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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민족 사찰 소개 >
LA의 작은 타일랜드
왓타이
글 | 스텔라 박
LA에 옮겨놓은 황금빛 사원
노스 할리웃에 위치한 왓타이LA(Wat Thai of Los Angeles)는 남가주에 옮겨놓은 작은 타일랜드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사원, 오렌지색 가사를 입은 승려들, 방콕의 먹자골목 같은 활기찬 주말 장터가 모두 타일랜드를 추억하게 한다.
미국의 한국계 사찰은 불자들의 고령화로 썰렁한 분위기이다. 매주말 법회를 하는 곳도 그리 흔치 않은 실정. 한 달에 한번 열리는 법회에도 20명 이상의 신도가 참가하는 곳이 드물 정도이니 말 다했다.
마치 유럽의 기독교회와 성당처럼, 나날이 사람은 사라져 가고 건물만 훵하니 남아 있는 한국계 사찰들. 어쩌면 우리의 사찰, 그리고 불교계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해답이 LA의 타일랜드식 사찰, 왓타이 LA에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왓(Wat)’이란 타일랜드,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불교 사원 또는 수도원을 일컫는 말이다.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왓따(Vata)에서 왔다.
왓타이 LA는 살인적으로 땅값 비싼 LA 다운타운을 살짝 벗어난, 노스 할리웃 지역에 위치해 있다. 방문을 앞두고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일요일 오후 2시부터 법문이 있고 3시부터는 챈팅이 있단다. 점심 식사 후 바람도 쐴 겸, 101프리웨이를 타고 도착한 왓타이 LA에는 주차장부터 사람들 물결이 가득하다.
차를 세우고 법당 쪽을 향해 가다 보면 방콕의 길거리에 온 것 같은 음식 부스들이 쫙 늘어서 있다. 타이 푸드코트의 메뉴는 꼬치 구이에서부터 팟타이(타이 식 쌀국수), 그린 커리 등 끼니 거리는 물론이고, 바나나 튀김, 찹쌀과 망고, 타이 스타일의 아이스트와 아이스커피 등 디저트까지 정말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다. 한 아낙은 다양한 포장 과자를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은 음식을 구입해 먹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불상 또는 동상 앞에 공양을 바치기도 한다. 불상 또는 동상 앞에 음식물을 바치는 모습도 타일랜드 여행 시에 자주 봤던 장면이다.
이곳에는 매 주말마다 타이 음식 오픈 마켓이 들어선다. 자고로 길거리 음식점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 절에서는 경내에서 고기를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지만 왓타이 LA의 입구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며 동네 주민들과 타일랜드 이민자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은다. 주말 오픈 마켓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고향 음식을 맛보고 주전부리를 구입하는 재미는 팔정도를 따르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발걸음을 절로 향하게 하는 좋은 이유가 된다.
법당 바로 앞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는 노란색 옷을 입은 타이 여인이 마이크를 들고서 간들어지는 타일랜드 대중가요를 부르고 있고, 그녀의 뒤에는 한 남성이 그녀의 노랫소리에 맞춰 키보드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 기분이 동했는지 한 커플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텝을 밟더니, 돌리고 찍고, 난리 부르스를 추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절에서 트로트 노래 반주에 돌리고 찍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혹시 큰스님이 버럭 큰 소리로 호통을 치시면서 “지금 뭣들 하는 것이여?” 하고 야단을 치시지는 않을까? 하기야 요즘 한국 절에서는 산사 음악회도 하고 여러 문화행사를 시도하고 있지만… ‘돌리고 찍고’는 또 산사음악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인지라…
법당 안쪽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은 왓타이 LA 신도들의 자녀들을 위한 공간으로, 방마다 연령대 별 클래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유치원생 방에는 6세 안팎의 아이들이 앞의 여교사 둘이 지도하는 가운데 노래와 율동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아하니 꼭 한국의 ‘뽀뽀뽀’와 같은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교사들은 그 프로그램의 율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숫자는 30 명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들을 맡겨놓고 부모들은 법당에 가서 법문을 듣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 옆 방은 초등학생을 위한 방, 또 그 옆 방은 중학생, 그런 식으로 고등학생, 대학생까지 각 연령대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만나며 나름대로의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로서는 잠깐이라도 아이들로부터 해방되는 것만큼 큰 휴식이 없다. 왓타이 LA는 그 나이 또래 신도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별 큰 신심도 없으면서 휴일이면 꼭 교회를 향하는 후배도 그런 말을 했었다. “언니, 애들 봐주는 데가 최고에요. 잠깐이라도 애들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가장 큰 휴식이고 힐링이거든요.” 대부분의 교회들이 지역사회 이웃들을 끌어모으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베이비시팅(Baby Sitting)이다. 그런데 애들을 봐주면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부처님 말씀까지 가르쳐준다니 부모들은 이처럼 고마운 것이 없는 것이다.
그 건물을 둘러쌓고 있는 담에는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여기저기 벽화로 그려놓았다. 정원도 넓어 야외 행사를 하기에도 좋아보였다. 실제 한 클래스의 아이들이 햇살 아래의 그 공간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왓타이 LA에는 주차공간이 참 여럿 있는데 법당 건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주차장에는 야외 무대가 마련돼 있었다. 동양화 스타일로 표현한 바다와 파도 위에 실루엣으로 표현한 왓타이가 보이고, 야자수와 멀리 할리웃 싸인, 그리고 밤하늘의 불꽃까지 그려넣었다. 가끔씩 이곳 야외 무대에서 왓타이 LA 신도들을 위한 행사가 열릴 터이다.
법당에서 진행되는 어린이 교실
법당 건물
법당 앞에 마련된 야외무대
법당 도서관
법당 내부
법당 내부
법당 건물 지하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요즘이야 인터넷 덕분에 실시간으로 고국의 소식을 전해 듣고 다양한 컨텐츠들을 즐길 수 있지만, 남의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그리웠던 것이 내 나라 말로 된 읽을 거리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좁지도 않은, 아주 괜찮은 크기의 도서관에는 꼬불꼬불 기어가는 듯한 타일랜드 문자로 씌여진 다양한 책들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열람실에는 한 남성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이를 주일학교에 넣어놓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인지, 집에 인터넷이 작동되지 않아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사연은 알 수 없다만 왓타이 LA에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참 많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경내를 돌아보니 약사여래상, 관음보살상은 물론, 배가 불뚝 튀어나온 포대(서대화상)의 조각상도 모셔져 있고, 타일랜드의 역사와 왓타이 LA의 건립에 중요한 인물들의 조각상도 있었다. 조각상 앞에는 입구의 오픈 마켓에서 사온 것처럼 보이는 음식들이 놓여 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불상 앞에 음식을 바치는 문화는 동남아시아인들의 공통된 정서인 듯 보인다.
드디어 왓타이 사원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갑자기 방콕의 사원에 와 있는 듯, 온 몸의 감각이 전율해온다. 입구에 놓여진 커다란 백자 도자기에서 조용히 타들어가고 있는 향이 만들어 낸 효과였다. 알아차림 없는 냄새는 몸의 감각을 일으키며 우리들의 마음을 과거 시간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 감각적 기관을 단속할 때에는 알아차림이 함께 하기 때문에 온전히 현존할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온 몸으로 느꼈다.
사원 내부의 가장 안쪽에는 허리가 홀쭉한 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그 앞에는 여러 개의 작은 불상과 함께 연꽃과 과일 등 공양물이 빼곡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 불상은 타일랜드 본토에서 직접 제작해 옮겨온 것이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법문 시간에는 100여 명의 신도들이 의자를 가져다놓고 앉아 있었다. 도대체 뭐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법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고 오후 3시부터는 챈팅 시간. 모든 신도들이 한 목소리로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맛마붓다사”를 외울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챈팅은 없고 신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왓타이 LA에서 준비한 공양물을 구입해 스님들에게 드리고 있었다. 공양물은 플래스틱 컨테이너에 들어 있는데 필요한 약품과 먹을 거리들로 구성돼 있었다. 미얀마, 스리랑카, 타일랜드 등 동남아시아의 사찰에서 이런 식으로 승려들에게 보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왓타이 LA에서도 똑같은 방식이었다.
신도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은, 오렌지색 가사입은 승려는 공양을 받은 후, 대나무채로 만든 솔을 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신도들에게 뿌려주고 있었다. 양손을 가슴 앞에 합장한 신도들은 거룩한 표정으로 이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잠깐, 스님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스님 곁에 앉았더니 여신도 한 명이 손사레를 치며 나를 끌어내린다. 거칠게 숨을 씩씩 몰아쉬며 “노, 노.”를 외치는 그녀. 결국 그녀가 의미하는 바가 “어찌, 감히 우리 스님과 같은 높이에 앉아?”임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왓타이 LA의 역사와 커뮤니티 내에서의 역할
왓타이 LA는 LA에 살고 있는 타일랜드 이민자들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이민자 등 남방불교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이 모두 찾는 곳이다. 왓타이 LA의 공식적인 이름은 테라바다 불교 센터(Theravada Buddhist Center).
이 웅장한 법당과 여러 건물들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왓타이 LA 역시 그 시작이 있었다.
1970년, 타일랜드의 불교 승려 한 명이 LA에 초대됐었다.
그는 한동안 LA에 머물며 타일랜드 이민자들의 신앙생활을 돕다가 귀국했다. LA의 타일랜드인 불교신자들은 그 승려에게 LA에 타일랜드 스타일의 불교 사찰을 세우자고 부추겼고 그 승려는 불사의 원을 품게 되었다.
같은 해, LA의 열성적인 타일랜드 이민자 재가자 그룹은 ‘타이 아메리칸 불교 연합회’를 조직했고 LA에 다녀가신 그 승려와 다른 2명의 승려들을 LA로 초대했다. 이로써 LA에 타일랜드 스타일의 불교 사찰을 세우려는 안건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3명의 승려들은 LA에 머물렀던 3개월 넘는 기간 동안, 타일랜드 이민자 재가자들과 함께 타일랜드 스타일의 사찰을 건립하는 일을 세세하게 논의했다.
훗날 방콕에 계시던 큰 스님이 LA를 방문하셨는데 그의 방문 기간 동안 타일랜드 학생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직 자신들만의 법당이 없던 터라, 그 학생의 장례 법회가 일본 절에서 열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가슴 아픈 일을 기리는 행사를 다른 커뮤니티의 절에서 치를 수밖에 없었던 사건은, 타이 전통과 의식을 집행하는 타일랜드 사찰에 대한 필요성을 대두시켰고, 하루 빨리 타일랜드 전통 사찰을 세우자는 계획의 기폭제로 작용하게 됐다.
타일랜드 이민자 그룹은 큰 스님과 논의 끝에 왓타이 LA를 건립하기 위한 자금 조성 위원회를 LA와 방콕에서 각각 창립하게 됐다. 1971년 7월, 세퓰베다 블러버드(Sepulveda Blvd.) 선상의 한 주택이 스님들을 위한 요사체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주정부에서는 그 주택지가 사원의 용도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교식 사원을 세우거나 증측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세퓰베다 블러버드 선상에 있던 승려들의 요사체는 비공식적이며 임시적이긴 했지만 미국 내 타일랜드 불교 사원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1971년 12월 22일, 임시 사원이 ‘테라바다 불교 센터(Theravada Buddhist Center, Inc.)라는 이름 하에 캘리포니아 주의 비영리 기관으로 공식 등록되면서 왓타이 LA는 공식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
1972년, 왓타이 LA는 방콕의 부유한 불자의 보시로 현재 장소인 칸타라 스트릿(Cantara St.)에 부지 2.2에이커를 구입해 이전했다. 현재 LA 왓타이 LA 창립위원회의 회장은 그의 아들이다. 1972년 5월 16일, 4명의 승려들이 최초로 이곳에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사원 건축을 위한 기금 모금에 모든 노력과 에너지가 집중되었다.
왓타이 LA 창립 위원회는 타일랜드 전통 방식에 따른 완벽한 수도원을 만들겠다는 비전과 계획이 있었다. 승려들을 위한 거주공간과 경내의 정원, 성전과 법당 등, 여러 건물과 시설을 제대로 갖춘 수도원 복합단지 말이다.
왓타이 LA가 새로 옮긴 장소는 종교적인 건물과 시설 몇 동을 짓기에 충분한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왓타이 LA는 이주 후 오래된 건물 대부분은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몇 채 세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물인 2층짜리 타일랜드 스타일의 법당 초석은 1972년에 처음 놓였다. 이후 법당의 초석은 수년동안 왓타이 LA 신도들의 주의력과 에너지를 사로잡으며 더욱 건축에 마음을 내게 만들었다.
건축 모금 활동을 벌이고 있던 테라바타 센터 위원회에, 조직의 이름을 왓타이 LA로 바꾸자는 제안과 함께 타일랜드 불교 교구의 전통적인 수준에 맞도록 조직을 법적 개편하자는 제안서가 전달됐다. 그래서 1979년 6월 11일,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허가 아래 테라바다 불교 센터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왓타이 LA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타일랜드 스타일의 중앙 법당이 완공되었다. 1979년 10월 21일에는 타일랜드의 불교 수장이 자리한 가운데 지붕 꼭대기를 올리는 기념식이 열렸다. 이 공간은 법회도 열리고 크고 작은 행사도 열리는 등, 다용도로 사용되며 후포사타살라(Uposatha-Sala)라 불린다.
방콕에서는 1979년 12월 26일, 연말을 맞아 타일랜드의 왕과 왕비가 방콕의 왓포(Wat Po, 누워 있는 붓다상으로 유명한 사원)에서 왓타이 LA에 선물로 보낼 불상을 축복하는 기념식을 주재했다. 이 불상은 1980년초 왓타이 LA의 주 법당에 안치됐다. 또한 방콕의 왓프라카에오의 왕실 법당 안의 에
머랄드 붓다의 복사본도 안치됐다. 이는 타일랜드 전체의 수많은 불상 가운데 가장 숭배되는 불상이다.
초석 기념식을 주재하기 위해 다시 LA를 찾았을 때인 1982년 10월 17일, 타일랜드 불교의 수장은 몇몇의 승려들을 데리고 와서 정식으로 왓타이 LA의 승가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왓타이 LA는 타일랜드의 전통에도 맞는 제대로된 종합 사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977년 안거 기간 당시 왓타이 LA에 거주했던 7명의 승려들은 모두 타일랜드인으로 새롭게 법계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안거 기간 동안 거주하는 승려들의 숫자는 그 이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1983년 안거 기간 중에는 새롭게 계를 받은 승려와 3-4개월 동안 임시로 LA를 다녀가는 7명의 승려들을 제외하고 5명의 소임을 맡은 승려들이 있었다.
왓타이 LA에서는 생일, 결혼식, 제사, 장례식 등 크고 작은 의식들이 일년내내 끊이지 않고 열린다. 또한 사월초파일과 성도축일 등 전통적인 불교 축일과 타일랜드 민속 축제와 행사들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준수된다. 요즘에는 연간 약 12개의 축제가 정규적으로 열리고 있다.
불법승의 가르침을 알리고, 타일랜드의 문화, 그리고 왓타이 LA의 사업을 널리 알리고자 왓타이 LA는 두앙프라팁(Duang Pratip)이라는 이중언어로 된 월간지를 발간하고 있다. 물론 타일랜드 언어로 된 기사가 영어로 된 기사보다 훨씬 많다.
불교의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곳에서는 불자들을 대상으로 한 일요일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타일랜드 언어, 타일랜드의 문화, 그리고 불교 가르침을 배우기 원하는 이들을 위한 학교이다. 이 학교에서는 타일랜드인들, 미국인들, 그리고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일반적인 명상 트레이닝도 해주고 있다. 야채와 과일을 이용한 푸드 장식 등, 어른들을 위한 직업 학교도 열려 있다. 왓타이 LA의 마당은 정치인들의 선거운동 장소로도 이용된다. 타일랜드에서는 이런 일이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커뮤니티에 대한 봉사 활동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타일랜드의 여왕은 왓타이 LA를 여러 차례 방문해 LA의 타이 커뮤니티를 기쁘게 해주었다. 여왕은 또 왓타이 LA에 총 4차례, 모두 5천 달러의 보시금을 내기도 했다. 이 보시금은 타이 커뮤니티를 움직여 왓타이 LA의 건립을 완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 왓타이 LA는 방콕의 출랑곤콘 대학(Chulalongkorn Universit)과의 협업으로 타이 언어와 문화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타이의 교육자들이 6월에서 9월까지 미국에 와서 이곳에 머물며 미국에 사는 타이 학생들 30-40명에게 여름기간 동안 태국의 문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9월말부터 이듬해 6월까지는 주말 타일랜드 학교도 운영되고 있다.
한국 불교계, 왓타이LA에서 배워야 할 것들
타일랜드 본토의 현재 인구는 약 6500만이고, LA에 거주하고 있는 타일랜드인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이민자들 숫자보다 낮은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타일랜드는 대표적 불교국가 가운데 하나로 전 인구의 93.2퍼센트가 불교를 믿고 있다. 그래서일까. 타일랜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자기애(Self-Compassion)가 높은 나라로 꼽혔고 인구 당 싸이코패스의 비율 역시 가장 낮은 나라로 나타났다.
한국의 전체 인구는 5천만이고, LA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는 6만 정도로 추산된다. 한국인들의 인구 대비 불교신자의 비율은 20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그러니 이민 사회의 사찰이 소규모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무리 여러 수치들이 한국 불교계가 쇠퇴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국교를 유교로 했어도 억누룰 수 없었던 불교가 다시 한 번 이 땅에 꽃피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다.
왓타이LA는 주말마다 왓타이 LA 가든에서 벌어지는 오픈타이 마켓으로 주변의 타이 공동체를 끌어들였다. 또한 일요일 법회 때에는 재가자 공동체에서 가장 활동적으로 일해야하는 연령대들이 갖고 있는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그들이 사찰의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승려에 대한 보시와 승려의 축복식 등 이민자들의 종교적 필요를 채워준다. (남방불교에서는 승가에 대한 보시가 복을 받는 큰 수행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왓타이 LA를 따라하고자, 한국계 사찰들이 법당 내에서 고기를 굽고, 장사판을 만들 필요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연령대 그룹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보다 많은 재가자들을 사찰로 모이게 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사람이 모이면, 에너지가 모이고, 돈이 모이고, 불사가 일어난다. 그 때를 위해 재가자들을, 깨달은 이가 보여주셨던 바른 길(팔정도 수행)로 인도할 지도자들이 준비되어져야 한다.
어쩜 이민 사회의 한국 사찰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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