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구림 회사정 소나무
영암에는 선사시대인 신석기에서 청동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옛 유물 유적이 있다. 이때의 고인돌이 1천 37기 확인되었고 출토된 청동기 제작용 거푸집이 있다. 이 거푸집으로 세형동검, 꺾창, 낚싯바늘, 도끼, 끌 등을 만들었고 서양보다 천여 년이 앞선 시기에 아연을 첨가했다. 아연은 청동의 색채를 아름답게 하고 성능도 향상시키나 그 녹는 점이 327.4도로 낮고 907도에서 기화하여 주조기술이 매우 까다롭다. 중국 송나라도 아연을 넣지 못했고, BC 20년 17.3%의 아연을 함유한 로마의 청동 화폐도 우리보다 1,000여 년 뒤처진 기술이다.
이 무렵 부족의 위엄과 권위의 세형동검, 그리고 지름 21.2㎝에 13,000여의 정교한 선을 새긴 거울 다뉴세문경도 있었다. 이곳의 선사시대는 풀어헤친 머리, 허리에 짐승 가죽을 두른 그런 곳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백제 왕인 박사가 왜에 건너가 학문과 예법을 가르친 건 우연이 아니다. 당시 왕인 박사가 배를 탔던, 여기 구림 마을 상대포는 중국과 왜를 잇는 국제무역항이다. 한반도 서쪽 해안을 타고 산둥반도에 이르는 발해만항로와 남해안을 타고 왜에 이르는 남해항로의 거점 항구이다. 남북국 말기에 12살의 최치원이 당나라로 갈 때 배를 탄 곳도 여기다. 또 8~9세기의 시유도기는 토기와 자기의 중간 단계이니 구림은 2천여 년 넘게 고유의 문화를 영유하며 맥을 이은 한반도 남쪽의 옛터이자, 중심지이다.
신라말의 도선국사가 여기 출신이다. 최 씨 집 딸이 밭의 한 자 남짓 오이를 먹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을 집 뒤 대밭에 버렸는데, 비둘기와 독수리가 보살폈다. 여기 구림(鳩林)은 그 비둘기에서 연유하고 독수리 숲 비취(飛鷲)도 마찬가지다.
또 고려 창업 공신 구림 출신 최지몽은 열여덟의 나이에 고려 태조 왕건의 꿈을 삼한통일로 해석하여 지몽이란 이름을 얻었다. 구림의 이웃 고을이 나주이니, 지몽이 장화왕후의 아들 혜종을 2대 왕으로 등극할 수 있게 도운 것은 팔이 안으로 굽은 셈이다.
조선 선조 때 한석봉이 여기서 공부할 때 어머니가 떡 장사를 한 곳이며, 이곳 외가에서 자란 최경창은 시 ‘묏버들 가려 꺾어’의 홍랑과의 사랑으로 조정을 발칵 뒤집은 삼당시인이다.
이순신의 ‘약무호남 시무국가’ 편지를 받은 현덕승도 이곳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암행어사 박문수도 일화를 남겼다. 여기 회사정 돌비에 묶여 꼼짝없이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미군정과 6·25에 이르는 좌우익 갈등은 여기 주민 3백여 명의 희생을 가져왔다. 이곳 구림 평화공원의 ‘순절비’와 ‘구림위령비’, 그리고 ‘하늘과 땅이 만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손을 잡았다.’는 ‘위령탑’은 그 동족상잔 비극의 상징이자 화해와 용서의 시금석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모으면 무엇이 될까? 그것이 해라면 눈 부심으로 바라볼 수 없음이니, 헛됨을 버려야 할 것이다. 달이라면 바라보더라도 어둠을 견디고 새벽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람이라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음이다. 이걸 문자로 바꾸면 역사이자 세월이니 켜켜이 쌓아서 교훈으로 삼음이다. 그 역사와 세월을 보듬는 곳이 바로 여기 회사정이다. 회사정은 1565년 결성된 구림대동계의 회의 장소로 1646년 건립된 정자이다.
이제 구림 소나무숲의 비둘기 울음소리도, 월출산 창공의 독수리 날갯짓도 그저 역사이고 세월이다. 한여름을 지나며 회사정은 꽃무릇이 지천이다. 이 회사정을 지키는 4백여 살의 소나무가 여러 그루이다. 소나무가 무슨 말을 하랴? 모든 걸 내려놓는 참음과 기다림을 소나무에게 배운다. 그렇게 회사정에서 구림 2천 년의 역사와 세월을 함께 하며, 세상사 덧없고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굳이 알 필요가 없구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