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여행4 - 나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흥복사와 나라공원을 구경하다!
2024년 11월 23일 교토역에서 기차로 나라역(奈良駅) 에 도착해 JR 만요마호로바선 기차를 타고
사쿠라이역 (櫻井駅) 에 내려 바로 옆에 긴테쓰 (近鉄大阪線) 전철을 타고는
하세데라역(長谷寺 장곡사) 역에 도착해 15분을 걸어서 하세데라 (長谷寺 장곡사) 절을 구경합니다.
다시 하세데라역(長谷寺 장곡사) 역에서 기차를 타고 사쿠라이역에 도착해
통로를 걸어서 JR 사쿠라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JR 나라역 (奈良駅)
에 도착해서 코인로까에 넣었던 배낭을 찾아 산조도리 도로를 따라 걷습니다.
도요코인 호텔 (東横INN 近鉄奈良駅) 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는데 여긴 오후 4시(회원의 경우 예약할때
3시로 신청했으면 3시에 가능) 가 되어야 입실을 할수 있는지라 그냥 배낭을 맡긴후 바로 나옵니다.
그러고는 나라 긴테쓰 전철역으로 가서는 그 옆에 가게들이 밀집한 작은 길을 걸으며 음식점
을 찾는데..... 무수히 많은 음식점들이 보이지만 우리가 찾는 우동집은 없습니다.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서는 통로에 지붕이 있는 시장통으로 들어가서는 우회전
을 해서 드디어 우동집을 발견하고는 들어가니 대기를 하랍니다.
해서 노트에 우리 이름을 적는데.... 마눌이 뒤에서 보더니 노트에 7팀이나 적혀 있으니
놀래서 내 소매를 잡아 끌며 나가자기에..... 내가 소매를 뿌리치며 역정을 냅니다?
아니? 자세히 보아야지! 노트에 일곱 팀이 적혀있지만 그 중에 6팀은 볼펜으로 체크 표시를 했잖아?
그럼..... 저 6팀은 이미 차례가 되어 들어간 것이고 그러면 우리 앞에는 단 한팀 뿐이잖니?
머쓱해 하는 마눌은 기분이 나쁜 모양이지만..... 배도 고픈에 어디가서 다른 우동집을
찾겠나 싶어 기다리기로 하는데 종업원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으로 들어오랍니다.
메뉴판에는 덴푸라 소바라고 적혀 있는지라 종업원에게 “덴푸라 우동가 아리마셍까?”
라고 물었더니 알겠다기에 덴푸라우동 하나에 그냥 우동 하나를
시켰는데.... 조금 후에 보니 우리가 원하는 뜨거운 우동이 나온지라 맛있게 먹습니다.
골목길로 해서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고후쿠지 興福寺(흥복사) 절 경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깊은 산 속이 아니고 도시 한 복판 상가와 주택가에 들어선 절이 우리에게는 생소합니다.
고후쿠지 興福寺(흥복사) 는 일본 법상종의 대본산으로 669년에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그의
아내 가가미노 오키미(鏡大君) 의 병환의 회복을 기원하며 절을 세운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원래 부지는 야마시로국 야마시나(교토시) 였다고 하는데..... 672년에 절은 일본
최초의 계획적으로 건설된 수도인 후지와라쿄로 이전하였다가 710년에
새롭게 건설된 수도인 헤이조쿄( 나라시) 의 동쪽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고후쿠지(興福寺)는 대 귀족인 후지와라(藤原)씨가 후견인인 사원으로 후지와라씨가 권력을 잡는 동안 번창
하였으니 고후쿠지는 불교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왕실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794년에 수도를 나라(奈良)에서 헤이안쿄(교토) 로 이전한 후에는 도다이지(東大寺) 와 같은 남도 7대사는
쇠퇴하였으나 고후쿠지(興福寺) 는 대 귀족인 후지와라 씨와의 관계 덕분에 영향력을 유지하였습니다.
여기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 흥복사) 는 여러번의 내전(內戰) 과 화재로 파괴되었다가 재건
되었지만.... 세개의 금당 중에 두개와 그리고 남대문과 중문은 재건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후쿠지는 나라시의 가스가타이샤를 포함한 몇몇 사원들, 헤이조궁 유적을 포함해 고도 나라의
문화재 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어 있으니, 주요 건물
중에 동금당(東金堂) 은 원래 세개의 금당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일본 국보라고 합니다.
그외 일본 국보로는 오층탑(五重塔), 삼층탑(三重塔), 북엔당(北円堂) 이 있으며 남엔당(南円堂) 은 일본
중요 문화재이며 또 국보로는 건칠팔부중립상(乾漆八部衆立像), 건칠십대제자립상
(乾漆十大弟子立像, 동조불두(銅造仏頭) (국보) 및 목조금강력사립상 (木造金剛力士立像) 이 있습니다.
고후쿠지(興福寺 흥복사) 를 세운 후지와라(藤原) 씨는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타치바나
(橘) 와 함께 일본의 4대 본성인 겐페이토키츠 중 하나로 미나모토와 타이라가
각각 겐지(원씨), 헤이시(평씨)로 불리듯 후지와라도 약칭으로 토우지(藤氏) 로 불립니다.
아스카 시대 가문인 백제계 소가씨가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자 그 자리를 차지해 나라시대때 기반을 다지고,
헤이안(교토) 시대때 섭정 가문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니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 및 타치바나 가문
은 황실에서 사성을 받고, 신적강하한 분가들이지만 후지와라씨는 황실 방계가 아닌 일반 귀족 가문 입니다.
후지와라씨는 아스카 시대인 669에 창건되었으니 선조는 교토의 야마시나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토착 종교의 신관 가문인 나카토미(中臣) 였는데,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아메노코야네 신(天児屋命) 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시조신으로 모셨습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로로 제38대 덴지왕(천황)으로 부터 669년
에 후지와라씨를 사성받았으며..... 번성하기 시작한건 차남 후지와라노 후히토 때
부터였는데 카마타리는 덴지왕(천황)으로 부터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합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제45대 쇼무왕(천황) 이 되는 오비토(首皇子) 친왕에게 미인인 딸을 주어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코묘 황후) 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외척 가문의 지위를 굳혔습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712년 고사기 와 720년 일본서기의 실질적인 편찬 저자였는데, 만세일계
를 만든 자이며 제40대 덴무 천황 이전까지 대왕(大王, 오키미) 이었던 칭호를
원래 부터 천황(天皇, 덴노) 으로 기술했으며..... 제1대 진무 ~ 제9대 가이카 ,
제12대 게이코 ~진구 황후는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길거나 내용이 당시와 맞지 않습니다.
고훈(古墳) 시대의 왕(천황) 중에서도 제22대 세이네이나 제25대 부레쓰는 가공인물설이 있으며, 소가씨도
을사의 변 이전에는 제26대 게이타이왕(천황)의 직계와 대왕 위를 공유하지 않았냐는 설까지 존재
하는데.... 이후 모략과 숙청을 통해 타치바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이들의
후손들은 각각 남(南), 북(北), 식(式), 경(京)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됩니다.
후히토의 아들들은 729년 당시 덴무왕(천황)의 손자로서 조정의 실세였던 나가야 왕을 모함해 자결
시키고 권력을 쥐었으며 그 권세를 바탕으로 누이인 고묘시를 황후로 책봉하려 하자,
황족과 타 귀족들이 강력 반대했으나 결국 코묘 황후로 책봉시켜 황족의 황후 독점을 깨뜨렸습니다.
이로써 외척 후지와라 가문의 위세가 시작되었지만 737년 형제 모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권력은
나가야 왕의 아우인 스즈카 왕(鈴鹿王) 과 강력한 귀족 타치바나(橘)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후지와라 가문의 네 형제는 어린 자손들만을 남겼으나 이들이 장성하여 가문을 중흥시킵니다.
그러나 경가(京家, 교케)는 자녀들의 요절로 구성원 자체가 적었으며, 반란에도 연루되어 일찍이
가장 먼저 몰락했고, 식가(式家, 시키케) 역시 740년 우마카이(藤原宇合) 의 아들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 가 다자이쇼니(大宰少弐) 로서 규슈의
다자이후로 좌천된 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경가의 뒤를 이어 몰락합니다.
여기에 후지와라노 무치마로(武智麻呂)의 차남으로 후지와라 남가(南家, 난케)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역시 훗날 일가와 함께 몰락하게 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 고모
코묘 황태후의 후원을 받으며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藤原豊成) 를 제치고 승승장구합니다.
나카마로는 755년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으로 숙적 타치바나노 모로에를 실각시켰고, 757년에는
황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 을 진압하여,
모로에의 아들이었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를 비롯한 타치바나 일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후 760년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사신이 추방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신라 정벌 계획
을 추진하면서 군사권도 손에 쥐어 권세의 절정에 이르러게 되었지만 코묘 황태후 사후,
상황이던 제46대 고켄 왕(천황) 및 최측근인 승려 도쿄(道鏡) 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나카마로는 위험을 느끼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남가 일족이 세번째로 몰락하게 됩니다.
770년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냈던 제48대 쇼토쿠왕(천황)이 붕어했는데, 덴무왕 계열이었던
여제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으니, 이때 후지와라 가문은 덴무 계열의 자손들 대신 선제
의 제부였던 덴지왕계의 시라카베 왕(白壁王) 을 추천해 60세의 시라카베 왕이 고닌왕(천황) 으로 즉위합니다.
제49대 고닌왕(천황)은 덴지계인 쇼무왕의 딸이자 고켄왕의 이복언니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 을
정실로 맞았었으나, 저주 사건이 일어나면서 황후와 황태자를 폐립하고,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였던
무령왕의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의 아들인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 을 황태자로 세웁니다.
이 사람이 제50대 간무왕(천황)으로 781년에 즉위해, 784년 나라에서 나카오카쿄(長岡京) 로 천도
했다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 교토) 로 천도하여, 헤이안 시대를 개막했으며, 그리고
덴지왕계를 옹립하고 통치에 협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일왕(천황)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됩니다.
그러고는 나라공원(奈良公園) 에서 관광객들에게서 센베이 과자
를 받아 먹으려고 쫓아다니는 야생 사슴들을 구경합니다.
나라 공원을 지나 계속 걸어서 왼쪽에 나라현청을 바라보고는 올라갑니다.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가서는 지하도로 해서 반대편 으로 건너갑니다.
다시 황토벽을 두른 거대한 기와집들을 지나 큰 연못을 가진데다가 벚꽃과
단풍으로 이름난 정원인 이스이엔 (依水園 의수원) 을 찾아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