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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박 완 서
찬바람 난 지 언젠데 자꾸 속에서 열불이 나려고 해서 손사래로 부채질을 하다 말고 내가 미쳤지, 나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북북 세수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뭐가 미쳤다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 판국에 손사래르 바람을 내려는 건 확실히 미친 짓이지만 더 미친 짓은 남편에게 뭔가 하소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오늘 온종일 내가 무슨 일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지 최소한 남편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슬쩍 운을 멘다는 게, 여보 나 왜 이렇게 울화가 치밀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했더니 그가 한다는 소리가 갱년긴가보군, 했다. 그래 갱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화상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지가 여자에 대해 뮐 안다고. 의학적인 답변으로는, 나 지금 갱년기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팔십 노인들이 모여 앉아 갱년기 타령을 하는 것을 참아내야 할 걱정으로 아침부터 울증에 빠져 있는 아내에게 그건 할 소리가 아니지.
실은 그다음에 한 짓이 더 한심했다. 시누이한테 전화를 건 것이다. 시누이하고 시어머니는 다 같이 ‘시’자 돌림이지만 두 사람이 앙숙이기 때문에 시누이한테서는 벌써부터 ‘시’자를 떼어놓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고 동창이기도 해서 시어머니가 뭐라든 결혼하고도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시누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너 오늘 또 우리 엄마네 파출부 나가는 날이로구나. 네 목소리 듣고 그것도 모를까. 내가 누군데. 그 노인네 독립심 하나는 끝내주더니 요새 왜 자꾸 며느리한테 엉키려들지? 너 힘든 거 나 다 알아. 나한테도 좀 엉켰냐. 이혼하기 전까지는. 너 그때 속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내가 대신 받아줬기 때문이란 거 이제라도 좀 알아먹어라. 그렇다고 너까지도 이혼하란 소리는 아니고. 노인네 그래봤댔자 사라져가는 세대 아니냐. 너무 신경쓰지 말고 대충대충 넘겨. 까짓 거 쿨하게 굴어. 쿨하게. 아니면 너도 나처럼 이혼을 하든지.
또 그놈의 쿨. 남은 더워 죽겠는데. 시누이는 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나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진지하게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걸었는데 이쪽에다는 한마디도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실은 이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이혼에 따른 전반적인 문제, 심리적 후유증, 법적인 문제, 재산 분할, 가족의 역할 등등. 할 말을 못다 해서 잠시 멍하고 있다가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건 질색인 시누이 였다. 서두만 듣고도 머리를 흔들고 끝까지 들으려고도 안 할 것이다. 남들의 통속적인 속내에 전허 호기심 없는 태도 자체가 도덕적인 해결책보다 훨씬 도움이 될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가. 파출부 다음으로 해야 할 오늘 일에 대한 부담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쿨하게, 쿨하게. 바로 그거야.
사실. 시누이가 이혼하기 전까지 시어머니는 며느리 같은 거 거들떠도 안 봤다. 한 인물 하는 시누이는 대학 때 부잣집 아들에다 키도 크고 인물도 잘나서 킹카로 통하는 동기와 소문난 연애를 해서 한때 어머니로 하여금 딸 가진 근심을 흠뻑 맛보게 했다. 어머니의 성화에는 아랑곳없이 그야말로 서늘하게 견디던 시누이는 그 킹카가 가업을 이어받은 후에 결혼에 골인했고, 연이어서 아들딸을 차례로 낳았다. 딸의 지위가 반석 같이 굳어졌다고 판단한 시어머니는 기고만장해졌다. 나는 꿀릴 게 없이 살아왔다는 게 당신의 일생을 쇠꼬챙이처럼 관통하는 자부심인데, 아들에 관해서는 하등 내세울 게 없어서 적잖이 자존심 상했을 것이다. 집안에서나 대외적인 행사에서나 딸 사위를 내세우고 아들 내외는 치지도외 했다. 그런 딸이 이혼을 한다고 했을 때 한바탕 난리를 예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도록 모든 문제―자녀 양육 문제와 위자료 문제 등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받아내고 서류 정리까지 깨끗이 마무리된 후에 친정에는 통고만 해왔다.
그렇게 일이 다 끝난 후에도 그 잘난 사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시어머니는 사위를 한번 찾아간 모양이었다. 재결합까지 바란 건 아니지만 딸이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는지는 한번 들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년이 제 입으로 실토할 년이 아니니까, 시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이렇게 마음먹고 찾아간 전 사위의 대답은 자기도 자기가 왜 이혼을 당했는지 모르겠노라고, 지금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헤매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딸이 이혼을 당한 게 아니라, 한 거라는 건 시어머니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됐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연세에도 신세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믿고 있는 시어머니지만 여자 쪽에서 먼저 아무 하자 없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다는 건 좀처럼 믿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에 대한 분풀이를 너 같은 건 내 딸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매사에 따돌리는 것으로 풀었다.
시누이는 오히려 그걸 즐기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내놓은 자식 취급당하니 살 것 같다고 했다. 넉넉한 위자료와 아이들 양육권까지 챙긴 그녀는 자식 뒷바라지도 잘해 좋은 외고도 보내고 명문 대학도 보냈다. 곧 유학을 보내거나 결혼만 시키면 완전 프리라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금도 자식이나 남의 이목에 신경쓰며 사는 건 아니었다. 동창들 사이에서는 직접적으로나 한두 다리 건너서 알 만한, 꽤 괜찮은 유부남들하고 염문도 잘 뿌리고 헤어지기도 잘했다. 아마 차버렸을 것이다. 찼든 차였든 임자 있는 남자와의 염문에 지저분한 뒷소문이 없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그 비결을 물어보면 ‘쿨하게’ 였다. 만병통치, 그놈의 쿨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결까. 아무튼 부러운 능력 이었다.
5호선을 타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시누이 한테서 였다.
서둘지 마. 이제부터는 집에서 차리지 말고 나가 잡수라고 했어. 그 근처에 늙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식당도 가르쳐드렸고. 맛도 괜찮고 가격도 적절해. 내가 아주 예약까지 해놓았으니까 틀림없을 거야. 말이야 바른대로 말이지, 네 잘못이야. 쳐음부터 울 엄마를 그렇게 길들이는 게 아니었어. 만만하게 보이면 기어오르는 건 늙은이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야. 너도 자식 길러봤잖아.
그녀답지 않게 가벼운 설교까지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안 하던 짓이었다. 그거 하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느냐는 가벼운 질책은 시누이 노릇이라기보다는 우정에 가깝다.
시누이로서보다는 친구로서 그 여성이 고맙고 의지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토 고분고분한 성미는 아닌데 처음부터도 아니고, 시집살이 무섭던 엣날에도 고방 열쇠 물려받을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시어머니한테 꼼짝 못하고 쥐여 살게 된 사정은 내가 생각해도 하도 치사스럽고 한심해서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시어머니가 사준 집이었다. 시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돈은 움켜쥐고 있어야지 생전에 자식에게 물려줬다가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는 믿음이 강한 분이었다. 정년까지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고 먼저 돌아가신 시아버지도 공무원이었다. 두 분이 다 돈을 벌고 자녀도 남매밖에 안 뒀으니 가난하게 살았달 순 없지만, 동생들을 주줄이 거느린 맏아들 맏며느리답게 검약이 몸에 밴 분들이었다. 소풍 때 김밥 말고 통닭 한번 싸가지고 가서 여봐란 듯이 펼쳐놓고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소리를 남편한테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친정집도 웬만하게 살았지만 김밥에 삶은 계란, 콜라면 족했지 감히 통닭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대가 그랬다. 다들 그렇게 겨우겨우 살 때 남편이 통닭씩이나 꿈꾼 것은 그래도 들은풍월, 먹어본 깐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남편은 자기가 소풍가는 날보다 교사로 있는 어머니가 소풍가는 날이 더 기다려지고 즐거웠다고 했다. 학부형들이 싸온 것을 아이들 먹이려고 이것저것 집까지 챙겨가지고 왔는데, 그중에 통닭이 있으면 환호성을 질렀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쉿, 아이들 입을 틀어막고 다른 식구들 몰래 먹으라고 하면 그 맛은 별로 였노라고 회상했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학군에 있을 때는 통닭을 다섯 마리까지도 집으로 가져온 일이 있어 삼촌 고모들까지 온 집안 식구가 둘러앉아 입가가 번드르르하도록 통닭을 뜯을 때가 제일 행복했고, 엄마가 오래오래 부자 동네에서 선생 할 수 있길 마음속으로 빌었다고도 했다.
남편의 그런 추억담이 아니더라도 부자 동네 학군에서도 잘 가르치기로 소문이 나 육학년 담임을 내리 삼 년씩이나 맡을 때가 교사로서의 시어머니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현직 교사의 과외는 금지돼 있었지만 학부모들의 간청을 못 이기는 척 자기 반 아이들 중 우수한 학생만을 골라 몰래 과외도 서슴지 않았다. 육학년 담임선생을 둘러싼 치맛바람과 성의표시의 도가 지나쳐 사회문제가 되고 마침내 중학교 입시가 없어질 그 무렵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시절을 마치 도깨비장난처럼 돈이 쏟아져들어오더라고 회상했다.
도깨비장난으로 생긴 돈을 도깨비한테 도로 빼앗기지 않으려면 땅을 사는 게 수라는 게 시어머니의 믿음이었다. 너희들도 어미 말 허투루 돋지 말고 잘 들어둬라. 도깨비는 변덕스러워서 재물을 주기도 잘하지만 뺏기도 잘한단다. 귀찮다고 아무 데나 부리고 간 재물을 돌려달라고 나타나면 저기 있다고 재물하고 바꾼 땅덩이를 가리키면, 그 땅 네 귀퉁이에다 말뚝을 박고 거기다가 줄을 매고 밤새도록 영치기 영차 땅덩이 떼가려고 용을 쓰다가 새벽에 지쳐서 가버리고 며칠 밤 그러다만다더라.
땅에 대한 시어머니의 그런 철학과 당시 공무원이던 시아버지의 정보랄까,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져 여기저기 땅을 조금씩 사모은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남편의 추측일 뿐 명색이 장남이 그 땅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대학 시절 어머니의 지나친 검약으로 메이커 있는 옷 한 벌 못 입어보고 친구들한톄 밥이나 술 한번 호기롭게 쏘지 못해 투정을 부리거나 위축돼 있을 때마다 어머니로부터 들어야 했던 격려의 말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기죽을 거 없다, 우린 땅부자야, 땅부자.
남편은 어머니의 위장 가난 때문이었는지 한때의 시대정신 때문이었는지 대학 시절 내내 운동권의 변두리를 돌다가 군대 갔다 와서 간신히 취직한 회사에도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그래도 취직하길 참 잘했다 싶은 건 나에게 청혼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아직까지도 가끔 말하는 걸 보면,
이 남자가 나하고 결혼한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확실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닌데. 남편의 월급쟁이 노릇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 돈 없이 동업으로 사업이랍시고 하면서 근근이 생활비는 벌어왔지만 여태까지 제 집 장만을 못 했으니 땅부자 어머니한테 손 벌리고 싶은 고비가 어찌 한두 번이었겠는가.
그럴 때마다 납편이 나 들으라는 소리인지 자기 위안인지 한다는 소리는, 땅이 정말 있는지 누가 문서를 봤나, 가보기를 했나, 어떻게 알겠어. 있어봤댔자일 거야. 그 시절의 촌지나 과외공부 값이 얼마나 된다고 그걸 모아 땅씩이나 샀겠어. 사 봤댔자 생전 안 오르는 돌밭이거나 벽지의 임야겠지.
남편에게 어머니의 땅이 신 포도라면, 어머니에게 자식들은 땅 네 귀퉁이에 말뚝 박고 줄 매서 흔드는 도깨비가 아니었을까.
설마 돌아가신 후에는 그 땅이 있는 땅인지 없는 땅인지, 오랜 세월 자식들한테 세도 부릴 만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 정체를 드러내리라 체념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 시기가 어머니 생전에 왔다.
시누이의 이혼이 그 계기가 됐던 것 같다. 뽐내기 좋아하는 시어머니에게 만족감을 주던 딸이 이혼하자 그게 중대한 결격 사유라고 생각한 듯했다. 출세를 했나 돈을 많이 벌었나 하다 못해 다니는 회사가 남들이 다 알아주는 버젓한 회사인가, 다 아닌 아들이 그 나이에 집까지 없다는 게 뻐기기 좋아하는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겠는가.
못난 아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굵은 적은 많았지만 그때처럼 대놓고 분풀이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게 한바탕 야단을 치고 나서 땅 판 돈이라며 우리에게는 과분한 중형 아파트를 사주었다. 남의 말에 속아서 생전 돈 안 되는 땅을 산 줄 알았는데, 너희들 복인지 지금 와서 그게 이렇게 큰돈이 됐구나. 나중엔 이렇게 우리 생색까지 내주었지만, 그 꾸중을 들을 때는 정말이지 끝까지 참아내기 힘들어 그 돈 도로 내놓고 싶었지만 못 그랬다. 남편이 나 대신 그래주길 바란 것도 같고, 남편이 그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것도 같다. 아무튼 우리의 참을성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우린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래의 일인데도 그 일을 계기로 이 집에 시집오고 나서 이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고부 사이를 평화롭게 유지시켜주던 불간섭주의랄까, 쿨한 관계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자유를 사고팔수 있게 하는 게 돈의 힘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팔순이 다 된 노인에게 그렇게 많은 사교모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정기적인 것만도 한 달에 서너 번은 되는 것 같았고, 친구네 혼사 생일 입학 학위취득 등 축하를 핑계로 모이기도 하지만 언짢은 일도 위로한답시고. 꼬박꼬박 챙겼다.
시어머니가 혼자 사는 널찍한 아파트는 강북의 도심에 있었다. 전철로 강북 강남 어디서든지 삼십 분 안에 올 수 있을 만큼 교통이 좋았다. 주위에 먹을 집도 많았다. 그런 관계로 다는 아니지만 정기적인 모임의 대부분이 그쪽의 먹자골목에서 이루어지고, 밥만 먹고 헤어지기에는 시간이 남아도는 노인네들이 헤어지기 아쉬워서 차 마시고 수다 떨기에 적절한 장소로 시어머니 아파트가 선택받은 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상한 건 어느 틈에 그 모임에 나까지 엮여들게 되었고 지금처럼 시어머니 일정을 시시콜콜 알게 된 것이다.
아파트를 사주시고 나서 시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투가 강압적으로 변한 것도 사실이고 내가 그걸 꾹 참고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처음 시작이 얼마나 모욕적이었는지는 잊혀지지 않는다. 시어머니 희수(喜壽) 때였으니까 아파트 사주신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아무리 자식 신세 안 지는 걸 코에 걸고 사시는 도도한 분이라지만 생신만은 우리가 꼬박꼬박 챙겨드렸다. 거의 밖에서 치렀지만 그건 당신이 원하셔서 그랬던 거고 집에서 차리기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름 붙은 생신이고 버젓한 아파트도 장만했겠다 집에서 차리겠다고 했더니 당신도 좋아하셨다. 집들이 겸해서 가족은 물론 가까운 친척까지 청해서 풍성하고 화기 애애한 잔치를 벌여 시어머니를 흐믓하게 해드렸다. 그후에도 내 음식 솜씨를 두고두고 칭찬해주신 것드 애써 차린 보람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꼭 대접해야 할 친구분들이 몇 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집에서 차려드려야 하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먹긴 밖에서 먹지만 딸이나 며느리가 참석해서 살갑게 대접도 하고 나중에 음식값도 내는 게 당신네들 생신모임의 관례라고 했다. 자식 신세 안 지고 산다는 걸 코에 걸고 사는 잘난 노인네들인 줄만 알았더니 자식 효도 받는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하는 귀여운 데도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럼 지금까지 그 역할은 누가 했을까, 보나마나 시누이였겠지. 시누이 이혼 후에도 남들이 행여 수군거릴까 신경쓰면서도 맡길 데가 거기밖에 없었을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불쌍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 잘난 시어머니를 불쌍해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날 시어머니한테 당한 모욕은 며느리로 하여금 다시는 그분과 화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4·4회 모임 이니까 L호텔 뷔페로 할 거라고 했다.
4·4회라는 모임 이름은 경성사범 입학년도인 1944년에서 따온 거라ㅍ 했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경성사범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할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 들어갔다는 걸 반드시 밝히고 싶어했다.
일제시대에 경성사범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전교 일등이나 가능한데 그 전교도 시시한 학교는 안 되고 명문 국민학교라야 된다는 거였다. 그런 식민지적 사고방식은 내 알 바 아니지만 4·4란 이름은 그닥 좋은 이름 같지 않다고 했더니 또 한바탕 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나 죽을 사(死)자라고 4자를 싫어하지 일본말로는 4가 ‘요시’, 좋은 거, 착한 거하고 통하는 길한 숫자라는 거였다.
4·4회 멤버는 다행히 많지는 않았다. 연세들이 높으니까 돌아가신 분도 있고 그분들의 특별한 우월감에 동조할 만큼 현재의 삶도 유복한 분들만이 동참하는 모임 같았다. L호텔이라면 점심 값이 꽤 나갈 텐데, 내심 쫄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해보는 대외적인 효돈데 그 정도는 해야지, 집에서 요리 솜씨 부릴 때보다 훨씬 더 신이 났다. 노인네들이 식탐도 많고 예상했던 것보다 양도 큰 것에 놀랐다. 헌 부대에 곡식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옛말을 실감케 했다. 눈치 봐서 잘 잡숫는 것을 접시가 넘치게 덜어다드려도 순식간에 없어졌다. 갈비는 물론 노인네들이 잡숫기 어려운 대게나 가재도 미처 채워드리기 전에 어찌나 잘 잡숫는지 아무리 뷔페라지만 너무 자주 드나들며 맛있는 것만 담아오는 게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당신들도 좀 움직였으면 좋으련만 처음 한 접시만 손수 덜어오고 앉은 채 꼼짝 않고 맛있는 걸 마음껏 즐기시는 걸 보니 아무리 비싸도 돈이 안 아까울 것 같았다.
나름대로 보람 있는 효도를 한 것 같아 꽤 나가는 음식값도 아까운 줄 몰랐다. 카드로 긋고 영수증을 받는데 손님들을 저만치 앞세우고 뒤처졌던 시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돌아오더니 영수증을 날렵하게 낚아채서 당신 핸드백에 찔러넣으면서 날카롭게 속삭였다. 네 구좌로 부쳐주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그만한 액수가 다음날 내 통장으로 입금돼 있었다. 그 순간 모욕당한 듯한 기분은 아파트를 당장 토해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희수 해에는 그 비슷한 모임이 몇 번 더 있었다. 희수니까. 나도 될 수 있는 대로 기쁜 마음으로 허울뿐인 맏며느리 노릇에 충실하려고 했다. 4·4모임 외에는 다들 L호텔보다는 싼 데서 했지만 여러 번 치로는 결 보니 그게 다 내 주머니에서 나간다면 수월치 않은 액수일 테니 마냥 좋은 얼굴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역시 그분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는 걸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평생 교직에 종사한 분이 그렇게 사교 범위가 광범위한 것은 공립학교의 성격상 옮겨다닌 학교가 그만큼 여러 군데였기 때문일 것이다.
희수 해가 지나자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올해부터는 4·4회가 발목을 잡았다. 시어머니가 오라는 데도 많고 나갈 데도 많아 집에서 식사할 일이 거의 없다는 건, 친정 쪽으로 동기간도 많고 교직사회에서 맺은 관계망이 광범위하고 하다못해 해외여행 갔다 올 때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그분만의 특별한 리더십 같은 것 때문일 터이나 결코 따뜻한 분은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L호텔에서 영수증올 날렵하게 낚아챌 때 찬바람이 토는 것 같은 쌀쌀한 기운을 늘 몸 어딘가에 불이고 살았다. 맺고 끊는 듯 분명한 성격을 당신도 느끼고 있는 듯 당신은 워낙 성질이 고약해서 어려운 세월 보내면서 빠듯하게 살 때도 계라는 걸 못 해봤노라고 했다. 나 보기에 영락없이 계 오야감인데, 그 옛날에도 땅을 사려면 그 첫걸음이 계가 아니었을까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4·4회가 정기적으로 모일 구실로 계를 만든 건 최근의 일이라고 했다. 그것도 누가 목돈을 타가기 위한 계가 아니라 돈만 다달이 갹출할 뿐 타가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같은 경성사범 동기인데 교직을 중간에 그만두고 살림만 하다가 늘그막에 과부 되고 자식들도 병들거나 돈을 못 벌어 단칸방에서 비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아낸 것도 시어머니였고, 복 좋은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도움에 나서자는 제안을 한 것도 시어머니였다.
돕는 방법도 매우 합리적이었다. 매달 십만원씩 들고 나와 점심 먹고 나머지는 그 친구에게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먹는 것은 최소한으로 줄여서 싸구려로만 먹는다고 했다. 그 정도만 해도 감동 스토리인데 시어머니는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점심은 자기 집에서 낼 테니 모인 돈 전액을 보내자는 안을 냈고, 전서부터 시어머니 아파트를 가장 편하게 여겼던 멤버들로부터는 몰론 대환영을 받았다. 그 멤버들을 더욱 편하게 해주려면 도우미가 필요했다. 늙은이가 부엌에서 움직이는 건 같은 늙은이끼리도 편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가 다달이 시어머니 아파트로 시누이 말 짝으로 파출부 나가게 된 경위가 대강 이러했다. 절대로 자식 신세 안 지고 사는 잘난 노인들의 잘난 노인다운 이 착한 일을 내가 미력이나마― 한 달에 한 번이니까―거드는 일을 영광스러워는 못 할망정 파출부라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날이면 아침부터 심사가 꼬이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신역이 고돼서는 절대 아니다.
오늘도 시어머니는 나 할 일은 수저만 놓으면 될 정도로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심사는 나 못지않게 불편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시누이 때문이었다. 시누이 전화가 당장 효험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차차 마음을 바꾸는 데는 도움이 되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흥, 제깟 년이 누굴 가르치려 들어. 어림없지. 혼잣말처럼 그러나 나 들으라는 소리가 분명한 말씀을 하며 흘끗 내 표정을 살피는 노안의 총기가 무서워서 생각지도 않은 자기변명을 했다. 실은 제가 그런 게 아니라요, 덕희 혼자서 제가 안됐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아닌데. 아니면 됐다. 어서 상 보자. 시간 없다.
잘생긴 백자 볼에 풍성하게 담아놓은 잡채는 황백 알지단에 석이버섯 채 친 것, 실백까지 웃고명이 알맞게 올라앉아 아무도 손을 대거나 맛을 볼 수 없도록 고상을 떨고 있다.
참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양념이 다닥다닥 붙었지만 고춧가루나 고추장 양념은 배제한, 순 서울식 북어구이는 오븐에서 십 분 안에 그 부드럽고 순한 맛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닭가슴살이 들어간 야채샐러드에 곁들인 드레싱은 시어머니 비장의 솜씨일 터. 갈비찜이나 회 같은 비싼 음식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임의 성격상 손님들이 미안해할까봐 안 차렸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그 대신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다. 가지나물도 그렇고 알찌개도, 온갖 야채가 고루 들어간 부침개도 그렇다.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며느리 손 안 빌리고 당신 혼자서 완벽하게 차려놨다는 자부심으로 쌩쌩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시어머니 주변을 나는 헛되게 맴돈다. 내가 할 일을 찾아낼 수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모를수록 얼굴만 달아오른다. 그런 나를 가만 놔둘 시어머니가 아니다.
얘야, 손님 초대한 줄 뻔히 알고 오면서 꽃이라도 한 다발 사오면 내가 얼마나 낯이 나겠니? 너는 다 좋은데 센스가 모자라.
남친이 자기를 좋아하는 여친에게 너는 다 좋은데, 성격도 좋구, 능력도 있고, 직장도 좋고, 생긴 것만 빼면 말이야.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여자 친구가 받은 모멸감이 바로 이런 거 아닐까.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고 호흡을 조정하는 동안 친정 엄마 생각을 했다.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양가가 상견례를 치르고 나서 엄마는 별로 탐탁하지 않은 듯 말했었다. 자고로 시어머니 자리는 좀 무식한 듯해야 며느리 신상이 편하다 했는데…… 엄마도 여고 졸업생이니 학벌로 따져서 사돈한테 뒤질 게 없었다. 엄마는 그때 그 자리에서 벌써 경성사범 출신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질렸을 것이다. 한 번도 다시 떠올려본 일이 없는 오래 전 일이 어제 일처럼 분명하게 생각났다.
4·4회 멤버들은 열 명 남짓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정확하기도 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한꺼번에 시간을 지켜 나타났다. 빈손은 없었다. 케이크나 쿠키, 과일 등이 들려 있었고, 부엌에서 요긴한 행주나 세제를 들고 오는 이도 있었다. 다행히 장미 꽃다발도 있었다.
나는 그 장미 꽂다발을 여왕처럼 우아하게 부풀리고 있는 망사 치마를 벗겨내고 나서 독한 가시에 찔려가며 불필요한 잎을 따냈다. 그동안에 시어머니는 투명한 크리스털 꽃병과 전지가위를 가지고 와서 지켜보면서 어느 정도 잘라내야 꽃병에 맞는 길이가 되는지를 지시했다. 시키는 대로 해서 꽃병에 꽂아 이미 차려진 식탁 한가운데 장식하니 비로소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집에 들어올 때부터 떠들던 수다를 식탁에서 먹고 마시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주로 같이 늙어가는 동창들 얘기였다. 누구는 암, 누구는 치매. 누구는 뇌졸중에 걸리고, 누구는 과부가 됐다는 우울한 소식에도 그분들의 식욕은 주춤도 안 하고, 심난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년까지 교직사회에서 버티면서 여러 학교를 거친 분들이니까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화제도 무궁무진했다. 이름이 잘 안 통할 때는 창씨개명한 이름을 생각해내기도 했다. 걔 있잖아, 준교사 자격증으로 선생 된 애. 또는 지방 사범학교 출신 누구누구라고 출신 학교로 편을 갈라 말하기도 했다. 그때 그 노인네들 표정에 스치는 공통의 우월감을 바라보면 딱하기도 하고 느글거리기도 했다. 실은 나도 명문고 출신이지만 티 안 내고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서 못 낸 거지, 동네 아줌마나 문화센터 같은 데서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는 여성을 보면 저이가 시험 보고 들어갔을까 뽑기로 들어갔을까, 그거 먼저 궁금해하는 주제에 말이다.
배불리 잡숫고 나서 남은 음식은 싸달라고 했다. 어떤 분은 잡채를, 어떤 분은 야채전을, 혹은 북어구이를 싸달라고 하면서 손님 치르고 나면 남은 음식이 제일 곤란하잖아, 이렇게 생색을 냈지만 집에 기다리고 있는 영감님이 있는 사람이 주로 싸달라는 것 같았다. 영감님이 계신데도 남은 음식 차례가 안 간 이에게는 넌 가다가 김밥이나 족발이라도 사가지고 가렴, 일러주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가 거실 소파로 이동하자 나는 재빠르게 남긴 음식들을 락앤락에 옮겨담아 냉장고에 넣고 빈 접시들을 식기세척기 속에 요령 좋게 쟁여넣었다.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빈자리가 남았는데 돌리는 건 금지돼 있었다. 잘된 일이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원두로 할 것인가 인스턴트로 할 것인가, 커피 주문도 받고 과일도 깎아 후식 자리를 마련했다. 커피든 녹차든, 시어머니 의중의 가장 아름다운 잔을 대령해야만 뒷말이 없다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시어머니 생각으로는 그거야말로 센스의 문제일 터. 그러나 센스야말로 간섭을 가장 싫어하는 원초적인 감수성이라는 결 그는 알까. 후식 자리의 화제는 단연 아픈 얘기였다. 고혈압, 당뇨, 불면증, 건망증, 난청, 퇴행성관절염, 심지어는 요실금까지, 병자랑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거기 맞는 의사나 병원, 민간요법, 약초, 사기꾼 등 화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병 자랑은 우리의 전통문화인 듯했다. 우리 친구들끼리도 모이면 병 자랑처럼 지칠 줄 모르는 화제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참아줄 수 없는 건 병 자랑이 아니라 그 모든 증세를 갱년기 현상으로 돌리는 거였다. 갱년기엔 누구나 다 그래. 갱년기 현상은 조만간 지나가게 돼 있어. 갱년기를 잘 넘겨야 되는데, 정작 갱년기는 여기 이 부엌 구석에서 거봉포도를 송이째 내놓을 것인가 알알이 떼어서 내놓을 것인가를 못 정해서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있는 난데. 나는 손사례로 부채질을 대신하면서 조용히 음습한 죽음이나 직시해야 할 노인들의 즐거운 착각도 이쯤 되면 초기 치매현상이 아닐까 걱정이 되는 한편 재미있기도 했다.
제동을 걸 사람이 없어선지 착각이 착각을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화제에도 기름이 오르기 시작했다.
병 자랑이 서로의 용모에 대한 탐색으로 변했다. 그래 갱년기니까, 병 자랑보다도 미용에 대한 관심이 더 어울릴 거야. 너 그동안 보톡스 맞은 거 아냐? 벼르더니. 쟤 저번에 땡긴 거 이제 자리잡을 때가 됐는데 아직도 어색한 것 같지 않니. 재가 몇 년이나 젊어지나 봐가며 다도 해볼까 하는데. 난 지방에서 성형외과 해서 돈 엄청 번 우리 아들 친구가 지 병원에 내려와 입원해서 일주일만 있으래. 그동안에 감쪽같이 삼십 년은 젊어지게 해주겠다는데 엄두가 안 나. 영감이 자리보전하고 있는데 내가 그러고 나타나봐, 두번째 심장 발작 일으킬걸.
한 사람의 삼십 년 젊어지는 꿈은 갱년기 연령까지 삼십 년 전으로 끌어내려 처녀 때 자기가 한 인물 한 얘기, 자기를 따르던 숱한 남자들 애기, 자기 때문에 약 먹은 남자 얘기, 아냐, 나도 그 남자 아는데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어. 어머머, 그 남자 약 때문이 아니라 늙어 죽은 지 언젠데 싸움 나겠네. 이런 식이었다.
연애는 영원한 회춘재인가. 노인들은 자기가 지금 몇 살 인지 헷갈리고 왔다갔다하면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생기가 나 보였다. 그런 행복한 헷갈림은 여행가 남편을 따라 이 지구상에 안 가본 데가 없다는 비교적 점잖아 보이는 분에게 이르러 허망한 절정에 달했다. 그가 말했다. 느이들은 내가 별의별 나라 다 여행해본 줄 알지만 아직 못 해본 여행도 있단다. 뭔데? 어딘데? 젊은 꽃미남하고 눈이 맞아 무작정 도망치는 해외여행.
세상에 꿈도 크지. 미쳤어. 누가 그런 것 같은데 분위기가 곧 가라앉고 조용해졌다. 그의 말투에는 농담 따먹기와는 다른 아이러니가 있었다. 저들의 퇴영 (退娶)의 끝은 어디일까,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어느 자리에도 꼭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나 전환을 위해 좋은 일이었다. 시어머니가 선창을 하고 다들 따라 불렀다. 그윽한 애조는 어디선가 들은 듯했지만 가사는 일본말이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여러 절로 된 노래 가사를 다 아는 사람이 없는지 절이 바뀔 때마다 시어머니가 선창을 했다. 노래가 길어지면서 따라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점점 줄었는데 후렴만은 다 같이 목청을 높이고 표정까지 심각하게 가다듬어가면서 따라 부로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렴만을 반복해 부로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뜻인지 모를 후렴은 이러했다. ‘무까시노 히까리 이마 이즈꼬.’ 나는 일본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지만 뒤에 꼬자 붙는 건 여자 이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어릴 적 친구를 하나꼬, 아끼꼬 하는 식으로 부르는 걸 들은 일이 있고 일본 영화도 더러 봤으니까. 아마 죽었거나 헤어진 여자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노래 가사임이 분명 했다. ‘이마’는 성, ‘이즈꼬’는 이름일 테지. 그래도 확실히 해두려고 ‘이마 이즈꼬’가 여자 이름인가봐요? 하고 좌충에 대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서 :무까시노 히까리 이마 이즈꾜’라는 후렴 문장 한 소절을 통째로 해석해주었다. ‘그 옛날의 광영은 지금 어디에’ 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소절을 왜 그렇게 애타게 반복해 불렀을까. 저 분들이 하자 없이 모범적으로 살아온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평생 초등학교 선생 노릇하면서 언제 한번 광내고 살아 본 적이 있다고. 그러면서도 인생 전반에 대한 측은지심 같은 걸로 마음이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이제 가도 좋다는 눈짓을 했다. 그런다고 당장 나오긴 좀 뭣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제야 곗돈들을 모으다 말고 누가 느닷없이 말했다.
야, 그 배고프던 그 시절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시선이 아득해지는 그들을 뒤로하고 시어머니 아파트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그 노인들이 애타게 찾은 그 옛날의 광영이 그럼 배고픈 시절이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그러면서도 나는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말드 안 되는 것한테 쫓기는 기분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조금 서둘렀다.
세미가 지적해준 데는 그녀가 근무하는 회사가 있는 빌딩 일층에 있는 커피빈이었다. 밖에도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 돼 있었지만 어둑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세미는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내가 너무 일찍 온 거였다. 내 쪽에서 부탁해서 어렵게 잡은 약속이니 설사 늦는다고 해도 탓할 수도 없다.
세미는 한 달 전까지 내 며느리였던 아이다. 아들 혼자서 집에 다니러 왔을 때, 세미는? 하고 물었더니 헤어졌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겨우 한 달에 한두 번 시부모 보러 오는 문제로 티격태격했구나 싶어 언짢은 걸 참고 세미가 싫다면 오지 말지 뭣하러 왔냐고 우선 내 아들 마음부터 능쳐주려고 했다. 그렇다고 부모 된 도리로 그렇게 어영부영 넘어갈 건 아니다 싶어, 세미, 걔 오냐오냐 물렁하게 굴면 네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을 아이다 너, 바야흐로 일장연설을 하려는데 아들이 세미 지금 제 와이프 아니라니까요. 전처가 된 지 한참 되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뭐야, 이놈아. 결혼이 무슨 장난아야. 남편이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흥분하지 마세요. 이미 끝난 일이에요. 그러고는 벌써 전에 살던 오피스텔로 짐 옮기고 따로 나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물어볼 것도 없이 세미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하도 기가 막히니까 말도 잘 안 나와 속으로 침착하게, 서둘지 말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감히 이혼이란 말을 누가 먼저 꺼냈냐? 겁도 없이, 그 말 먼저 꺼낸 사람이 누구냐고?
엄마,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
왜 안 중요해. 그릇이 깨져도 누가 깨뜨렸냐고 묻는 게 순서야. 책임의 소재는 분명히 해야 하니까.
엄마, 엄마가 무슨 재판관이에요. 따질 걸 따지세요. 우린 서로 같이 사는 데 멀미가 났을 뿐이에요. 우린 둘 다 어엿한 성인이구요.
글쎄, 누가 먼저 멀미를 냈냐니까.
어느 날 내가 멀미를 내고 있다모니 그 친구도 멀미를 내고 있더라고요. 멀미나는 차는 빨리 내리는 게 수지 누가 먼저 멀미가 났냐는 따져서 뭐하게요.
걔 참 앙큼하구나, 세미 말이다.
남의 자식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린 지금 남남이라니까요, 완전.
그애들은 부모 속도 안 썩히고 부담도 안 주고 너무도 쉽게 결혼했다. 요즘 혼기보다는 좀 이른 나이긴 했지만 혼기를 놓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좋은 대학 경영학과 나와 재벌 기업에 취직했으니 월급도 많이 받을 것이다. 즈이 아버지와는 달리 재벌에 대한 적대감도 없고 경제관념도 야무져서 오피스텔도 세든 게 아니라 샀다고 했다.
며늘애도 제힘으로 장만했는지 부모가 사줬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명의의 오피스텔에 살다가 둘이 결혼하게 되니까 두 오피스텔을 전세 줘서 합한 돈으로 살 만한 아파트를 전세 내서 신혼살림을 꾸리다가 파경을 맞은 것이다. 이런 사정이니 아들은 결혼 때도 부모에게 신세를 지거나 걱정을 끼칠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때 난 왜 그렇게 심난했을까. 이러려고 그랬나. 부모한테 손 안 벌리고 인륜대사를 치르려는 아들이 대견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 다 하는 걱정을 나만 안 하는 게 왠지 불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약한 소외감이었다. 뭐가 잘못됐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예단을 생략하자는 건 아들 가진 쪽에서 예의상 한번 해본 소린데 그쪽에서 백 퍼센트 수용했다.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지만 경험자들로부터 얻어들은 가장 천격스럽고도 복잡 미묘한 저울질에서는 일단 비켜난 것 같아 한숨 놓았었다. 그 대신 패물은 좀 해주려고 했는데 커플반지가 있으니까 됐다고 하는 걸 살살 달래서 귀금속상에서 만나기로 힘들게 날짜를 잡았다. 세미는 그 으리으리한 보석상을 한번 쭉 휘둘러만 보고는 됐어요,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건지 내 소매를 끌고 가까운 백화점으로 갔다. 그러고는 액세서리 파는 데서 장난감 같은 팔찌와 귀고리 목걸이 들을 성의 없이, 마치 쓸어담듯이 골라잡았다. 그래봤댔자 귀금속에다 대면 몇 푼 안 되지만 쓰잘 데 없는 것들을 하도 여러 개 사는지라, 얘야, 하나를 가져도 값 나가는 걸 가져야지 그따위 것들 아무리 많아봐야 아쉬울 때 하나도 도움 안 된단다, 했더니, 세미가 그 동그랗고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럼 궁할 때 팔아먹으라고 저한테 패물 해주려고 하셨어요? 이러는 거였다. 참 맹랑한 아이구나 싶기는 했지만 욕심스러운 아이는 아닌 것 같은 게 마음에 들었었다.
이런 며늘아기니 설사 아들이 이혼을 당했다고 한들 거덜날 것은 없으리라. 거덜도 뭐가 있어야 날 게 아닌가. 아들딸 결혼할 때마다 한 재산 기울여서, 기울일 재산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떡 벌어지게 해주고, 예단입네 살 집입네 과분하게 장만하는 사이에 사돈집과 갈등을 빚기도 하고 자식들한테 정 떨어지기도 하는 과정이 왜 있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부모는 투자를 안 했으니 부모의 발언권이 약하고, 저희들끼리는 구속력이 없었던 게 아닐까. 결혼이 무슨 장난이냐고 일단 호통을 치긴 했지만 돈 문제가 얽히지 않은 결혼은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드나드는 젊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팬티가 보일락 말락 하게 짧고 나풀나풀한 치마를 입고 있다. 커피빈 안쪽 벽은 완만한 둥근 곡선인데 선을 따라 턱을 만들어놓아 걸터앉을 수도 있게 꾸며놓았다. 동성끼리나 사무적인 관계로 보이는 남녀만 테이블에 마주 앉고 사귀는 사이로 보이는 커플은 나란히 앉을 수 있게 해놓은 그쪽에 가 앉아 있다. 남자 무릎 위에 올라 앉은 계집애도 있고, 남자 목에다 제 팔을 감고 있는 아이도 있다. 그 자리는 남녀의 친밀한 신체 접촉을 위해 꾸민 자리인 듯했다. 근데 가만히 보니 상대를 주무르고 있는 건 주로 여자고 남자는 수동적이다.
아들이 처음으로 세미를 집에 데리고 와서 소개시키던 날 생각이 났다. 세미도 우리 아들의 단단한 가슴팍이나 울퉁불퉁한 팔뚝을 괜히 탁탁 치곤 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질 때도 있었다. 무슨 애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산만하게 굴면서 내 아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지만 내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니까, 철부지의 천진난만한 버릇쯤으로 봐주려고 애썼다. 남들은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단점만 보인다는데 우리 부부는 눈에 콩 꺼풀이 씐 것처럼 아무것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도 우리 식의 책임 회피가 아니었을까.
그때가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닥 더운 날은 아니어서 에어컨을 트는 대신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놓았었다. 저녁 먹고 난 후의 선들바람은 쾌적했다. 별안간 세미가 비명을 질렀다. 모기에 물렸다는 것이다. 어떡해, 어떡해, 난 몰라, 어떻게 집 안에 모기가 다 있어, 방방 뛰면서 난리를 치기에 나는 우선 곤충에게 물렸을 때 바르는 약을 물린 자리에 발라주려고 했다. 물것에 예민한 체질인 것 같았다. 희고 길고 매끈한 팔뚝에 두 군데나 방금 물린 자국이 콩알처럼 부풀어올라 있었다. 약을 발라주었는데도 팔짝팔짝 뛰면서 천금 같은 우리 아들에게 당장 그 모기를 잡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오빠가 당장 잡아올게, 아들은 식당과 거실의 의자들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하면서 온 집 안을 난장판을 만들고 나서 기어코 모기 한 마리를 손으로 때려잡아 개선장군처럼 자랑스럽게 세미에게 갖다바쳤다. 바쳤다기보다는 손바닥에 묻은 모기 자국을 보여준 거였다. 그걸 본 세미가 다시 한번 어머머, 피, 내 피, 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그 모기는 세미를 문 모기라는 분명한 증거를 남기고 죽었다. 아들 손바닥에는 모기 자국보다 더 많은 붉은 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들을 보니 세미보다 더 모기에게 빨린 피를 아까워하는 표정이 역력해서 혹시 아들이 그 피를 핥아먹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더랬다.
그때부터 난 그 아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모기보다 더 앵앵거리던 혀 짧은 어리광하며, 남의 아들을 그 부모 앞에서 머슴 대하듯 하는 버르장머리하며, 공주병도 중증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귀여운 듯이 바라만 봤고 그애를 보내고 나서 우리 아들이 어쩌다 그런 아이를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마음에 안 차했더니 그가 한다는 소리가,
내버려둬. 곰하곤 못 살아도 여우하곤 살 수 있다지 않남. 엄마가 하도 무뚝뚝하고 둔하니까 제짝은 정반대로 골라잡은 거야.
그때 남편하고 한바탕 싸워서라도 그 혼사를 막아야 했거늘.
세미가 들어오고 있었다. 딴 계집애들처럼 나풀대는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굽이 십 센티나 될 것 같은 구두를 신고 모델처럼 또박또박 우아하게 걸어들어왔다. 한때 며느리였던 여자와 마주 앉는다는 건 모로는 사람끼리 합석하는 것보다 더 어색했다.
세미는 머리만 한 번 까딱하고 나서 만나자고 한 것은 네가 먼저니 말도 네가 먼저 하라는 투로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면구스러워서 나는 시켜만 놓고 안 마시고 있던 카푸치노를 한 모금 홀짝 넘기면서 말문을 열었다.
어떤 커피로 할래? 여긴 커피 종류가 많구나. 요샌 다 그래요. 커피는 온종일 여러 잔 하셨으니까 녹차로 할게요.
이런 데서 녹차도 파니. 얼굴이 좀 수척한 것 같구나. 살도 좀 빠지고.
그래요? 잘됐네요. 마음 고생해서 그런 줄 아시나본데 아니걸랑요. 요새 다이어트중이에요. 결혼생활 하는 동안 스트레스 받아서 살만 쪘거들랑요. 아유, 끔찍해, 글쎄 이 몸매에 삼킬로그램이나 불었었으니까.
직장 일은 잘되니?
그럼요, 요새 오직 일에만 매달려 있으니까 행복해요. 오빠한테 얘기 들으셨을 덴데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왜, 만나잔 게 잘못됐냐. 아무리 너희끼리 좋아서 한 결혼이라지만 정식으로 양가 어른 일가친척 모시고 한 결혼인데 우리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었으니 부모 된 도리로 자초지종을 알기나 하려고 불러 냈다. 뭐가 잘못됐냐.
뭐 잘못하셨다는 게 아니라요, 오빠가 그 정도는 얘기하지 않던가요.
듣긴 잠깐 들었지만 하도 말 같지가 않아서……
그럼 저라도 말 같은 얘기를 해달라는 말씀인 것 같은데.
왜 안 되겠니? 도대체 왜 이혼까지 하게 된 거니.
성격차예요. 순전히.
여긴 파경난 배우들의 기자회견 자리가 아니다. 그 성격차이라는 것, 내가 좀 알아들을 수 있게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순 없겠니? 그렇게 눈만 깜빡거리지 말고. 어지럽다.
이를테면…… 이를테면 제가 오랜만에 오빠하고 같이 집에서 저녁 먹으려고 장보고 온갖 솜씨 부려서 근사하게 저녁. 상을 봐놓으면 오빠는 먹고 들어오고, 내가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피곤해서 대충 먹고 들어가서 침대에 널브러져 있으면 자기는 쫄쫄 굶고 들어와서 집 밥이 먹고 싶어 죽을 뻔했는데 아무것도 안 해놨다고 화내고 문 박차고 나가버리고, 내가 외식하고 싶을 때 오빠는 집 밥, 내가 집 밥 먹고 싶을 때 오빠는 외식. 지가 집 밥 당번일 땐 땡땡이쳐도 되고, 난 안 되고,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니까요.
고작 그게 성격차란 말이니?
고작 그거라니요. 그런 일이 누적돼보세요. 얼마나 힘든데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제 몸이 삼 킬로그램이나 불었겠어요.
그 정도는 성격차이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 아니냐? 아침에 나갈 때나 중간에 서로의 일정이나 컨디션을 미리 알아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런 노력도 안 하고 어떻게 결혼생활을 유지시킬 수 있겠니.
연애할 때나 신혼 때는 서로 약속 안 하고도 그런 게 척척 맞았다니까요. 보고 싶은 영화, 먹고 싶은 음식, 걷고 싶은 거리, 그런 것들을 말 안 하고도 서로 척척 알아맞혔다니까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그렇게 텔레파시가 통하게 돼 있는 거 아닌가요. 연에도 아마 그 재미에 했을걸요. 그게 안 통하고부터 우린 서로의 사랑을 의심했고 같이 살 까닭도 못 느끼게 된 거죠.
더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벽창호끼리 마주 앉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남편한테 세미한테 듣고 온 그 말도 안 되는 이혼 사유를 말해줬더니 그가 말했다. 남자들의 뇌는 결국은 엄마 닮은 여자가 마음 편하게 돼 있다더니 맞는 말이구만. 곰처럼 무뚝뚝하고 둔한 어미에게 질려서 아들이 여우 같은 여자에게 끌렸을 거라고 말할 때는 언제구. 이 집에서 못된 바람은 다 나에게로 불어온다. 대답 대신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걷잡을 수 없이 잠이 밀려왔다. 자야겠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코 골며, 아 아, 간간이 신음하며, 남편이 관찰한 나의 자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도 나의 꿈속은 들여다보지 못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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