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외출, 그리고 긴 여행
그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조금 상업적인 표현이지만 그 여자손님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라고 하면 영어의 3인칭 여성대명사 She를 번역한것 처럼 들리고 그 여자손님이라고 하면 우리 약국의 일상적인 고객 중의 한사람으로 들린다. 하지만 상관없겠다. 그녀건 그 여자손님이건, 어느 쪽도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다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봄날이 가고 여름날이 성큼 다가오던 계절인 지난 6월초 쯤 오래된 가요 “봄날은 간다”의 가사처럼 연분홍 원피스를 입고 우리약국에 처음으로 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나이는 대략 심수봉 정도 되어 보였고 우리 동네 그 나이 정도 되는 어머니들과는 다른 어떤 도회적이고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할 줄 아는 그런 사모님이었다.
약국에 들어 오자 마자 “어쩜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수준이 낮아요?” 하면서 나로서는 제법 듣기 불편한 푸념부터 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서울은 지도상의 위치가 아닌 그녀만의 어떤 자존심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살러왔다는 묻지 않은 말을 먼저 시작하였다. 우리 약국동네는 인천 남동공단 근처에 위치해 있다. 약국 뒤로는 원룸이라는 용어로 통칭되는 주거단지가 있고 골목입구에는 저렴한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밥집들이 있는데 일용직이나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곳이다. 그래서 분리수거가 되지 않은 쓰레기들이 전봇대 주위로 널려있고 밤에는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상당히 소란스러운 분위기의 동네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가 바로 그 원룸주택의 한곳에 이사를 온 것이다. 그녀는 늘 “서울사람들은 이렇지 않은데…” 라는 말로 자기는 이곳 동네 이웃들과는 일종의 격(?)이 다름을 나에게 알려주기 위해 무척 노력을 하는 듯이 보였다. “이런 동네서 약국하기 힘드시겠어요? 수준이 많이 차이나서요.” 이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이 내 귀를 무척 거슬리게 했지만 나는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내 단골고객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어느 정도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평소의 습관과 의지대로 그녀를 고객의 한사람으로만 응대해 주었다. 그녀가 우리 약국에서 사는 약은 약이라기 보다는 소녀시대가 광고하는 비타민 음료 한 병 정도 였기에 나는 사실 그녀의 약국방문을 그다지 반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 동네 어머니들과는 다르게 약국에 올 때마다 유럽 여행가는 사모님들의 공항패션처럼 차려입고 왔는데 약과 상관없는 다른 일상의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직원도 없이 혼자서 처방전 입력하고 조제하고 일반약 정리하고 상담하는등 모든 약국일을 혼자 다 하는 나로서는 선뜻 반가운 손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나름대로 최대한 성의 있게 응대해 주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우리 약국에 와서 묻지도 않은 말은 하나씩 하나씩 더하는 재미를 만끽하는것 같았다. 그녀가 젊었을때 당시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했다는 이야기는 그런대로 그녀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자녀들이 공부도 잘해서 모두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랑도 여러번 했다. 그때마다 나는 고객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의미 정도로만 짐짓 놀라는 반응으로 “아 그래요? 요즘 대기업에 취직하기 어려운데 애들을 아주 잘 키우셨네요”하면서 마치 1970년대 차인태 아나운서의 장학퀴즈 정답처럼 즉각적인 대답만 해주기도 하였다.
내가 탈렌트 최수종 급(얼굴이 아니라 나이가)의 약사로서 20년 가까이 약국을 하는 동안 이젠 아줌마들 자랑을 들어주는것에 워낙 익숙해져서 그녀의 자랑을 들으면서도 지겨운 표정을 감출수 있는 경지에 있음에 나 자신도 놀라웠다. 그녀 남편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고 며칠 후에 한국에 오는데 무척 기다려 진다면서 “남편이 오면 약사님과 성격이 잘 맞을 것 같아요. 두분이 나이 차이 상관없이 친구처럼 지내면 좋겠네요”라는 말도 했다. 그녀는 서울사람 특유의 액센트를 나름 잘 구사하는 것으로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사투리로 뒤섞인 우리 동네에서 스스로를 차별화하면서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자식들과 함께 있지 않고 서울에서 와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주거지에서 왜 혼자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대화에 더 깊이 연루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삶이 바빠 어느 순간 그녀가 우리약국에 방문하는 것이 꺼려질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나의 부담스러워 하는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녀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외출복을 모두 다 활용하려는 듯 거의 매일 다른 모습의 복장으로 약국을 방문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가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녀는 유행과는 상관없이 그 나이에 걸맞게 제법 갖춰 입은 의상과 관심사를 보여주었으며 “이 동네 아줌마들은 왜 죄다 호랑이 가죽무늬만 입고 다녀요?” 하면서 자신의 우월한 패션감각을 과시하고 싶어 하였다. 이럴때 여사님들의 복장트렌드에 무지한 박준규 급(나이에서 얼굴까지)의 남자 약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정답을 모르고 있다.
나는 속으로 “참 신기한 손님도 다 있네” 하면서 아직까지 그래왔듯 정중하면서도 사무적인 태도로만 일관하였다. 어느날은 그녀 남편이 베트남에서 온다고 내일은 공항에 마중을 나갈 거라면서 공항 가는 차편을 나에게 물어왔다. 그 다음날 그녀는 커다란 꽃잎과 돗단 배 문양의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남편을 약국에 데리고 와서 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신세를 많이 질것 같습니다.”라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서로 교환하면서 어색한 첫 만남을 하고 나는 늘 그러듯이 약국 일에 몰두했다. 나이부터 얼굴 생김까지가 윤형주 쯤 될까 싶은 그녀의 남편에게서는 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다운 모습보다는 감출수 없는 궁핍함이 더 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녀 말마따나 서울에서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은퇴한 사람이 가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충분한 뭔가가 있는 듯 했다. 한가지 의아했던 것은 그 남자는 우리 약국앞의 버스정류장에서 늘 혼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어딘가를 다녀오곤 하였다. 한번은 내가 “선생님 혼자서 어디 다녀오시나요?” 하고 물어봤더니 인천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시군요. 좋은 습관을 지니셨군요” 하는 말로 마치 ARS처럼 응대해 드렸다. 그 남자도 내 잠재고객이니까.
그로부터 며칠 후 쯤인가 그 남자가 약국에 와서 자신이 참 힘들다고 깊은 한숨과 함께 하소연을 했다. 직장을 은퇴하고 외국에서 사업이라고 하는데 돈은 벌리지 않고 지금 아내가 전이된 상태의 말기암으로 투병중이라 임종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기에 자기가 어찌해야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가 아무런 아는 사람 없는 우리 동네에 와서 홀로 살면서 그동안 우리약국에 와서 그토록 많은 말들을 하고 싶어 했는지 왜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 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그녀가 우리약국에 발길을 끊은 지 일주일도 더 넘은 것 같았다. 그녀가 약국 앞의 버스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기위해 기다리는 모습도 며칠째 못 본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가고 어느 일요일 오후에 약국에 출근하였는데 그 두 사람이 함께 어딘가 다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그냥 평범한 중년 부부가 정답게 외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 같아서 사연을 아는 나로서는 보기에 참 안타까웠다. 그녀는 아픈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도 복장은 계절에 잘 어울리는 연한 녹두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어디 다녀오시나요?” 라고 물었더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그 후로는 이제 약국에는 그녀 남편이 가끔 들르고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아저씨에게 뭔가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그녀의 안부를 묻는 것이 어쩌면 더 그분을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짐짓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척 했는데 그 아저씨가 자신의 힘든 마음을 또 다시 털어놓았다. 그녀의 상태가 어느덧 거의 말기상태라 시시각각 자신의 임종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혼자 울부짖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식들과는 어떤 말 못할 사연이 있는듯해서 이렇게 어머니가 힘들 때 왜 같이 있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는 “아내가 임종하는 순간까지도 품격을 갖춘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어해요. 그래서 그동안 자신이 가진 마지막 힘을 내서 약사님네 약국과 성당에 다녔나 봅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나에게는 그녀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고객일 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우리약국이 생의 마지막 시간에 세상과 소통하는 의미있는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소름마저 끼쳐왔다.
그 다음날 “별들의 고향”에서의 젊은 장미희처럼 머리를 리본으로 곱게 묶은 그녀가 남편과 함께 약국을 찾아왔다. 늘 그렇듯이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것이 확실히 드러난 그녀의 몸이지만 그래도 그 옷차림이 그녀에게만은 편하고 또 나름 어울려 보였다. 그녀가 망설이듯 말했다. “약사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여기 집을 정리하고 여행을 좀 떠날려고 해요. 어쩌면 여행이 많이 길어 질지도 몰라요. 그래서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을것 같아서 이렇게 인사말씀 드려요” 하면서 남편과 함께 인천터미널 쪽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홀연히 떠나갔다.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떠난 후로 손님들과의 일화는 잊혀지기 마련이라서 나는 늘 그렇듯이 약사로서 처방전을 받고 조제하고 복약지도하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나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나는 그녀가 우리 동네에 와서 한 달 가량을 지낸 이 사연이 가끔은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삶을 성장(盛裝)한 모습으로 외출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고 자신이 이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을 마치 일상의 외출보다 더 화려하고 여행으로 여기며 마무리하려 했던 것 같다.
그녀와 그녀 남편이 우리 약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떠난 지 여름과 가을을 넘긴 지금, 나는 그녀가 여행을 계속하는지 아니면 멈추고 휴식을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 한가지는 그녀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마치고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도 그녀만의 품위를 누구에겐가 보여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첫댓글 제 친구가 이번에 약사문예에서 수상받게 된 작품입니다
뭉클하네요
죽음 앞에서 우아할 수 있을까...
그녀 말처럼 죽음은 먼 여행길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친정 엄마가 돌아가셔을 때
제 스스로 그렇게 위로를 했지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신거라고
이담에 내가 그곳으로 가리라고요
친구분의 수상을 축하합니다
@나목 선생님 글을 읽자니 나중에는 슬프지요?
제가 내일 제주신문에 기고한 기사가 나옵니다
내일 기사되면 그것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