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궁예도성 외부 변장이라고 하는데...(출처-구글)
궁예가 도읍하였다는 철원이 어떻게 지명이동 되었는지 살펴보자.
신라가 초기부터 말기까지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존의 역사관념으로는 아래 기록이 이해되지 않을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효공왕
七年 弓裔欲移都 到鐵圓斧壤 周覽山水
7년(서기 903), 궁예가 도읍을 옮기려고 철원(鐵圓)과 부양(斧壤)에 도착하여 산수(山水)를 둘러보았다.
八年 弓裔設百官 依新羅制[所制官號 雖因羅制 多有異者] 國號摩震 年號武泰元年 浿西道十餘州縣 降於弓裔
8년(서기 904),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여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제정한 관직 호칭은 비록 신라의 제도를 인용하였으나,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패서도(浿西道)의 10여 주와 현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삼국사기
卷第五十 列傳 第十 弓裔 (904.7)
秋七月移青州人戸一千入鐡圎城爲京
청주 백성 1천호가 철원으로 들어와 수도로 하였다.
충청북도 청주(淸州)백성이 아닌 산동 청주(靑州)백성을 사민(徙民) 하였다고 해석된다.
실제 철원지역의 1945년도 설명에 의하면 당시에도 인구가 1000여호가 안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卷一 世家 卷第一 태조 총서(905)
天祐二年乙丑 裔還都 鐵圓 .
905년 궁예가 철원으로 돌아왔다.
고려사에서 철원은 두 지역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즉 고려 패서도와 동주 두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였으니 시대에 따라 移置 되었다는 뜻이다.
철원 풍천원에 서있는 석등.(출처-구글)
패서도에 철원이 있었으므로 아래 교과서 그림에 철원은 평안도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런 기술이 없다. (저술자 마음대로 상상으로 그린 그림)
후기고려로 표시 하여야할 역사 지도에는 철원이 교주도내 동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교과서상 윗 두 그림을 설명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지명변동의 설명이 없다는것이다.
고려사 卷58 志 卷第12 地理3 북계
○ 本朝鮮故地. 在三國, 爲高句麗所有. 寶藏王二十七年, 新羅文武王, 與唐將李勣, 夾攻滅之, 遂倂其地. 孝恭王九年, 弓裔據鐵圓, 自稱後高麗王, 分定浿西十三鎭. 成宗十四年, 分境內, 爲十道, 以西京所管, 爲浿西道. 後稱北界. 肅宗七年, 又稱西北面, 後以黃州·安岳·鐵和·長命鎭, 來屬. 辛禑十四年, 復屬西海道. 領京一, 大都護府一, 防禦郡二十五, 鎭十二, 縣十. 中葉以後所置, 府二, 郡一.
고조선 옛 땅이다.3국이 있었고 고구려가 차지했었다. 보장왕 27년 (668) 신라가 그곳을 당 장수 이적과 공격하여 차지했다. 효공왕 9년 궁예가 철원에 근거하여 스스로 후고려왕이라 하였다. 패서13진을 나누어 정하다. 성종14년 경내를 10도로 나누다. 패서도를 서경 소관으로 하고 나중에 북계로 일컫다.
卷58 志 卷第12 地理 3 교주도 東州
本高句麗 鐵圓郡【一云毛乙冬非】, 新羅景德王(742-765), 改爲鐵城郡. 後弓裔起兵, 略取高句麗舊地, 自松岳郡, 來都, 修葺宮室, 窮極奢侈, 國號泰封. 及太祖卽位, 徙都松嶽, 改 鐵圓 , 爲東州. 【弓裔宮殿古基, 在州北二十七里, 楓川之原.】 成宗十四年(995), 置團練使. 穆宗八年(1005), 罷之. 顯宗九年(1018), 改知東州事. 高宗四十一年(1254), 降爲縣令官. 後陞爲牧. 忠宣王二年(1310), 汰諸牧, 降爲鐵原府別號昌原【成廟所定】, 又號陸昌. 有寶盖山. 屬郡一, 縣七.
본 고구려 철원군이다. 신라 경덕왕 때 철성군이라 고치다. 나중에 궁예가 일어나 대략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 송악군으로 부터 도읍을 옮겨 궁실을 수리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했다. 태조가 즉위하자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이라 고치고 동주라 하다.(궁예의 옛 궁전 기단이 동주의 북쪽 27리에 있다. 풍천의 뜰이라 한다)
위 기록에서 철원은 패서도와 동주에 있었는데 연대상으로는 패서도에 먼저 위치했던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동주의 철원은 후대 이치로 볼 수 있다.
동주에 기록된 철원은 이미 1018년 이전에 존재했으며 고려 현종때 거란의 침략을 피해 한반도지역으로 피난한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요사(遼史) 성종조에 기록되어 있어 현재 철원이 11세기 당시의 동주 철원이 아님을 알수 있다.
따라서 고려초로 부터 400년후 14세기 고려사 기록을 검토하면 고려말 우왕때 왜구의 극성으로 인해 우왕의 장인인 최영(崔瑩)에 의해 내지에 궁성이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卷113 列傳 卷第26 諸臣 최영 (1377)
○以京都濱海, 畏倭寇, 欲遷內地, 議可否. 衆慮後禍, 皆欲遷, 瑩獨陳徵師固守之策. 禑不聽, 命築宮城于鐵原. 瑩曰, “今遷都, 非特防農擾民, 且啓海寇覬覦之心, 國將日蹙, 非計也. 請奉太后, 徙居鐵原, 殿下留此鎭之.” 禑曰, “太后徙居, 予豈可獨留?” 瑩曰, “太后年齒已暮, 脫有不虞, 起居尤難.” 禑然之, 事遂寢.
왜구의 침탈로 인하여 바닷가에 가까운 도읍을 내지로 옮기려 하였으나 최영이 홀로 군사를 내어 지키는 계획을 들어 반대하자 우왕이 듣지 않고 철원에 궁성을 짓도록 명했다. 천도를 하면 농사에 우려가 되고 바다를 적에게 내어주면 장차 나라가 기울어질 것이니 계책이 아니라하다. (하략)
철원이 고려 초기에는 패서도에 속해 있다가 고려의 영역축소 (현종)이후 동주로 지명이치 되어 철원으로 바뀌어졌으며 실제 현재 휴전선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궁예도성은 실제 궁예도성이 아닌 우왕때(1377) 왜구의 침략을 피해 이도하려다 중지된 궁성유적으로 볼 수 있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