303 -361, 321 -369)귀족출신으로 우군장군이란 벼슬 에 재직했기에 왕석군이라 불리웠으며, 궁직을 떠난 뒤에는 산은에 살았다.어려서 위부인에게 글씨를 배우기 시작하여 초서는 장지를 정서(해서) 는 종요를 배웠으며, 또한 여러 종류의 글씨를 구하여 그 장점만을 취하여 연마.정진하였다.전설에 의하면 팔분,해, 행, 초, 비백등 각체의 서에 능하였으며, 특 히 예서, 지금의해서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그의 묵적은 모두 해.행.초 삼체에 한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처럼 뛰어난 왕석군의 서가가 하나도 없고 세전하는 묵적은 모두 탑모본 이나 , 임모본으로서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2)왕헌지의 서
헌지의 자는 자경,왕희지의 일곱째 아들로 벼슬이 중서령에 이르렀고 부친 서의 기초위에 자기 나름 대로의 풍격을 이루어 세칭 이왕이라고 불린다. 전하는 해서 유적으로는 락신부 13행이 있다. 이것은 락수의 여신에 대한 것을 부한 유명한 문장인데 불과 13행밖에 남아 있지 않다.
3)지영의 서
생졸 연대는 미상이며, 진 왕조때 태어나 수대 사이에 있었던 승으로 왕희지의 7세 손으로 전하며 이 름은 법극이다. 왕희지의 서법을 이어 받아 점차 서법의 규범으로 존중받게 되었다.초서와 해서를 잘 썼으며, 손과정의 서보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4)남조의 서풍
남조는 위진 이후 반영하던 문벌귀족의 황금시대였다.정치,경제,문화등 기타 모든 것이 귀족들의 손 에 의해 장악되었다. 남조 4개 왕조의 수도가 공히 건강이었으며 특히 양대의 건강의 인구는 백수십만 에 도달하였다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와 같은 남조의 귀족문화는 이왕의 서와 잘 조화되었 고, 따라서 이러한 이왕의 글씨는 남조의 서풍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남 조시대는 북조와 달리 금비령 때문에 비서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송의 찬룡안비 등이 있을 뿐이다.
다.북조의 해서
서기 317년에 화북의 중원을 버리고 떠난 진왕조 이후 화북 땅에서는 소위 5호 16국의 단명한 왕조가 항쟁을 계속하다,선비족이 세운 위왕조에 의해 화북의 통일이 이루어졌다.(439 세조) 우리가 일반적 으로 알고 있는 육조체라고 부르는 서가 바로 이 북위의 서를 일컫는 말로서 북비라고 한다. 이때에는 금비령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비문이 남아 있는데 북비 특유의 서체가 형성 발전되었고 남조의 서풍과는 또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비각 이외에도 조상기등의 글씨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 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비
비에 대하여 말할 때는 반드시 북위시대를 말하게 되는데 서의 형으로나 내용면 모두 충실하게 포함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해서 비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ㄱ)장맹룡비
522년에세워진 것이다. 전문 26행에 매행 46자로 청대에 이르러 비학의 발달과 함께 더욱 추중되었다 운필은 근엄하고, 결구는 평정속에 곡함이 있다.
ㄴ)고정비
서기 523년에 새겨진 것으로 청대 건륭제 때 산동의 덕현에서 출토되었다. 모든 서는 전성기가 되면, 어떠한 형태로든 규범이 정해지게 되는데 이 비의 점과 획의 배치가 모두 그러한 규범에 맞게 되어 있다. 비문은 24행에 매행 46자인데, 북비의 방정미를 갖추고 있어 장맹룡비와 더불어 북비의 걸작을 꼽힌다.
ㄷ)경사군비(540년)
이 비석이 주는 느낌은 남조의 서풍이다. 파법을 멀리 뻗치지 않으면서, 짧게 힘주어 썼다.
오른쪽 어깨등도 일부러 각을 주지 않고, 여유있게 붓을 이동시키고 있다.
2)묘지명
사자를 장사지낼 때 방형의 돌에 사자의 이력과 성명을 각입하여 묘혈안에 매장한 것인데 대략 서진 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은 북조 특히 위왕조 때로서, 낙양을 비롯하 여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근일에도 가끔 발견되고 있다. 땅속에 묻혔고 또한 뚜껑을 씌운 것이 많 아 출토되었을 때 비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3)북조의 서풍
북조의 서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몇차례의 변화 조정을 볼 수 있다.첫째로 위의 효문제가 낙양으 로 천도하기 전 옛 서진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유적으로는 에서도 해서도 아닌 서체를 형성했다.이 는 운남성남령의 찬보자비의 서풍과 유사하다.이때 남조에서는 송의 효무제의 이건 3년에 해당되는 데 이미 동진의 왕희지.헌지에 의해 이루어진 새로운 양식의 서가 유행하던 때였다. 둘째 효문제 출현 으로 낙양천도와 함께 이루어진 한화 정책으로 낙양의 옛문화와 새로이 수입된 남조의 수도인 건강의 문화가 충분히 융하되지 못한 채 탁발족 정신의 바탕위에 종합된 문화가 출현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용문 조상기이다. 조상기는 남조의 신서풍인 해서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이들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그러나 위왕조 말기가 되면서 남조의 신양식과 옛부터 있어온 구양식을 교묘하게 조하시켜 비교적 훌륭한 서를 만들어낸 것이 장맹룡비 등이다.효문제 사후 한화정책은 현저히 후퇴하였으나 위왕조가 동서로 분할되면서 부터 제 앙조 이후 남조의 신양식인 이앙의 서가 점차 북조로 옮겨 왔다 동위의 서는 남조의 지영보다 빠른 시대지만 이왕의 영향을 받은 서롯 마치 지영의 서를 보는 듯 하다. 결론적으로 남방이나 북방 모두 동일한 서풍의 서가 생기게 되는데 이는 문화의 중심에서 발달한 서 와 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자연발달적인 서의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 에는 그 도읍의 서풍이 차차 사방으로 전파되어 초당에 이르러 결국 통일되고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 다.
**행서 : 행서의 특징
초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닌 중간정도의 것이 행서인데 걸어가는데 비유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희지 (동진때의 사람) 의 난정서가 행서의 대표격 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행서는 전한말에 기존의 다른 서체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 자연히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행서는 약동 감이 풍부하며 정신유로에 적합하며 읽기 쉽고 친숙하므로 실용상으로나 예술상으로 널리 쓰여직 있다.
A.행서의 특징
글씨 자체가 걸어가는 것에 비유된 만큼 중심선이 이동하거나 경사지면서 균형을 이루고, 중심을 이 동시키며 글자가 휘어진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큰 글씨가 있 는가 하면 작은 글씨가 있고 조밀의 변화가 많으며 해서 같이 줄이 똑바르지 않으면서도 별로 비뚤어 진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데에 행서의 멋이 있는 것이다.
**초서 : 초서의 특징, 초서의 종류
알기 어렵게 휘갈겨서 쓰여진 서체가 초서인데, 비유하면 뛰어가는 형세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자가 만 들어진 것은 전서에서 비롯 된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 되었다.
A.초서의 특징
여러자를 한 줄로 꿰어놓은 듯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것을 들 수 있겠으나 최초의 초서가 생길 적에는 전서나 해서 보다도 쓰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하며 한나라 이전에는 거의 모든 초서가 한자씩 떨어 져 있었다. 요즈음 같이 이어서 쓰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 이어쓰니 시간 도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지만 전서에서 초서로 그 모양을 개발해 왔으니 처음 쓰여질 때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서체의 아름다움이 느껴진 것은 우선 균일하지 않고, 대소, 태세, 장단의 조 화 가 변화 무쌍한 데서 일 것이고, 직선과 곡선의 조형 또한 아름다움의 핵이라 할 수 있다.
B.초서의 종류
서보 : 당대의 손과정이 쓴 것으로 붓글씨를 쓰는데 대하여 적은 서법 이론이다.초서를 배우는데 교본 용으로는 가장 적당하며 이론도 명쾌하게 밝혀져 있으나 글씨는 더욱 명쾌하게 쓰여진 것이 자랑할 만한 서체이다.
광초 : 당대 장욱의 글씨가 대표적인 광초이다. 이는 너무가 휘갈겨 쓴 것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 전 서 (篆 書)
1) 석 고 문 (石 鼓 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세겨져 있다하여 석고 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 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 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
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2) 태 산 각 석 (泰 山 刻 石)
태산각석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동방의 군현을 순회하면서 세운 송덕비의 하나로 낭아대각석과 더불어 소전의 표준 이라 불릴 만큼 유명하다. 이 각석을 탁본해 본 결과 2백 23자의 전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명시대의 탁본에는 29자만 남아 있었 고, 청조때는 화재로 파손되어 그 패석에 겨우 10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3) 낭 아 대 각 석 (瑯 牙 臺 刻 石)
진시황제는 태산각석을 세운 해에 산동의 낭아에 올라가 제대를 쌓고 돌에 각하여 진의 덕을 기리었다. 이 각석의 글자는 뭉개지고 떨어져나가 겨우 탁본으로 10행 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이사의 서(書)로 전해지며, 태산각석이 정제된데 비해 용필이 좀 부드럽고 좌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현의 장중감을 준다.
2. 예 서 (隸 書)
1) 을 영 비 ( 乙 瑛 碑 )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 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2) 예 기 비(禮 器 碑)
예기비가 새겨진 것은 약 1800여 년전 후한의 환제 영수(永壽) 2년의 일이며, 한래비 라고도 부른다. 이 비문의 내용은 노나 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을 면해 주는 등,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산뚱성 취무에 있던 허물어진 공 자묘(이곳은 한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 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즉 예기 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고,묘 주변의 배수 사업 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이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느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운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수도 많아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다. 그리고 예기비의 선조(線條)에 관하여서는 유(여윔),경(단단함),청(맑음),정(곧음)이 언급되 어진다. 즉,예기비는 선조가 여위어 신정(神情)이 넘치며 단단해서 골격이 튼튼하고 맑아서 모습이 명랑하며 곧아서 태도가 준 수하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예기비에 대한 감상은 필획의 선조를 통해 그 신정과 골격,모양,자태를 터득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3) 사 신 비 (史 晨 碑)
이 비는 후한의 영제 시대에 노나라의 승상이 된 사신이 공자묘에 성대히 제사를 치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 재 산동성 곡부{공자묘의 비림(碑林)}에 있다. 이 비는 전후 양면으로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을 사신전비,후면을 사신 후비라 칭한다. 사신전비의 내용은 대개 사신이 공자의 고향에서 노나라 승상의 직에 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아울러 상 서(尙書)에게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여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사신후비의 내용은 사신이공자에게 제사 올릴 때의 성대한 정황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고박하고 후실(厚實)하며,팔분예의 전형적인 것의 하나이다. 글자체는 3: 2내지 4:3정도의 세로 구성이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있
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를 배우는 입문으로 적당하다.
4) 서 협 송 ( 西 狹 頌 )
서협송은 마애각으로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형,사각형의 결 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미 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다. 장천비에서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서성 성현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크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시 오단크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글의 끝에 구정(仇靖)이란 글쓴이의 서명이 있다. 한비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서명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풍은 중앙 도시의 전형을 약간 벗어났지만 의지적인 늠름한 붓놀림은 모든 한비 가 운데 단연 돋보인다.
5) 조 전 비( 曺 全 碑 )
조전비는 흙속에 매몰되어 오다가 명나라때 섬서성 부양현의 옛 성터에서 발굴되었다. 그전에 이 비는 한비의 하나에 불과하 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으나, 20C 영국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한인들의 진적(眞蹟)을 발견함으로써,조전의 우려한 서풍이 한말의 퇴폐한 풍조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과 이 비의 자형이나 필화의 모양새는 예법이 완성된 극치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 다. 이 비의 서법은 300년간의 정칙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진적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면할 길이 없다. 또 하나 조전 비의 단정한 모습에서 결체나 용필의 비밀을 엿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단장하면서도 아리땁고 중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풍 모와 중심 밀집과 좌우서전(左右舒展)의 결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비는 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비의 치보(致寶)라 일컬어 지고 있다. 조전비의 내용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상황증거를 추리하건대 부양현 장관이던 조전의 희망에 따라 그의 창덕비가 세워지기로 되어 며칠후면 입비식까지 갖게 될 무렵 돌연 조전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한 금액까지 명기되어 있는데,바로 그들이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증거품이 될 비를 땅속에 묻어 버렸을 가능성이 짙다. 이 비를 세운 날짜는 중평 2년 10월이고 사서에 의하면 그해 9월 삼공,즉 최고 권력자중의 한 사람인 사공 양사가 죽었다. 동시에 그 참모격이던 간의 대부 류도는 갑자기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되었다. 조전도 그 일당에 속해 있었던 것같다. 조전의 동생 영창 태수 조란도 당쟁때문에 죽고 조전도 그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7년간이나 숨어 지내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6) 장 천 비 ( 張 遷 碑 )
낙음현의 현령이었던 장천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본문에는 가차자(假借字)나 오자가 더러 있어서 후세의 모각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서풍은 후세에 따르기 힘든 미를 지니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후한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비는 용필이 방모(方模)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다. 소박하 고 힘찬 점획,완강한 네모꼴의 구성,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충분히 뻗은 점획,자유롭고 메이지 않 은 결체에 그 참맛이 있다. 필획의 기필과 수필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전절(轉折)이 항상 직각을 이루어, 장천비가 한예중 방필 웅강(方筆雄强)의 전형으로도 일컬어진다. 또,후한말에 나타난 이 비는 이미 해서의 형태에 매우 근접한 서체를 보이고 있어서 , 그 시기에 해서의 원형이 태동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 본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유래와 사자 구(四字句)로 된 명문이 있다.
3. 해 서 ( 楷 書 )
1) 장 맹 룡 비 ( 張 孟 龍 碑 )
육조 시대의 대표적인 해서이다. 서도에서의 힘은 적절한 조화가 따라야 한다. 결구법이 바로 그것인데, 장비액(張碑額)은 그런 것의 본보기라 하겠다. 본문도 점획의 배치에 따라 소박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지적으로 당대(唐代)의 서와 같은 정제미 를 나타내고 있다. 경중의 배합,각도의 변화, 그리고 글자의 흐름에 따라 그것들을 조절하는 의욕적인 필력, 이러한 모든 요소 가 큰 비석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흔적들을 표면에 나타나지 않게 할 것, 여기에 서도의 비결이 있다. 북위서 가 유행하던 때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龍門)의 강함과 예리함,정도소(鄭道昭)의 온화함, 고정비의 완성된 계획성 등이 함축되어 있는 훌륭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비면은 해서로 26행,한 행에 24자씩 새겨져 있고, 비음은
이 비를 세움에 있 어서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의 관위 성명을 연서한 것이 10여단 있다. 이 비의 비액에서 '청송(淸頌:덕을 칭송한다)'으로 표현 되는 바와 같이 송덕비이다. 장맹룡은 당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깊이 믿는 유교를 선양하였다. 그 공적이 컸기 때문에 향당(鄕黨)들이 이에 감탄하여서 장맹룡의 덕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고, 그의 일대기에 관한 것과 칭송이 그 내용이다.
2) 고 정 비 ( 高 貞 碑 )
당의 구양순과 더불어 이지파(理智派)의 대표격으로 이 비석을 꼽을 수 있다. 이렇듯 고정비는 구양순의 비와 쌍벽을 이룰 만한 해서의 비문이다. 이 비문의 작자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 출토 시기도 얼마되지 않아서,이 서체에 관해 논의하는 사 람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비를 수록한 책도 그리 많지 않다. 한 책에 의하면 고정이라는 사람은 비서랑의 벼슬을 지냈고 나이 26세에 죽었다고 한다. 이 비는 그가 죽은 지 9년이 지나고서 세워졌다고 한다. 이 비에서 그려지고 있는 고정이 명족 (名族)이었고 게다가 외척(外戚)이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비를 쓴 사람은 당시 제일의 명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비는 구양순의 비와 마찬가지로 필의 기수(起收)가 매우 자연스럽고 형태의 조합이 합리적이어서 비난할 여지가 없는 구조를 이 루고 있다. 더불어 전서의 균형감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어서 회화적인 미가 뛰어나다.
3) 구 성 궁 예 천 명 ( 九 成 宮 醴 天 銘 )
이 비는 당태종 6년(632)에 당태종이 수나라의 인수궁을 수리하면서 만든 구성궁에 샘물이 뿜어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여 만 든 비이다. 문장은 위징이 쓰고 글씨는 황제의 명에 따라 구양순이 특별히 정성들여 썼다. 이는 구양순의 나이 75세의 서(書 )로 구양순이 왕희지의 필법을 배웠으나, 이미 글씨는 구양순 자신의 자체였다. 해서의 필법이 극에 달했다고 평가된다. 전 각은 양문으로 되어 있고 구성궁예천명의 여섯 글자가 2행에 있고, 본문은 24행으로 되어 있다. 남북서풍을 융합한 수대의 서 풍을 전,예서에 바탕을 둔 구성법으로 방향을 바꾸어 장방형의 형태로 씌어져 있다. 내핍법(內逼法) 혹은 배세(背勢)에 따르고 있으므로 점,획이 중심에 모여 있으나, 비의 결체는 여유가 있고 전절(轉折)과 구부러진 곳의 용필은 아주 훌륭하다. 새 시대 감각을 불어 넣은 것으로 화도사비(化度寺碑)와 더불어 구양순의 대표작이다. 해서를 쓰는데 있어서 정통이라 할 수 있으나, 너무도 정제된 필획의 구성을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형태만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4) 안 근 례 비 ( 顔 勤 禮 碑 )
안씨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의 2대 역작중의 하나이다. 비가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비문 중에 기재된 사실을 감안해 입비(立碑)는 안진경의 말기의 글씨로 추정되어 진다. 비는 사면각이나 세째 면은 갈아 없어졌고, 약 1천 6백 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히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중에서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안진경의 필법은 구양순의 경우와 다른 바 없으나 구 법(歐法)보다도 약간 붓을 세우며, 안서(顔書)의 가로획은 우상향세(右上向勢:손에 쥔 붓을 그대로 댄 후 일단 조금 띄웠다 오른 쪽으로 그음)의 수법을 사용한다. 구(歐)의 배세(背勢), 안(顔)의 향세(向勢)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인 조형수법은 해서 기법의 양극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의 내용은 안진경이 그의 조부인 안근례의 일대기를 써 놓은 것이다.
4. 행 서 ( 行 書 )
1) 난 정 서 ( 蘭 亭 序 )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 니고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 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 집 자 성 교 서 ( 集 字 聖 敎 序 )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끝에 집대성한 것이다.{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변이나 방 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 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 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 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 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 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와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 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뚤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 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 이라 구분해 부른다.
서체의 종류(무한탐구 2판)
1. 전서(篆書)
중국 전설에 의하면 삼황오제(三皇五帝)라고 하는 왕의 시대가 지난 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하여 하(夏) 왕조를 열었다. 그 뒤 은(殷)왕조, 주(周)왕조가 뒤를 이었다. 이 세 왕조를 일컬어 삼대(三代)라 부르며, 역사적으로 실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은( 殷)왕조 부터이다. 이 은왕조의 도시 유적이 은허이며, 갑골문자가 여기에서 출토되었다.
1)갑골문자(甲骨文字)
중국 은나라때에 점치는데 사용하였던 귀갑, 우골에 새긴 문자를 말한다. 씌여진 내용이 복.점(卜.占)에 관한 것이므로 이것을 '은허복사'라고도 한다. 여기에 쓰여진 내용은 제사, 군사, 천상, 전렵, 농경, 임금의 행행(行幸)과 안부에 관한 것이 많으며,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적 요소를 다분히 남기고 있으나 순수한 그림문자보다는 상당히 진보되어 있다. 문자의 수는 대 략 3천정도이고 그 중에 해독된 것은 약 절반이다. 갑골문자는 1899년 청나라의 금석학자인 왕의영이 뻬이징의 한 약방에서 용의 뼈라는 것에 새겨져 있는 고대문자를 발견한 것이 시초이다. 그 뒤 유악이 [철문세귀]를 펴낸 것을 주목할 만하다. 특징은 예리 한 칼나로 거북껍질이나 짐승 뼈에 새겼기 때문에 필획이 단순하며 직선적이다. 또한 소박하고 고대인다운 미적 조형감각이 구석 구석까지 작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B.C 1400 - 1100년간의 갑골문은 자형의 변천과 서풍에 의해서 다섯 시기로 구분된다. 또한 동일한 은허에서 묵서가 있는 도편이 발굴되어 이미 정량한 모필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2)고문(古文) : 금문(金文)
주대(周代)에 들어서면서 갑골의 사용이 쇠퇴하고 동기(銅器)의 제작이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금문은 점차로 기록적 사명을 확대하여 장문화되었다. 처음에는 얼마쯤 상형성을 유지하나 마침내 필화는 복잡해지고 곡선형이 많아져 좌우 대칭의 호쾌한 기 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기에는 상당한 장식성조차도 가중된다. 또한 대체로 점획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아한 풍취가 있어 후대에 내려올 수록 균정미를 갖춘 우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동주는 소위 춘추전국시대인데 시대가 바뀔수록 지방화하여 대체로 금문의 전형이 점점 붕괴, 도락하였으나 서방 진(秦)지방에서 일어난 주문은 매우 특성있는 미를 갖춘 것이며 대표적인 것이 석 고문이다.
3)대전(大篆).소전(小篆)
대전이란 서주시대의 선왕때 사관이던 주라는 사람이 문자를 정연하고 획일적으로 하기 위해 창안하였다. 서체를 결합, 정리하 기 위하여 점.획을 증익하여 혼돈하지 않게 하였다. 그것은 당시 고문을 정리한 필연적인 현상이지 인위적으로 복잡하게 만든 것 은 아니었다. 기원전 250년 진이 천하를 통일할 때쯤 되어서는 대전을 모태로 하여 소전이라는 신서체가 탄생하였다. 진시황제가 제상인 이사의 헌책에 따라 문자의 통일을 단행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대전으로는 석고문이 유명하며 소전으로는 태산각석 , 낭아대각석 등이 있다.
4)석고문(石鼓文)
중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석고라 함은 돌의 모양이 북(鼓)와 같으데서 온 이름이다. 돌의 수는 열개이고 표면에 700여자 가 실려있다. 그러나 지금은 272자만 전해오고 있다. 만드러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 (기원전 481 )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사언구(四言句)로 내용은 대부분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냥을 하는 것을 시로 ㅇ은 것이다.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 다.
5)태산각석(泰山刻石)
B.C 219년 진시황 28년에 태산에 송덕사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 후 2세 황제가 다시 태산에 올라 이 각자(刻字)의 뒤에 다시 추각을 했다. 2세의 추각은 명시대의 탁본에 29자가 남아 있었으나 원석은 청조때의 화재로 파손되어 현재는 그 패석에 겨우 10 여자가 보일 뿐이다. 이사의 글이라 전한다.
6)낭야대각석(瑯耶臺刻石)
진시황 28년에 진시황은 동해 연안을 순행하여 민간 3만호를 낭야로 옮겨 대를 만들고 돌에 각하여 진(秦)의 덕을 기리었다. 2 세 황제의 추각이 있는데 태산각석과 같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이사의 서(書)로 전해지며 좌 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현의 장중감을 준다.
2. 예서(隸書)
인지의 발달에 따른 사무의 복잡화와 여기에서 요구되는 서사기록의 변모에 맞추어 전서의 간략체로서 나타난 글씨체라 하겠다. 진나라때 운양이란 곳에서 옥리노릇을 하고 있던 사람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나라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 피우게 된다.
1)예기비(禮器碑)
후한 시대 환제의 영수(永壽) 2년에 노나라의 제상인 한래가 산뚱성 취무에 있는 공자묘(이곳은 한(漢)이하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이라 불리운다.)를 수리하고 제기를 바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정면과 이면 그리고 좌우 양측 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는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웅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수도 만항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 다.
2)사신비(史晨碑)
이 비(碑) 역시 후한시대의 승상이던 사신(史晨)이 공자묘에 제사를 치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비이다. 전비, 후비가 있고 순하고 담백하며 전형적인 팔분체(八分體)라고 할 수 있겠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있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 입문에 좋다.
3)장천비(張遷碑)
한비의 최후기에 돌연히 나타난 서체로 용필이 방모(方摸)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 다. 소박하고 힘찬 점획, 완강한 네모꼴의 구성, 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충분히 뻗은 점획, 자유롭고 매이지 않은 결체에 맛이 있다.
4)을영비(乙瑛碑)
결구가 짜이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 소박하면서도 경부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된 한대의 걸잘이라 할 수 있겠다.
5)서협송(西狹頌)
원형, 사각형의 결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 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미 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다. 감서성 성형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 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 크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시 오단 크기의 유래가 적혀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3. 해서(楷書)
부단히 진보되는 사회현상과 인구증가로 인해서 일반 상용의 자체를 쓰려면 불편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자체의 간화(簡化)의 필 요성이 요구되었으며 따라서 해서라는 서체가 생겨서 예서를 대신하게 되었다. 삼국(三國), 육조(六朝)를 내려오면서 해서(楷書) 는 유행하여 지금까지도 이 해서가 쓰여지고 있다. 해서의 필획은 대부분 예서로 부터 변화되어 나왔기 때문에 해서를 금예(今隸 )라고 부르기도 한다. 크게 남북조 시대의 해서와 당시대의 해서로 나뉜다.
1)장맹용비(張孟龍碑)
육조시대의 대표적인 해서이다. 서도에서의 힘은 적절한 조화가 따라야 한다. 결구법이 바로 그것인데 장비액(張碑額)은 그런 것의 본보기라 하겠다. 본문도 점획의 배치에 따라 이지적인 자태를 풍긴다. 경증의 배합, 각도의 변화, 그리고 글자의 흐름을 따라 그것들을 조절하는 의욕적인 필력, 이러한 모든 요소가 큰 비석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흔적들을 표면에 나타나 지 않게 할 것, 여기에 서도의 비결이 있다. 북위서가 유행하던 때의 이상형이라 할 수 있다.
2)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天銘)
전각은 양문으로 되어 있고 구성궁예천명의 여섯자를 이행(二行)에, 본문은 24행(行)으로 되어 있다. 남북 서풍을 융합한 수(隋 )대의 서풍을 전(篆).예(隸)에 바탕을 둔 구성법으로 방형을 바꾸어 장방형의 형태로 새시대 감각을 불어 넣은 것으로 화도사비( 化度寺碑)와 더불어 구양순의 대표작이다.
3)안근례비(顔勤禮碑)
안씨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 2대 역작 중의 하나이다.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이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유가 잘 조 화되어 있다.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 중에서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4. 행서(行書)
행서는 예서가 통용되던 후한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예서의 자획을 장초(章草)의 필법으로 쓴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행서는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 그리고 왕희지(王羲之)의 동진에 와서 다른 서체와는 구분될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을 확립했다.
1)난정서(蘭亭序)
동진 영화(永和) 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각지의 명사가 모여 시를 짓고 이것으로 난 정집을 엮었는데 여기에 왕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이다. 즉석에서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 니고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28행 각행 32자로 후에 당 태종은 어렵게 이 난정서를 구했는데 이것 을 너무 아끼어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진적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당 태종때에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청에 의하여 서(序)를 짓고 여기에 고종의 기(記)와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을 덧 붙인 것이다. 승(僧) 회인(懷仁)이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것으로 이 집자를 완성하는데 이십여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성 교서는 왕희지 행서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한 것으로써 일찍부터 행서에 있어서 필수적 교범의 역할을 해왔다.
- 자료출처:경희대학교 서도회
첫댓글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서예를 하는 사람으로 서체의 변화도 모르고 살았으니 부끄럽습니다.
조금은 공부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