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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됨 |
성경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1~14)」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믿는 자들에게 히브리서를 보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 보다, 곧 유대교에서 중히 여기고 있는 것들 보다 뛰어나고, 위대하고 더 좋은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 부분에서는 주님이 천사들보다 낫고, 모세보다 뛰어나고, 아론보다 뛰어나다고 하면서 제사장이었던 아론보다 제사장 직분에 있어서 훨씬 더 높고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6장 19, 20절에서는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휘장 안(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했다. 우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우리 주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 멜기세덱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높은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7장 1∼7절에서는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했다. 이 내용의 앞 부분에서는 아버지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다. 우리 주 예수님이 하늘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했는 데, 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고 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다고 했다.(롬 1:4). 이렇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으로(물론, 그전에도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 멜기세덱은 히브리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그들이 그렇게도 대단하게 생각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받았다고 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받쳤다고 할 수 있는데, 십분의 일을 받은 자의 조상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는 멜기세덱은 얼마나 높은 자이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이러한 멜기세덱,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속한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히브리 믿는 자들은 젖을 먹는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듣는 것이 둔하여 멜기세덱에 대해 이해를 제대로 못한다고 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전진된 단계의 말씀인 의의 말씀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심지어, 초보적인 말씀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있다고 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했다. 히브리 믿는 자들은 주님을 믿고 유대교에서 나온지 오래 되어서 시간의 경과로 보면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하는 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쳐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히브리서 6장 1, 2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찌니라”고 했다. 또, 히브리서 6장 5절에서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했는 데, 이 내용에서의 하나님의 선한 말씀은 상기의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으로서 생활에 있어서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침)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에 처해 있는 자에 대해, 히브리서 5장 12, 13절에서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했다.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에 대해 어린아이들이 먹는 ‘젖’이라고 했다. 젖은 어린아이들이 먹는 것으로서 시간이 많이 지났는 데도 계속해서 젖을 먹는 것, 그리스도의 초보적인 말씀에 붙들여 있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라나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이나, 하나님의 선한 말씀에서 나와 더 나은 데로 전진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나, 선한 말씀은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났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의 말씀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지 말고, 더 나은 데로 전진해야 하고, 또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해야 한다.
어린아이와 젖을 먹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히브리 믿는 자들에 대해, 여전히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므로 단단한 식물은 먹지 못하고 젖이나 먹는 자들이 되었다고 했다. 히브리서 5장 12, 13절에서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했다. 히브리 믿는 자들은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유대교적인 가르침에서 온전히 나오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말씀에 서 전진하거나 성숙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진리적인 면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함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단단한 식물은 먹지 못하고 젖만 먹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성숙)한 데 나아갈찌니라(히 6:1, 2)”고 했다. 계속해서 초보적인 가르침에만 머물지 말고, 초보적인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성숙)한 데로 나아가라고 했다. 젖만 먹는 자는 성숙할 수 없다. 젖보다 더 단단하고 영양가가 높은 식물들을 많이 먹어야 계속해서 많이 자랄 수 있듯이 진리적인 면에 있어서도 주님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에만 머물러 있다면, 단단한 식물인 의의 말씀을 먹지 못함으로 자라갈 수가 없다. 이것은 도덕적, 윤리적인 면에서의 문제, 곧 육신적인 것, 죄악된 것들을 해결함으로 자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진리적인 면에서의 성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4∼17절에서는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할뿐만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고 했다.
베드로전서 2장 1∼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가 있는 데 이것은 그 내용이 앞의 내용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인 데, 그 앞의 내용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벧전 1:23∼25). 이렇게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난 자는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라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병들과 같은 것으로서 성장을 방해 하는 것이다. 사람이 여러 가지 병들이 있으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듯이, 여러 가지 죄들이 있으면 영적으로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성경 기자는 이러한 것들을 버리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난 뒤에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고 했다. 그럴 때에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항상 있고 살아있는 말씀의 복음으로 거듭난 후에는 계속해서 자라나기 위해 신령한 말씀의 젖을 먹어야 한다. 우리는 육신에 속한 온갖 악독과 더러운 것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음으로 주님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데 함께 해야 한다. 진리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음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어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고, 그 영을 좇지 않고 육신을 좇음으로 자라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그리스도의 몸을 제대로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적인 면에서도, 생활적인 면에서도 계속해서 자라나야 한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들 가운데서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하지 아니했다고 했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밥을 먹이면 감당을 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형제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어린 아이로서 영적으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하지 아니했다’고 했다. 이들은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벧전 2:1)’는 말씀을 들은 자들과 함께 하는 자들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라나야 하는 데 여전히 자라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고, 비극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에서 나오기 위해, 성장을 방해하는 육신적인 것에서 나오기 위해 이들을 처리해야 한다. 골로새서 3장 5∼10절에서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다.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거듭난 자들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분과 악의와 훼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들을 버리라고 했다. 주님을 믿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므로 옛사람에 속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주님 안에서 성장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성한 자와 단단한 식물
주님을 믿고 구원받아 거듭난 자들은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나야 한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에서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했다. 음식에는 어린아이에게 맞는 음식이 있고, 성인에게 맞는 음식이 있다. 어린아이가 그에게 속한 음식을 계속해서 먹고 자라 성인이 되었다면 이 후에는 성인에게 맞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젖을 먹지만 성인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주님 안에서의 어린아이는 젖에 속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을 먹고 행하지만 장성한 자는 단단한 음식인 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경륜적으로나, 통치적으로 다루시는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더 깊은 사상을 구체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행 14:3, 20:32)이나, 구원의 말씀(행 13:26)이나, 생명의 말씀(빌 2:16) 보다 분별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나 장성한 자가 이러한 의의 말씀, 곧 단단한 음식을 계속해서 먹는 다면 계속해서 더 자라갈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린다고 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어린 아이의 음식인 젖, 곧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에서 나와 성숙을 위해 성인에게 필요한 성인의 양식, 곧 단단한 식물인 의의 말씀을 계속해서 취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히브리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유대교에서 나온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의 생활인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계속해서 다시 닦는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기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성숙에 이르도록 전진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분별함
주 예수님 안에서 어린아이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성경 내용에 있어서도 어떤 것이 우등하고 어떤 것이 열등한지를 잘 모른다. 히브리 믿는 자들도 주 예수님을 믿고 유대교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젖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중히 여기고 있는 것과 우리 주 예수님의 뛰어남과 높으심과 더 좋은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닥치는 어려움과 핍박과 고난으로 인해 이미 유대교로 다시 돌아간 자들도 있고, 돌아갈까 말까하고 망설이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젖만 먹으므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초보적인 교훈의 가르침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성숙한 데로 나아감으로, 단단한 음식인 의의 말씀을 체험함으로, 장성한 사람이 됨으로 우리 주 예수님이 유대교에서 중히 여기는 천사나, 모세나, 아론이나, 여러 제사나, 제물들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주님만 추구하고 따름으로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 14절에서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선악’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데, 이 내용의 ‘선악’은 선(good)과 악(evil)이 아니고 좋은 것, 우등한 것(good)과 좋지 않은 것, 열등한 것(bad)이다. 그러므로 우리말 번역의 ‘선악’은 ‘우열(優劣)’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주님 안에서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우리 주 예수님이 유대교에서 중히 여기는 천사보다 뛰어나고, 모세보다 뛰어나고 , 아론보다 뛰어나고, 여러 제사나 제물보다 뛰어나며,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뛰어난 것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상태, 곧 젖만 먹는 상태에서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장성한 사람이 되어 단단한 식물인 의의 말씀을 먹고 체험함으로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 곧 우리 주님과 유대교를 바로 분별함으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또 유대교에서 나오게 하셨는 데 다시 그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열등한 것에서 나와서 우등한 주 예수님께로 나아왔는 데, 왜 그 열등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느냐! 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 2절에서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다. 주 예수님을 믿고 열등한 유대교에서 나온 자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우등한 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