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런닝 속옷
자주 가는 목욕탕. 내 취미 생활이다. 옷을 벗다보니 런닝 속옷에 큰 구멍이 나있다. 언제 이런 구멍이. 그러고보니 며칠 전 이다. 걸을 때마다 겨드랑 밑이 간지러웠다. 꾹 참으려니 더욱 신경이 쓰였다. 가다말고 어느 이름 모를 건물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진실을 살폈다.
런닝 실밥이 터져 너덜너덜 하다. 실밥이 걷는 율동에 맞춰 붓질하듯 겨드랑이 털을 살살 놀려댄 것이다. 이놈을 살려 죽여 망설이다 집에 가서 결판을 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더욱 세차게 가려웠다. 녀석이 잘못인데 외려 결판을 못 본 내 탓이 자꾸 는다.
눈 깜짝 할 1초 내 일을 끝내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리란 자신감이 밀려 왔다. 순간 가던 길을 멈추고 손을 어깨쭉지에 쑥 밀어 넣었다. 빚쟁이 멱살 잡듯 실밥을 꼭 잡고는 단숨에 잡아 댕겼다. 욱하는 실밥 비명소리는 꽤 컸다. 속이 다 시원했다. 손을 펼치니 한 줌 잡히는 실밥이다. 국밥 트림 소리도 같이 들렸다.
그런 녀석은 혼자 순직한 것이 아니었다. 큰 구멍은 녀석이 일군 터전이 된 셈이다. 런닝 속옷도 운동복 실밥 터지는 만큼이나 잦다. 땀이 차서 그런지 꼭 터져도 겨드랑 밑이다. 그런데 예전엔 구멍 난 옷이 창피했는데 그런 마음이 전혀 안 든다. 남이 볼까 두려워 감추거나 자리를 피할 마음이 안 생긴다.
요즘 나는 구멍 난 옷을 자주 애용한다. 그 바람에 아내와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김치 맛 들듯 착용감이 들 무렵 낡았다거나 실밥이 터졌다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는 아내다. 구멍 난 옷은 숫제 입지를 못하게 한다. 아마 이 속옷도 조만간 아쉽게도 당연 거사를 당할 것이다. 구멍 난 옷이 왜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지 나는 의아하다.
구멍 난 옷쯤 가지고 요즘 빈부를 말하지 않는다. 남들이 측은하게 보면 또 어떠한가. 구멍이 나도 안 보이는 겨드랑이니 큰 문제꺼리도 아니다. 내 편한 대로 구멍 난 옷의 특혜를 누려볼 만하다. 풋풋한 내 냄새가 풍기고 더럽혀도 덜 미안하고 오히려 마음의 여유까지 얻는다. 구멍도 내가 만든 자산이고 구멍이 별것도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도 내가 키운 결실이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큰 관문 하나가 내 가슴속에 더 들어 있는 것만 같다.
창피하거나 감출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당연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없다. 초라한 것이 정갈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이로 빈부를 가늠했다는 것이 가소롭기 까지 하다. 더 낡은 양말의 목을 도려내 덧대어 신던 한 시절이 있었지만 왜 그리 부끄럽고 창피하다 여겼는지 모르겠다. 창피함이 하나 줄어드니 당당함이 자리를 잡는다. 정작 창피함은 옷이 아닌 그 속에 가려진 구멍 난 망상에 있다.
창피한 노릇인데 창피를 모르고 사사로이 지내다 자신을 몽땅 잃은 사례가 많지 않은가. 오늘도 시국은 망측하기 이를 데 없어 명사들의 창피함이 줄을 잇는다. 어쨌거나 실 밥 같은 오점이 구멍이 되고 망조가 든 다는 사실은 옷이나 사람이나 같지만 헤진 옷의 느낌은 다르다. 망측할 정도가 아니라면 구멍 난 속옷 권해보고 싶다. 정말 마음이 구멍만큼 뻥 뚫리고 다른 세상도 쉬이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