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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들고 싸우지도 못하고 몸도 부서지고
증 언 자 : 김영봉(남)
생년월일 : 1961(당시 나이 19세)
직 업 : 무직(현재 운전교습소)
조사일시 : 1차 조사(1989. 1. 20)
2차 조사(1989. 1. 27)
개요
장성에서 광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5·18시위에 참가한 김영봉 씨는 시위차에 탑승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를 했으나 돌아다닌 거리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다른 부상자와는 달리 공수부대에게 직접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니고 21일 어느 아파트 옥상에서 총을 들고 보초를 서던 중 고압선에 감전되어 부상을 당했다. 결국 주도적인 시위참여자로 몰려 상무대에 끌려가 엄청난 고문과 구타를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지금은 생활능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다.
성장과정
나의 형제는 열한 명이다. 위로 내리 여섯 분의 누님이 계시는데 누님들은 큰어머님의 소생이다. 딸만 여섯을 본 아버님이 아들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의 어머님을 둘째부인으로 얻으셨다.
어머님은 나를 낳으셨고, 뒤늦게 겨우 아들을 보신 아버님은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셨다 한다.
그런데 내가 태어날 무렵 임신중이었던 큰어머님이 내게는 불행하게도 바로 며칠 후 아들을 낳으셨다. 갑자기 나의 존재는 개밥의 도토리가 되었다. 큰어머님이 아들만 낳지 않았어도 장남으로 금지옥엽 길러졌을 텐데 아버님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신 것이다.
아버님은 광주에 살고 어머님은 장성에서 혼자 나를 키우셨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니 어머님은 나를 큰집으로 보내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극구 주장하셨다.
결국 광주에 올라와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어린 마음에도 큰집에서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눈칫밥을 먹는 그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결국 나는 그 생활을 못 견디고 장성으로 내려갔다.
어머니 곁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그렇게 장성농고를 졸업한 뒤 매형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농장관리사로 일을 했다. 고등학교 때의 내 전공은 축산이었는데, 동물을 다루는 내 솜씨가 웬만한 수의사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매형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그곳에서 계속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일하고 싶지도 않았다.
1980년 4월경 어쩔 수 없이 어머님과 같이 광주로 올라왔다. 내 나이 19세 때였다. 어머님과 계림동파출소 로터리 부근에서 사글세를 얻었다. 호적이 큰어머님 밑으로 되어 있어 어머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모님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광주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5·18을 맞게 되었다. 아직 일자리를 못 구하고 있을 때였다.
시위대에 참가
1980년 5월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니 거의 집에 있었다. 거리는 시위군중들로 들썩거렸지만 정치나 주변의 그런 일에 대해 특별한 소신도 없고 또 뚜렷한 계기도 없어서 시내에 별로 나가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별 흉흉한 소문이 다 돌았다. 주위 사람들의 겁에 질리고 호기심에 가득 찬 얘기들은 분노보다는 원초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한참 시위가 격화되고 군인들이 살벌하게 행동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장성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아니면 결벽증 때문인지 문득 그곳에 외상값을 남겨두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장성 삼거리의 튀김집인데 370원 정도의 외상값이 있었다. 그래서 그걸 갚아야겠다 생각하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갔다. 터미널로 가는 거리마다 무장한 군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한마디로 살벌했다. 하지만 그 군인들은 지나가는 나를 잡거나 못 가게 제지하지는 않았다.
장성에 가서 외상값을 갚아주고 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버스가 무등경기장에서 멈췄다. 운전사가 군인들 때문에 더 갈 수 없으니 내리라고 했다.
거기서 내리니 앞이 막막했다. 장성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광주시내 지리는 하나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때는 가진 돈도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택시를 무조건 세우고 사정을 했다. 도착하면 돈을 드릴테니 태워달라고 해도 그냥 가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마음씨 좋은 운전사 아저씨를 만났다. 계림동 로터리 부근에 오니까 군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데 계림동 로터리 앞에서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는 여대생처럼 보이는 아가씨를 군인이 잡았다. 어깨까지 닿는 긴 머리의 아가씨였다. 군인이 갑자기 머리를 잡으면서 사정없이 뺨을 때리고 태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공포에 질려 무의식적으로 앉아 있던 택시 뒷좌석에서 몸을 구부렸다. 그런 나를 보고 택시운전수 아저씨가 그대로 태연하게 앉아 있으라고 했다. 몸을 그대로 세우고 앉아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한 나는 무서워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변 동네에서 양복점인가를 하는 아저씨가 군인에게 무지하게 맞았다는 얘기가 동네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아마 이틀 후였을 것이다. 집에 꼼짝 않고 있는데 집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엄청나게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군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 몰려갔다가 군인들이'우' 몰려오고, 집 앞길은 아수라장이었다.
서서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퍽하고 뒷덜미를 잡았다. 군인 3명이 시위대열이 흩어진 후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다 나를 잡은 것이다. 그때 파마를 하여 곱슬머리였던 내가 학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너 학생이지?"
하며 다짜고짜 끌고 가려고 했다.
순간 그 자리에서는 이성적인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정없이 사투리를 쓰며 약간 부족한 촌놈처럼 행동했다. 그랬더니 군인 한 명이 그냥 가라고 했다. 그래도 다른 두 명은 끌고 가려고 했다. 그때 마침 어머님께서 뛰어나와 내 자식을 왜 끌고 가느냐며 악을 쓰면서 나를 잡아끌었다. 다행히 군인들이 놓아주었다. 그 일을 당하고 그날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20일쯤 되었을 때였다. 그날도 밖에 나가지 않고 저녁을 먹은 후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실업야구를 중계해 주고 있었는데 순간 전기가 나갔다. 사방이 깜깜해졌다. 나는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MBC방송국이 불에 타고 있다고 했다.
한걸음에 MBC방송국 앞으로 갔다. 정말 방송국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방송국 옆에는 전자제품 대리점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불이 옮겨붙을까봐 사람들이 전자제품을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불에 타는 MBC방송국을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계엄군들이 장갑차를 타고 최루탄을 쏘면서 몰려왔다. 장갑차는 길에 쌓아둔 가전제품을 깔아뭉개고 앞으로 전진했다.
주변 사람들이 흩어졌다. 나도 사람들 틈에 끼여 MBC방송국 건너편 골목으로 뛰었다.
장갑차에서는 계속 빠방방 소리가 나며 최루탄이 터졌다. 한참을 달리다가 신발이 벗어져서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피융 소리가 나며 내 앞에서 달리던 사람이 거꾸러졌다. 그때 그 사람이 총알을 맞은 것인지 돌멩이를 맞았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일어나 뛰었다. 그 부근이 천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들 틈에 끼여서 가고 있는데 몇 사람이 소주병으로 만든 화염병을 가지고 다니는 게 눈에 띄었다.
중앙국민학교 옆 육교 위에서 한 여자가 방송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한 남자가 확성기를 받쳐주고 있었는데 그 옆에 다른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주변에 시민들은 몇 명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송을 하고 있던 여자는 전옥주였다.
전옥주는,
"내 동생이 공수부대의 손에 죽었다."
는 내용의 방송을 했다. 조금 후 사람들은 육교에서 내려와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계속 사람들이 불어났고 나도 그 대열을 따라 운암동 고가도로 부근에 가니 시민들이 엄청나게 모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울에서 학생들이 많이 왔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렇게 시위군중이 불어나니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며 해산을 시도했다. 사람들이 흩어지는데 방송을 하던 전옥주는 최루탄이 핑핑 날아다니는 그 매운 거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방송을 계속했다. 독한 여자였다. 나도 부근 가정집에 들어가 물로 최루탄을 씻어내고 다시 나왔다.
얼마 후 시민들이 다시 모였다. 시위는 계속되었고 나는 가두방송을 하는 전옥주의 앞에 서서 각목을 휘두르며 길을 터주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니 누군가 픽업트럭을 가지고 왔다. 가두방송을 효과적으로 하도록 도와주려고 가져온 것 같았다. 전옥주를 비롯하여 방송을 하던 몇 사람만 차에 탔다. 내가 앞에서 길을 터주고 있으니 주동자로 보였는지 차로 올라타라고 했다.
차 위에서 한참 시위를 하고 있는데 낯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그곳은 시민관 앞이었다. 집에 가까워서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차에서 내려 시위대열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은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내내 담벽에 바싹 붙어서 걷고 있는데 계림동파출소 앞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알 수가 없어 순간 긴장을 했다. 사람들 속에서 아주머니 목소리가 났다. 군인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겠다 싶어 보호용으로 각목을 하나 주워들고 그쪽을 피해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니 어머님이 금방 문을 열어주었다. 혹시 내가 쫓겨오기라도 할까봐 문 옆에 앉아 계신다고 했다.
21일 아침에는 어머님이,
"이 난리통에 언제 굶게 될지 모르니 어서 일어나 밥 먹어라."
하시며 깨웠다.
아침 11시경 밥을 먹은 뒤 밖으로 나갔다. 그날은 어제 MBC방송국 앞에서 신발이 벗어져 넘어진 생각이 나서 한 여름인데도 부츠를 신고, 넘어질 때 다친 손바닥을 보호할 겸 장갑까지 끼고 나갔다.
시민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꽂은 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계림동 로터리에서는 계속 "시민들은 모입시다."라는 가두방송을 하고 있었다. 지프차가 지나가며 나더러 타라고 손짓을 했다. 그 차에 올라타 광주시내를 돌아다녔다. 거리에는 시민들이 늘어서서 시위차가 지나가기만 하면 계란, 김밥, 요구르트 등을 올려주었다. 돌아다닌 길은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지만 광주천을 따라 방림동, 양동까지 나간 생각이 난다. 광주역 로터리 분수대에는 차가 처박혀 불에 타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운전수가 운전하는 대로 돌아다녔다.
온 시내를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오후쯤 화순으로 향했다. 화순 가는 길목 검문소에 이르니 검문소는 이미 비어있었다. 유리창은 다 깨져 있고, 들어가보니 순경모자와 경찰봉이 있었다. 나는 그 순경모자 위쪽의 끈을 내려 턱에 걸어 쓰고 곤봉을 들고 돌아다녔다.
탄광에도 다녀온 생각이 나는데 누군가가 화약 떡밥을 한 웅큼 들고 왔다. 모조인지는 모르지만 안전핀이 달린 수류탄을 갖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광주시내로 들어오니 몇 사람의 시민들이 총을 들고 다녔다.
그리고 군용트럭이 시체를 싣고 다니던 것이 생각난다. 내가 수창국민학교에 다녔던 탓으로 낯익은 아세아극장 부근이었다. 그 시체는 18, 19세의 남학생이었는데 총을 맞았는지 온몸이 시뻘갰다. 하얀 광목천으로 온몸을 둘둘 말아놨는데 얼마나 피가 흘렀는지 전체가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처참했다.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군용트럭 앞 보넷에 시체를 올려놨었다. 검정색에 가까운 국방색의 차와 시체의 시뻘건 색이 어울려 너무 섬뜩했다.
그 트럭에서는 계속 방송을 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의 형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모입시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분을 이기지 못해 퍽퍽 우는 사람도 있고, 모두가 공수부대에게 이를 갈았다.
그 광경은 나를 참지 못하게 했다. 공수부대를 다 때려죽이고 싶었다.
나도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지리를 몰라서 어디를 다녔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든 온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세아자동차 공장에도 갔다 온 기억이 난다.
약간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차를 더 가지러 가자며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그곳에 가니 이미 차를 다 분해해 놓아서 갖고 올 수가 없었다. 거기서 가스차로 옮겨 타고 그 차의 위쪽 구멍 뚫린 데로 고개를 내밀고 서 있는데 옆사람이,
"전선 조심해라."
하고 소리쳤다. 하마터면 감전될 뻔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다 둘러보고 밖에 나오니 외신기자들이 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다녀온 후 다시 지프차로 옮겨 탔다. 시내 거리는 학생, 시민, 구두닦이 등 남녀노소를 망라한 엄청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광주에 사는 사람들은 다 나온 것 같았다.
시민군으로 나서다
저녁 무렵이 되니 사람들이 광주공원으로 모이라고 했다. 공원에서는 총을 나눠주었다. 시간은 잘 모르겠는데 거리는 온통 깜깜했다. 1미터 전방도 안 보일 만큼 어두운 거리를 배급받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군용지프차를 타고 다녔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당시 시민군들끼리는 암호가 있었다. 거리거리마다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는데 암호를 대면 길을 터주었다.
그 넓은 광주시내가 온통 우리 세상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똘똘 뭉친 하나였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지프차가 어디로 구불구불 들어갔다. 차가 속력을 내지 못하고 가끔 튀는 것이, 거리에 요철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어떤 아파트 단지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 경황에도 살아야겠다는 욕심으로 바지 양쪽 호주머니에 실탄을 가득 채웠다. 부츠 속 양말에까지 탄창을 끼워서 온몸이 묵직했다. 그렇게 실탄을 가득 메우니 무거워서 바지 지퍼가 벌어졌다.
함께 있던 시민군이 이 아파트에서 세탁소를 하는 친구 집이 있다며 거기서 바지를 얻어 입자고 했다. 아파트 건물 3층으로 올라가니 세탁소가 있었다. 친구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둘이서 안으로 들어가 바지를 하나 골라 입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안 돼!"
다림질대 밑에 천조각을 담은 상자에서 사람이 나왔다. 총알을 피하기 위해 거기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보초를 서기 위해 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같이 갔던 시민군은 담요를 얻어오겠다고 해서 내가 먼저 올라갔다.
광주시내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거리는 불을 켜지 않아 어디가 어딘지 하나고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카빈총을 들고 있었다. 보초를 서기 위해 총을 비스듬히 드는 순간이었다. 뜨끔했다. 총구가 고압선에 닿아 감전된 것이다. 순간 죽었구나 싶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피가 배꼽 쪽으로 몰리는 듯 몸이 뻣뻣해졌다. 그대로 5층 옥상에서 떨어져버렸다. 난간에 걸려 허리를 다치고 머리를 땅에 찧었다. 퍽 소리를 내며 떨어지니 부근에서 보초를 서던 시민군들이 놀라서 모여들었다. 시민군들이 나를 그 세탁소 방으로 옮겼다.
그때 면장갑 위에 오토바이 탈 때 끼는 손가락 없는 장갑까지 끼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 타서 손에 붙어 있었다. 부츠 안의 양말도 타서 살에 붙어 있었다. 시민군들이 칼과 가위로 살에 붙은 장갑과 양말을 잘라냈다. 그 후 바로 지프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리니 전남대병원 접수처 약 받는 곳 옆에 누워 있었다. 누울 공간도 없을 만큼 병원은 환자로 가득 찼다. 병원은 죽은 사람 가족의 통곡 소리, 환자들의 비명 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 병원 안은 총상환자가 엄청났다. 허벅지에 뚫린 구멍이 보일 정도로 끔찍한 총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누워서 이틀이 지난 23일 B동 10층에 있는 화상환자실로 들어갔다.
내가 누운 맞은편에는 4세짜리 꼬마가 누워 있었다. 부모와 함께 총을 맞았는데 그 꼬마의 엄마는 병원으로 옮긴 후 죽었다고 했다. 그애가 계속 엄마를 찾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울었다. 그애를 보니 나는 정말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 상처의 고통을 참아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양쪽 손을 다 침대에 묶어놓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은 이런 나의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밥도 떠 먹여주셨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치료과정의 고통이었다. 전기감전으로 인한 화상은 다른 상처와 달리 수술을 하여 치료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하게 화상을 입어 타 들어간 상처에 딱지를 떼어내야 했다. 그때마다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고 고통이 극심했다. 한번은 딱지를 떼는데 핏줄을 잘못 건드렸는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나를 치료하던 의사는 당황하며 지혈을 하지 못했다. 그때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그 후로 심한 빈혈이 생겼다.
며칠이 지난 후 갑자기 벼락치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들이 도청을 장악하던 날이었던 모양이다. 총소리에 놀라 밖을 내다보니 아래가 다 보였다. 병원 근처 도로에는 새까맣게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군인들이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이는지 벽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무 위에도 올라가 있었던지 원숭이처럼 날쌔게 내려오는 군인도 보였다.
온 병원에 긴장이 감돌았다. 어머니는 내가 총에 맞을까봐 창문 바로 밑으로 나를 밀어주셨다. 간호원이 엄청나게 많은 수면제와 주사를 놓아주었는데도 총소리로 인한 공포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날이 새니 공수부대원들이 병원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환자실에는 2명의 공수부대원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저 공수들은 전라도 출신이라고 말했다.
악몽의 상무대
입원한 지 한 달이 지난 후 갑자기 병원측에서 퇴원을 하라고 통고를 보내왔다. 왼쪽 엄지손가락이 썩어가 형태가 없을 정도로 뭉개지고 걷지도 못하는 나에게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마침 어머님이 반찬을 가지러 집에 가셔서 혼자 있었다. 옆의 환자들이 왜 그러냐며 항의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옷도 없어서 환자복을 입은 채 저녁식사도 못 하고 앰뷸런스를 타고 통합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검사를 했다. 조사를 받고 병실로 가니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교수, 스님, 목사, 지금의 청년동지회 사람들, 총에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된 사람,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정신이상이 된 어린애까지 엄청났다. 그 정신병에 걸린 어린애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있는 것으로 안다.
며칠 있으니 전옥주하고 다른 여자 둘이 들어왔다. 간첩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다가 맞아서 위아래로 피를 쏟아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며칠 치료를 받다가 상무대로 이송되었다. 한마디로 상무대의 생활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악몽이었다. 지금도 어머님은 내게 상무대에서의 생활을 물어보시지 못한다. 내가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다가 정신이상이라도 될까 우려해서 그러신다.
그곳에 수감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헌병들의 노리갯감이었다. 손으로 아무나 지적해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 잘 부르면 잘 부른다고 때리고, 못 부르면 못 부른다고 때렸다. 누가 어머니 노래를 부르니 우리 어머니 생각나게 왜 그런 노래를 부르냐고 또 때렸다.
날마다 불러내서 조사를 하고 말 한마디만 다르면 두들겨팼다. 거기다 몸에 문신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무자비하게 굴었다. 그곳에서 인권이니 인격이니 하는 말은 개나발이었다.
식사 중에도 구타의 연속이었다. 밥을 먹는 시간이 정해졌는데 조금만 늦게 먹어도 밥그릇이 엎어지고 턱으로 군화발이 날아왔다.
우리에게 식사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사람들은 항상 허기에 시달렸고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마루 틈새에 끼인 더러운 밥풀 하나도 서로 먹겠다고 다투었다.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때리는 아귀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더 먹기 위해 치고받는 짐승들만 있었다.
그곳에서는 취침시간 외에는 항상 정좌를 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나는 엉덩이는 살이 없는데다 온몸이 만신창이어서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시선은 정면에 두고 있어야 했는데 눈길을 조금만 돌려도,
"드럼통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며 두들겨팼다. 게다가 화장실에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화장실에 갈 때는 항상 다른 사람을 한 명씩 데리고 가야 했다. 경례를 하고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가라고 하기도 하고 못 가게 하기도 했다. 못 가게 하면 어쩔 수 없었다. 옷에 싸든지 참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조금만 잘못해도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게 하여 곤봉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맞을 때마다 전기가 짜릿짜릿 흐르는 것 같았다.
하루는 별 두 개 단 놈이 왔다. 우리 앞에서 어려운 일이나 개선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우리는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누가 한마디라도 하려고 하면 워커가 여지없이 허벅지에 박혀왔다. 그놈들은 우리를 심심풀이 상대로 여기고 하고 있었다.
그런 날들이 며칠 지나고 현장검증을 한다며 보안대 놈들이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부상을 당한 아파트를 기억해 내지 못하자 그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놈들은 내가 도망이라도 갈 것으로 생각해서인지 온몸을 포승으로 묶어 데리고 나갔다. 경찰 지프차에 타고 돌아다녔는데 내가 감전이 된 아파트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특징을 말해 줘도 어느 아파트인지 보안대 애들도 몰랐다. 결국 그곳을 알아내지 못했다.
보안대 애들이 나보고 어머니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라고 집에 데려다주었다. 집에 가보니 보안대에서 내가 살던 집을 다 뒤진 모양이었다. 노트란 노트는 다 뒤적여보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내가 총을 들고 있다가 다쳐서 아마 좌경서적이라도 나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지프차 안에 앉은 채 어머니의 얼굴을 잠깐 보고 다시 상무대로 들어갔다. 계속 그곳에 있으면 모르는데 밖에 나와서 평화롭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어머니 얼굴까지 보고 나니 다시 들어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렇게 고문보다 잔인한 현장검증을 두 번인가 세 번인가를 나왔지만 내가 부상을 당한 아파트는 끝내 찾지 못했다.
나는 상무대 5호실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내가 헌병놈에게 잘못 보인 모양이었다. 나오라고 하더니 5파운드짜리 곡괭이와 물을 들고 왔다. 전기감전으로 손이 뭉개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밖에 있는 그물처럼 생긴 철창을 타라고 했다.
철창에 발을 딛고 올라서니 그 곡괭이 자루로 '물빳다'를 때리기 시작했다. 손이 으깨어져 철창을 잡을 수도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54대를 때리고 나더니 헌병 놈이 자기 손에 물집이 생겼다며 나더러 악질이라고 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와서 누워 있자니 도청 앞에서 본 시체와 전남대병원에서 봤던 시체가 떠오르며 차라리 그들이 부러웠다. 부모님이랑 동생들도 보고 싶었고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회의가 생겼다.
몸은 엉망이 되어 모든 생리적인 기능이 멈춰버린 듯했다. 대변도 나오지 않고 식사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내 밥 때문에 날마다 싸움이 벌어졌다. 그렇게 허기지게 생활을 하는 곳에서 한 사람분의 식사가 남으니 그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겠는가.
그 상태로 일주일 정도 지나니 헌병들이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통합병원으로 갔다. 혹시 치료를 해주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들은 양동이에 하이타이 물을 가득 들고 와 항문에 호스를 연결하여 그 물을 처넣기 시작했다. 양동이 절반 정도의 하이타이 물이 들어가니 대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겨우 기어서 화장실로 가 창자를 제외한 몸 안에 모든 찌꺼기를 물 한 방울까지 위아래로 다 뿜어냈다.
그렇게 치료도 하지 않고 상무대로 다시 갔다.
상무대에 다시 오니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치료용으로 나눠주는 미제 마이신을 모으기 시작했다. 같이 있던 이름도 모르는 시민군에게만 말을 하고 그의 약까지 같이 모았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식사는 못 했다. 3, 4일이 지난 후 18알의 마이신이 모였다. 눈을 꾹 감고 약을 털어넣었다. 처음에는 아무 이상이 없더니 30분 정도가 되니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때가 취침시간이었는데 이를 악다물고 엎드려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그 시민군이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약을 먹었다고 헌병한테 말했다. 그 헌병은 제대를 일주일쯤 남겨놓은 병장이었는데 다른 헌병들에 비해 우리에게 잘 대해 줬다.
그 헌병이 나를 밖으로 데려다놨다. 찬바람을 쐬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방 넘어갈 듯 숨이 꼴깍꼴깍했다.
이런 나를 보고 같이 있던 한 스님이 안 되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내 앞에서 뭐라고 염불을 외우면서 두 손을 비비더니 그 손으로 온몸을 마사지해 주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지압을 해주는데 그 손바닥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아마 심령술의 일종이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니 정신이 가물거리고 곧 넋을 놓을 것 같던 몸이 개운해지고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내가 좀 괜찮아지니 헌병 김병장이 소금물을 바가지에 담아왔다. 그걸 마시고 약을 토해야 살 수 있다며 마시라고 했다.
사람의 목숨이 질긴 것인지 더러운 것인지, 죽겠다고 약을 먹었으면서도 나는 그 물을 받아서 마셨다. 그 물을 마시고 토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4일 정도를 아무 것도 안 먹었으니 나올 게 없었다. 하이타이 물에다 그렇게 소금물까지 마시고 내 위장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도 위장병으로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있다. 그전에는 술고래였는데 지금은 술 한 잔만 마셔도 금방 토해 버리고 만다.
그런 몸으로도 계속 조사를 받으며 날마다 죽을 곤욕을 치렀다. 천막에 처박아놓고 원하는 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팼다. 말이 좋아서 구타지 그것은 살인행위였다.
게다가 우리들 내부에서는 피부병이 만연했다. 그해 여름은 정말 무척 더웠다. 건강한 사람들도 겨드랑이 같은 곳이 물러지고 진물이 흘렀다. 하필 그때는 옴까지 돌아서 모두들 죽을 곤욕을 치렀다. 헌병들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우리를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듯한 목욕이라는 걸 시켰다. 목욕 시간을 1분을 주었는지 2분을 주었는지, 물 묻히고 비누칠하면 끝이라고 했다. 비눗물을 씻어내지 못해 피부병은 더욱더 심해졌다.
결국 온몸에서 고름이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감전당한 상처가 아물지 않아 썩어 들어가고 온갖 피부병에 구타로 인한 출혈까지 겹쳐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살았다.
한번은 다른 감방에 있던 사람이 조사를 마치고 나오며 꽁초를 주운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것을 피우려고 화장실 전등에 스파크를 일으키다 감전이 됐다. 어디로 데려갔는데 병원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내다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물어보거나 항의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고통스러운 일상으로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고 나니 전두환이 취임한다며 특사로 나가게 될 것이라 했다. 그날까지도 교회로 끌려가서 책을 받치는 판대기에 팔꿈치를 괴고 엎드리라고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워커발이 날아왔다. 그렇게 지옥같은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었다. 거기서 꼭 죽을 것 같더니 그래도 밖에 나오니 살았다 싶었다.
나와서 긴장이 풀리니 온몸이 아팠다.
위장병에 합병증 증세가 나타나고 허리를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새끼손가락은 썩어서 떨어져나갔고, 옥상에서 떨어질 때 다친 머리는 윙윙 울렸다. 진통제를 계속 끼고 살았다. 밥보다 약이 주식이 되어버렸다. 위장약에 빈혈약 등 약이 떨어질 때가 없었다. 길을 가다가 그냥 스르르 쓰러져버리기도 했다. 사람 사는 생활이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1983년에 결혼을 했다. 5·18 때 부상당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식도 올리지 못한 채 혼인신고만 하고 같이 살았다. 지금은 아이까지 둘이 생겼는데 아내는 아직도 나보고 농담으로 사기꾼이라고 한다. 내가 5·18 때 부상을 당한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며 말이다.
가끔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며 발작을 하니 아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만하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가끔 내 아이들까지 던져버린다고 한다. 나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 내 아이들은 더욱 예뻐 죽을 지경인데 그렇게까지 발작을 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놀랐다. 아마 상무대에서 받은 충격들이 반사적으로 폭발을 하는 모양이다.
하도 던지고 때리고 깨부숴대니 내가 자동차 운전교습소를 내고 있는 동네 부근에서는 방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학원 안방에서는 어머님이 사시고 교도소 부근에 사글셋방을 얻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산다.
처음에는 2평도 못 되는 학원 안방에서 살았는데 아이가 하나 더 생기니 너무 좁아서 살 수가 없었다.
자동차 운전교습소를 차리게 된 것은 상무대에서 나온 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집중할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기술서적을 사다가 공부를 하여 운전면허 1종, 대형, 트레일러, 포크레인, 기중기, 지게차의 면허증을 땄다. 면허증을 땄지만 일을 할 수가 없어 학원(운전교습소)을 차린 것이다. 그것도 명색이 학원이라고 이름은 내걸었지만 다른 자동차 운전교습소의 이름만 빌린 것으로 보통 복덕방보다 더 좁고 보잘 것 없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소속된 학원에 소개시켜 주고 구전을 받는 것이 수입이다. 그것으로는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없어 아내가 파출부로 나가 돈을 번다. 잘 해주는 것도 없이 못할 짓을 너무 많이 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아버님과의 불화는 더욱더 나를 괴롭혔다. 민정당에 몸담고 계시는 아버님은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는데 나의 시위 전력이 해가 될까 싶어서 부상자회 활동도 못하게 하신다. 게다가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죄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상무대에서 조서 쓰는 과정에서 그렇게 날조된 모양이었다. 아버님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아예 포기했지만 그래도 너무한다 싶을 때가 많다.
작년에는 정부에서 건강진단을 실시한다고 해서 검사를 받으러 갔다. 기독병원에 가니 위투시와 허리 엑스레이를 찍었다. 원장이 허리에 이상이 있다며 약을 처방해 주고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이틀 후 시에서 지정한 건강관리협회에 갔더니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허리에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왜 병원들마다 말이 다르냐고 했더니 일주일 후쯤 전남대병원에서 특수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연락이 왔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려주지도 않고 약을 두 번 주었다. 간장약과 신경통약이었다. 그 뒤로는 약을 타가라는 말도 없고 연락도 없었다.
그동안 약은 계속 사비로 사 먹었는데 아이들까지 독감에 걸려 병원에 가야 했다. 그동안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의료보험카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시에 가서 5·18 부상자에게 발행하는 '특수 이재민 의료보험카드'를 만들었다. 나도 감기에 자주 걸려 의료보험카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의료보험카드를 들고 병원에 가면 사람 대접을 안 해준다. 마지못해서 진료를 해주고 내주는 약을 먹으면 잘 낫지도 않는다.
남들은 급수 측정도 되어 있어 보상금도 탔다는데 나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며칠 전에는 시에서 나온 진단서를 보니 당시 입원했던 전남대병원, 통합병원의 진단서와 달랐다. 전남대병원 진단서에는 전기화상(양쪽 손발, 좌쪽 제5지 절단, 양쪽 수부 및 족부에 반흔 있음)으로 나오고 통합병원 진단서에는 전기감전(양쪽 손)과 머리, 내과진찰 요망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시의 진단서에는 머리 부분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두 병원의 진단서를 복사해 갖다주었다. 그랬더니 절차과정에서 잘못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서류가 2중으로 되어 있었다.
요즈음 부쩍 보상이니 어쩌니 하는데,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진상규명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내 개인적으로 이렇게 살기가 팍팍하고 사람같지 않은 생활을 하다 보니 한푼이라도 보상금이 아쉽다. (조사·정리 송강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