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공원 쪽에서 서하남 인터체인지 앞을 거쳐 하남시 교산동으로 이어지는 편도1차선의 고갯길을 막 넘어가면 그 끄트머리에 한가로운 도시의 낚시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저수지 하나를 만난다. 흔히 '고골낚시터'로 통하는 이곳으로 내려서면 이내 외곽순환고속도로가 만들어낸 인공장벽이 보이고, 다시 도로확장으로 인해 꽤나 길어진 지하통로를 뚫고 길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아늑한 절터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 '광주춘궁리오층석탑'과 '광주춘궁리삼층석탑'. 수 년 전에 '하남 춘궁동 오층석탑 및 삼층석탑'으로 명칭을 변경해 달라는 청원이 있었으나 문화재위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3 이순우
거기가 '하남 춘궁동 동사지'(사적 제352호)이다. 도중에 드문드문 안내간판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는 일은 그리 수고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15년 전에 그 절터에서 발굴조사를 하다가 '동사(桐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된 적이 있고, 그 바람에 몇 해 뒤 사적지 지정이 이루어질 당시부터 그 이름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이러한 이름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 이름이 낯설다. 세월이 좀 흘렀지만 아직도 그저 '춘궁리 절터'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한 편이다. 이 이름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 절터에는 각각 '광주 춘궁리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광주 춘궁리 삼층석탑'(보물 제13호)이라고 이름이 나붙은 석탑들이 둘씩이나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던 탓이 아닐까 싶다.
▲ '하남춘궁동동사지'(사적 제352호)의 표지석. 그런데 이 표지석처럼 '하남시'라고 함부로 명칭을 달리 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2003 이순우
그것도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그 이름으로 통용되어 온 석탑들이 말이다. 돌이켜 보면 '광주 춘궁리 석탑'이라는 명칭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시대인 1934년 8월 27일. 그리고 해방 이후에 다시 문화재보호법의 제정과 더불어 국보와 보물을 분리하여 재지정한 것이 1962년이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지정명칭의 변화는 없었다.
그리고 1989년에 다시 광주군의 동부읍과 서부면 일대가 분리되어 '하남시'로 승격되었으나 지정명칭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광주 춘궁리 석탑'은 지금 '하남 춘궁동 동사지' 위에 서 있는 셈이니 약간 어색하기는 어색하다. 게다가 현재 이 절터에는 대원사(大圓寺)라는 이름의 신흥사찰마저 법당을 지어 올린 상황이니 만치 지명(地名)의 혼란은 자꾸 가중되고 있다.
'광주의 춘궁리'면 어떻고 또 '하남의 춘궁동'이면 어떨까 마는 지명의 불일치에서 오는 혼동은 피할 도리가 없는 일. 그래서인지 5년 전쯤에 하남시에서는 "동일구역 내에 위치한 문화재의 명칭이 달라 관람객에게 혼란을 야기하므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하남시 춘궁동 석탑으로 문화재지정명칭을 변경해 달라"는 요지의 안건을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심의보류였다. 문화재와 행정구역의 명칭이 다른 경우가 워낙 허다하고 또 지정 당시의 명칭을 승계하는 것도 원래 지명의 맥락을 유지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행정구역이름과 문화재지정명칭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정말 수두룩하다.
▲ '경주 장항리사지'(사적 제45호)에 있는 '월성 장항리사지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 이곳 역시 행정구역의 명칭은 서로 달리하고 있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2003 이순우
1989년에 경주군으로 이름을 고쳤던 월성군의 경우가 그러하고, 특히 1990년대 중반에 도농복합형 시군통합이 가속화하면서 이러한 일은 전국을 통틀어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을 정도였다. 가령 중원은 충주가 되고, 옥구가 군산이 되고, 명주는 강릉이 되고, 진양이 진주가 되고, 금릉은 김천이 되고, 또 선산은 구미가 되고, 영일은 포항이 되어 버렸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월성이 경주라거나 중원이 충주라는 사실 정도를 구분하지 못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고 또한 거기에 어느 정도 지역명칭의 역사성이 맞물려 있으니 만큼 문화재지정명칭을 완전히 통일적으로 재정비한다는 것이 그다지 큰 실익은 없어 보인다. 더구나 앞으로 행정구역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거기에 따라서 자꾸 문화재 지정명칭을 고쳐나가는 것도 크게 바람직한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 아무리 원칙이 그러하고 또 상황이 그렇더라도 편차가 아주 심한 문화재지정명칭을 고쳐주어야 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다. 가령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리사지'의 문화재들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달리 이곳을 '미륵대원'이라고도 하지만, 아직 이 이름은 정식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우선 이 절터의 공식지정명칭은 '중원 미륵리사지' 즉 사적 제317호이다. 다들 중원군이 충주시로 합쳐지기 이전이 붙여진 이름이니까 달리 어색할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이 절터에 있는 석등이나 삼층석탑 역시 '중원미륵리석등'(충북 유형문화재 제19호) 내지 '중원미륵리삼층석탑'(충북 유형문화재 제33호)이라는 지정명칭이 붙었다.
▲ 괴산 미륵리사지오층석탑(보물 제95호)의 전경. 여기가 지금은 충주 땅이나 예전에는 괴산 땅이었다. 그 바람에 이 절터의 문화재는 이렇듯 제각각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오층석탑과 석불입상에 이르러서는 난데없이 그 이름이 '괴산 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95호)과 '괴산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이란다. 분명히 이곳은 충주 땅이거늘 괴산(槐山)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같은 절터에 이름은 제각각이 되어버린 연유가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알고 보니 이곳은 원래 괴산 땅이었다는 것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더니 이 절터의 오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처음 보물로 지정된 것은 일제시대인 1935년 5월 24일이었다. 그 이름도 지금과는 약간 다른 '괴산 미륵당리오층석탑'과 '괴산 미륵당리석불입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 '미륵당리'에서 '미륵리'로 은근슬쩍 바뀌어버렸는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지만, 해방 이후에도 줄곧 그 이름이 괴산 미륵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 괴산 미륵리사지석불입상(보물 제96호)의 모습. 엄밀하게 따진다면 1963년 1월 1일에 이미 행정구역편입이 이루어졌으므로 이곳은 '중원'의 미륵리사지라고 지정고시되는 것이 옳았다.
어쨌거나 문화재보호법의 제정과 더불어 국보와 보물을 분리하여 일괄 재지정하는 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962년의 일. 그러니까 오늘날 국보문화재의 최초 지정일이 한결같이 1962년 12월 20일자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 까닭이었다. 그리고 국보지정에서 제외된 나머지 문화재들을 취합하여 보물문화재로 새로운 번호를 부여하여 재정리한 것이 1963년 1월 21일이었다.
▲ <매일신보> 1917년 9월 11일자에 등장한 '수안보온천' 안내광고. 이처럼 충주의 수안보도 예전에는 괴산의 수안보였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이 시점에서 괴산 미륵리가 속해있던 '상모면(上芼面)'이 1963년 1월 1일자로 행정구역이 변경된다는 대목이다. 원래 괴산의 상모면은 '수안보온천'으로 유명했던 곳. 그런데 이 날짜로 이 지역이 통째로 중원군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 시기가 국보 재지정이 이루어지던 딱 그때였다.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가 이루어지던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냥 괴산의 미륵리라고 했더라도 뭐라 탓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보물 재지정이 이루어지던 날짜가 그해 1월 21일이었고, 그때는 이미 상모면이 전부 중원 땅으로 들어간 뒤였을 테니 제대로 행정처리가 이루어졌다면 그 결과는 훨씬 달랐지 않았을까 말이다.
말인즉슨 지정 당시의 행정지명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착실히 따랐다면 의당 '중원 미륵리오층석탑' 내지 '중원 미륵리석불입상'이라는 명칭으로 지정고시되는 것이 옳았을 듯싶다. 불과 며칠의 시차가 만들어낸 착오 아닌 착오로 인하여 중원 미륵리의 오층석탑과 석불입상은 그렇게 '괴산'이라는 이름을 끝내 벗어버리지 못했다.
이만하면 지금에라도 해당 문화재의 '전입신고'를 처리해주어야 마땅한 하나의 이유는 되지 않을까? 마치 더 이상 괴산의 수안보가 아니라 이제는 어엿한 충주의 수안보인 것처럼 말이다.
문화재 지정명칭이 바뀐 최근의 사례
원형 그대로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문화재 보존의 제일 원칙이듯이, 문화재 지정명칭도 일단 한번 결정되면 가급적 바꾸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문화재 하나만큼은 가장 '보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라는 인식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문화재 지정명칭의 변경이 부득의한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렇다고 그 사례들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가령 남대문을 '숭례문'으로, 동대문을 '흥인지문'으로 바꾼 결정에서 보듯이 일제시대에 잘못 명명된 지정명칭을 변경했던 것이나 그 동안 잘못된 관행이나 착오확인 내지 용법의 변경 등으로 그 이름을 바로잡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를 통틀어 단순히 행정구역의 변경만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 준 경우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지금은 충주 땅이면서도 여전히 '괴산'이라는 이름을 차고 있는 '괴산 미륵리오층석탑' 등의 사례에서 여실히 보듯이 말이다. 물론 각 시도에서 관할하는 지방유형문화재의 경우에는 그 절차나 관례가 약간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아주 합당한 사례는 아닌 듯이 보이지만 행정구역의 명칭과 관련하여 문화재 지정명칭이 변경된 사례가 하나 보인다. 지난 2001년 12월 20일에 개최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12차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의 하나인데, '담양 읍내리 석당간'(보물 제505호)과 '담양 읍내리 오층석탑'(보물 제506호)의 명칭이 각각 '담양읍 석당간'과 '담양읍 오층석탑'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지정명칭변경이 받아들여진 것은 "현 소재지가 지정명칭과는 달리 '객사리'와 '지침리'에 있고 또한 '읍내리'라는 행정지명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더구나 두 문화재는 "같은 절터로 속한 것으로 추정되나 하나의 도로를 사이에 두고 행정지명은 달리하고 있다"는 이유도 추가되었다.
말하자면 이 역시 처음부터 잘못 붙여진 이름이니까 이를 바로잡는 절차였을 뿐이었지 달리 행정지명이 바뀌었다고 해서 지정명칭을 변경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단순히 행정지명이 바뀌었다는 이유로만 해당 문화재의 지정명칭을 바꾸겠다는 것은 그만큼 실현되기 힘들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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