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대덕구 법1동에 있는 민들레의원에서는 어떤 환자들한테는 돈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들은 수납창구에서 이름만 말하면 컴퓨터상에서 대안화폐로 진료비가 자동지불된다. 이들은 한밭레츠 회원들로 민들레 의원은 한밭레츠 가맹점이기에 한밭레츠 회원에게는 대안화폐로 진료비를 받는다.
한밭레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가장 널리 유통되는 대안화폐다.
화폐 단위는 두루로 1두루는 1원과 맞먹는다. 한밭레츠 회원이 되면 두루를 쓸 수 있는데 모든 가맹점의 거래는 30% 이상 두루를 쓰도록 되어있다.
한밭레츠의 가맹점에는 의원이 4개, 한의원이 2개이며 치과 약국 동물병원도 있다. 사진관이 있는가 하면 음식점 찻집 술집 닭튀김집 표구사 목공예점 컴퓨터수리점 자전거포 학원 유치원 인쇄소 여행사도 있다. 농부인 회원을 통해 쌀과 채소 과일도 두루로 살 수 있다. 회원들끼리 서로 갖고 있는 물건이나 노동력을 나누기도 한다.
가맹점 의원들은 의료보험공단에서 진짜 돈으로 진료비를 받는 보험치료에 대해서는 두루로만 치료비를 받으며 보험이 안되는 일반치료는 50%를 두루로 받는다. 그래서 민들레의원에서는 대부분 두루로 치료비를 내는 반면 의보적용이 적은 민들레한의원에서는 50%를 두루로 받는 경우가 많다. 두루로 받은 돈을 병원은 다시 직원들 월급을 주거나 생필품을 사는데 쓰는 등 일반 화폐와 똑같이 활용하고 있다.
일정 지역내 회원끼리 노동력 팔고 물건얹어
480명으로 참여 늘어 올 2,400만원어치 거래
한밭레츠가 정식으로 창립한 때는 2000년 2월. 창립준비는 1998년부터 해왔다. 대전의제21추진협의회 사무처장이던 박용남(49ㆍ대전시 교통정책자문관)씨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의미에서 외국의 대안화폐 실태를 소개하고 ‘지역통화운동의 가능성과 향후 과제’라는 주제로 시민토론회도 가졌다.
박씨는 ‘꿈의 도시 꾸리찌바’(이후 발행)라는 책을 통해 버스 중심 교통체계를 소개하는가 하면 내셔널트러스트 조직에도 앞장서온 대안운동가. 그는 “그러나 지역화폐 운동이라는 것은 운동가가 나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기에 달려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99년 대전의제21추진협의회 간사로 들어온 김성훈(31ㆍ한밭레츠 운영위원)씨가 박씨의 구상을 듣고는 실행에 적극 나섰다. “IMF 이후 늘어난 실직자 문제를 해결하고 빈자들의 부조를 돕기 위해 빨리 실행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씨가 사회개혁에 관심 많은 친구들을 모아들이면서 한밭레츠 창설은 가속도를 붙이게 됐다. 창립 당시 회원은 70여명. 현재는 480여명이다.
한밭레츠 회원이 되면 월 2,000원(2,000두루)이나 연 2만원(2만두루), 거래시 거래액의 5%를 운영기금으로 낸다. 거래는 사무국에 신고하면 계좌를 정리해준다. 인터넷 사이트(tjlets.or.kr)를 통해 거래내역은 전 회원에게 공개된다. 일반 화폐로 거래되는 품목들은 두루와 현금을 섞어서 거래하지만 회원들끼리 중고품을 사고 팔 때는 전액 두루로만 거래되기도 한다.
올해만 해도 9월말까지 1,599건의 거래가 이뤄졌는데 대안화폐는 2,472만535두루가, 현금은 2,140만9,040원이 쓰였다. 두루가 현금보다 약간 더 많이 쓰이는 셈이다.
회원인 권성희(34ㆍ주부)씨는 이 달에 다른 회원한테 7만두루를 주고 바이올린을 구입했고 10만원과 5만두루를 주고 플루트를 샀다. 대신 그는 부모님이 충북 영동에서 지은 포도를 내놓아 두루와 돈을 벌었다.
조병민(31ㆍ대전의료생협 사무행정실장)씨는 최근 회원이 내놓은 95년식 아벨라 승용차를 30만원과 9만두루를 주고 사기도 했다. 조씨는 “쌀이나 과일 고구마 같은 농산물을 사는데 두루를 가장 많이 쓴다”며 “한 달에 10만 내지 15만 두루는 쓰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 농민 회원의 벼베기 콩뽑기 곶감깎기 같은 것을 도와주면 1만두루를 일당으로 받기도 한다. 애봐주는 것은 4만두루, 상을 빌려주면 2만두루, 컴퓨터수리 같은 것은 5만두루로 누릴 수 있다. 회원들의 특강도 5만두루 정도에서 두루로만 거래가 된다. 한밭레츠가 1년에 한번씩 여는 운동회때는 모든 것을 두루로만 거래한다.
한밭레츠는 2000년 8월에는 민들레 의원과 한의원을 중심으로 대전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으며 현재는 대안학교를 준비중이다. 한밭레츠의 상근자는 물론 대전의료생협의 직원들도 임금의 17% 정도를 두루로 받는다. 의사와 한의사는 의료생협에서 주는 임금이 워낙 다른 의사들보다 적다보니 두루를 지급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직원 임금의 두루 지불률을 줄이고 의사에게도 두루 지불을 할 것을 협의중이다.
민들레의료생협 대표인 내과전문의 나준식(36)씨는 한밭레츠 회원이고 임금을 일부 두루로 받는데도 찬성이다. 그는 한밭레츠 회원들에게는 두루로만 보험치료비를 받겠다고 결정한 주역이기도 한데 “당시 조합원들이 수입이 줄지 않겠느냐고 걱정했으나 실제로 해보니 월 내진객의 7~10%가 두루를 쓰고 실제 두루 수입은 전체 금액의 2~3%, 100만두루에 불과해서 오히려 두루가 모자랄 때가 많다”고 말한다.
대안화폐의 특징은 쌓아둔다고 이자가 붙는 것이 아니라서 유통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이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을 막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루 재산이 편중되는 고민도 있다. 두루 재산이 많다는 것은 사회에 기여하고 있지만 두루 화폐가 생활 전분야에서 쓰이지 않다보니 그만큼 손해를 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밭레츠에서는 창립 주역인 김성훈씨가 두루 갑부이다. 지난해 말 정리한 결과 500여만 두루가 계좌에 남아있었다. 최근까지 상근자로 근무하면서 임금의 대부분을 두루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7월에 첫 애를 낳으면서 모든 아기용품을 두루로 구할 수 있었다”며 천하태평이다. 그는 두루를 장애인공동체에 후원하기도 하고 친구 결혼이나 친구 자녀 돌잔치 부조로도 쓴다.
김씨의 사례를 들어 한밭레츠가 상근자에게 너무 큰 고통을 강요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최근 김씨는 의료생협 조직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한밭레츠 사무실은 주부 자원봉사자(‘두루지기’라고 부른다) 4명이 맡게 됐다. 두루지기 중 한 명인 고 연(35)씨는 작년 9월에 대전으로 이사오면서 회원이 됐다. 그는 “대부분의 지역화폐가 창안자에게 집중되면 그 창안자가 힘들어 그만두거나 자리를 옮기는 즉시 지역화폐도 사라져버린다”며 “두루지기 제도를 통해 한밭레츠는 영속할 길을 찾은 셈”이라고 말했다.
한밭레츠의 또다른 고민은 운동이 중산층 중심이라는 점. 의식있는 중산층이 적극 참여하다보니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대전 전체가 대상이 되다 보니 두루 거래를 위해 2시간 거리를 오가는 경우도 생겨난다. 심지어는 대전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농부들도 회원에 있다. 박용남씨는 “이것은 지역공동체를 살리고, 지구환경위기를 극복하자는 지역화폐 운동의 본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 때문에 한밭레츠는 내년부터 법동 지역만을 분리해 법동레츠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법동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영구임대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는만큼 법동레츠가 활발해지면 실직자나 빈곤층의 부조에는 한걸음 다가가게 된다.
올여름에는 한밭레츠의 회원인 대학생이 충남대에 백마레츠를 만들어 학생들끼리 지역화폐운동을 펴고 있다.
김성훈씨는 “한밭레츠는 계속 부족한 점을 보완해가며 내실을 다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안화폐의 실태
83년 加서 시작… 전세계 3,000개 운영
대안화폐는 노동력이 있으면서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 속에 던져진 실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1983년 캐나다 코목스밸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마이클 린튼이 처음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이 노동력을 대안화폐 단위로 팔고 대신 필요한 생필품과 서비스를 얻을 수 있게 한 것. 지역 공동체 안에서 물건과 노동력을 주고 받는다는 뜻에서 지역화폐나 공동체 화폐로 불리기도 한다. 레츠(LETS, Local Exchange & Trading System 지역교환거래체계)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겼다.
박용남씨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에 약 3,000개 정도의 지역통화제도가 운영중이며 영국에 500개, 호주와 뉴질랜드에도 300개 이상의 지역통화가 있다. 미국 캐나다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같은 서구는 물론 남미와 아시아에도 번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96년 '녹색평론'이 처음 소개한 후 1998년 3월 신과학운동 조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미내사)이 '미래화폐'(fm)란 단위로 처음 시작했다. 이어 불교환경교육원, 중앙대 부설 종합사회복지관이 운영하는 기술도구은행, 관악지역화폐 등에서 지역통화운동을 벌였으나 이 가운데는 현재 미내사만이 계속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부침이 심하다.
미내사 역시 전국 단위로 움직이다보니 실거래는 미미한 실정. 대신 서울 송파구의 송파품앗이, 경기 안산시 고잔1동의 고잔품앗이, 안양시청 자원봉사센터에서 운영하는 지역화폐 등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역화폐가 활발하다. 특히 송파품앗이는 송파구민 뿐 아니라 ?銓?과천에서도 동참, 480여명이 올해에 573건의 품앗이를 나눴다. 박용남씨는 전국에 30개 정도의 지역화폐, 또는 대안화폐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첫댓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노동이나 물건)으로 대신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한다. 관심 많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