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플러머 (Christopher Plummer)
핸드폰 스크린에 속보가 들어왔다. 캐나다 출신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연로한 사람인 줄 알았지만
뜻밖에 소식이었다. 마치 친지 중의 한 명이 떠난 것처럼 섭섭하고 마음이 쓸쓸해졌다. 작품을 통해서 만나온 공인이지만 가끔
내 삶에 들렀다 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가시나무새 (The thorn bird)라는 미니 드라마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드라마는 한 젊은 카토맄 신부가 교황청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보려는 야망과 한 여인을 향한 불타는 사랑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였다.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선배 대주교 역을 연기했다. 수십 년을 한 여인을 마음에서 떨쳐내지 못하는 후배를 바라보면서 그가 한 말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 그 자유의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큰 짐을 동반하는 게 문제야. 결정이 없이 우리는 절대 앞으로 나 갈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그즈음 우리 부부는 어려운 결정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남편은 토론토 대학 신학부를 마치고 안수를 받을 시점에 있었다.
안수를 받는 조건 중의 하나가 목회 지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첫 목회 지로 앨버타와 뉴펀들랜드에 있는 멀고 먼 교회들에서
초빙을 받았다. 내 직장을 포기하고 가족을 떠나고, 무엇보다 첫 아이의 산달이 다가오는데 병원이 없는 시골로 가는 게 옳은 일인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물론 우리의 결정은 드라마와는 상관이 없이 내려졌지만 젊은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심장을 뚫을 듯한 눈빛과 빨간 망토를 입은 위엄있는 모습이 그 때를 상기 시키듯 생각난다. 원칙대로 살겠다는 의지와 새로운 길로 겁 없이
첫발을 내디뎠던 젊은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둘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무척 좋아했다. 아름다운 배경과
음악,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었다. 영화 속의 노래와 내용을 다 외우고도 한동안 같은 영화를 수없이 거듭해 보았다. 모자가 팝콘을 만들어 먹으며 편한 옷차림으로 소파에 서로 기대앉아 담소를 나누는 일을 더 즐겼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초청하면 등장하는 가족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씩 화면에 나타나 우리들의 시간을 엮어 주었다. 그런 시간이 모여서일까
아이는 청년이 돼서도 엄마와 흔쾌히 여행길에 나서고, 각별히 다정하고 감성이 맞는 아들이다. 지금도 나는 손주들을 재우려면 가장 먼저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자장가 첫 번 순위가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기타를 치며 불렀던 ‘에델바이스’라는 곡이다.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몸에 배어있다.
하지만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극 중 인물을 동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내 마음을 앗아갔던 모습은 그가 82세에 찍었던 ‘Beginners’라는 영화 속에서였다. 동성애자임에도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아 온 노인이 인생의 끝자락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인간이 어깨에 걸친 많은 옷을 벗었을 때 보이는 초라하고 순수한 모습과 또 온전한
자신과 만나는 평온이 깃든 순간을 보여줬다. 숨을 몰아쉬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이어 갔지만, 눈빛은 아이와 같이 맑고
따뜻했다. 긴 세월 아들과 아버지로 존재하던 삶이 막을 내리고, 서로를 신뢰하는 새로운 두 사람으로 관계를 시작하는(Beginners) 순간이었다. 영화 속의 노인은 아들에게 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그가 표현한 얼굴로 죽음과 새로운 만남을 시작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2010년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그 역으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그는 자신은 너무 옛날 사람이라 어릴 때 배운
첫 단어가 라틴어였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수상소감을 시작했다. 그는 소감 중에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don’t be afraid to make yourself fool )라 말했다. 자기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새 역을 맡을 때마다 관객 앞에서 떨렸지만, 그 스토리들은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줬다고 했다.
살다 보면 우리 각자에게도 주어진 인생 대본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 안에는 우리 힘으로 다시 쓸 수 없는 순간들이 가득하다. 그래도 노력하고 애통하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노인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나에게 주어진 역을 좀 더 의미 있고 후회 없는 스토리로 만드는 법을 다정히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유머를 가지고 주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사랑을 표현하며 살라고. 나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이 앞서서 걸어주는 인생의 선배처럼 여겨졌다. 멀리서 바라봐도 설득력을 가지고 감동을 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우리 생활에 주어진 보너스처럼 느껴진다.
김인숙 (64 Mrs. 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