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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재학 중이던 1968년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미군 악단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가수로 활동하였다.
대표곡으로는 화개장터 등이 있다.
배우 백일섭과는 고등학교 동문이다.
그의 동생 조영수 역시 음악가이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어릴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던 조영남은
처음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개인사정으로 자퇴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편입하였다.
서울대 재학 중 세시봉, 오빈스 케빈 등 캠퍼스 가수로 명성을 얻었다.
조영남은 원래는 1944년생으로 주민번호 앞자리는 440402로 되어있다.
대학에 다니던 1968년에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삼아
미8군 부대의 주한 미 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딜라일라 (Delilah)〉를 한국어로 번안한 곡으로
1970년 대한민국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데뷔 이후 대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수로 활동하는데에 어려웠기 때문에
잠깐 '고철(高哲)'이라는 예명으로 작사가 활동을 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자퇴하고
세시봉이라는 음악 다방에서
조영남은 세시봉 활동 때
김시스터즈 내한 공연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는데,
〈신고산 타령〉을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로 개사하여 불렀다가 미움을 사서
군대에 입대하였다.
군 복무 중에 당시 대통령 박정희 앞에서
분위기를 띄울 목적으로〈각설이 타령〉을 불러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변호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는 그림그리는 취미를 길러 화가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게 됐다.
〈The snake〉를 가사만 대한민국의 분위기로 바꾼 번안곡〈최진사댁 셋째딸〉 을
처음으로 발표하여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때 성가를 부른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세시봉에서 만난 인연으로 윤여정과 1975년 미국 시카고에서 결혼했다.
198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고
가수 김도향과 함께 음악작업을 하면서 그와 함께 음반을 발매하며 활동을 해왔다.
한편 조영남은 결혼 후 윤여정 사이에 2남을 두었으나
성격 차이와 본인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점으로
결국 1987년에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공백기를 가졌다.
공백 기간 동안 조영남과 같이 지내며 의지가 되어주었던 김한길과 함께 지냈을 무렵,
어느 날 신문에 화개장터 기사를 보고 소설가로 활동하던 김한길이 가사를 쓰게 되었다.
그 가사에 조영남이 직접 작곡한 멜로디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곡명을〈화개장터〉로 하고 앨범을 발표하였다.
데뷔 이후 번안곡이나 성가를 주로 불러 국민들에게 널리 불리는 히트곡이 없었는데
〈화개장터〉가 히트하면서 조영남을 TOP 가수 반열에 오르게 하여
80년대 최고의 가요로 자리잡았다.
또한 사랑노래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도
김한길이 작사하였고 이 곡도 히트하였다.
1988년에 두 곡이나 히트하게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정상에 오른 조영남은 여러 공연과 무대에 출연하여 인기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수로서의 조영남보다는 방송인으로서의 조영남이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현재는 딸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조영남은 가수가 아닌 화가로도 활동하면서 화투그림을 그려 자신만의 화투화가의 영역을 개척했으며 동시에 약 10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한데,
그 중에서 2005년에 쓴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의 경우 각종 친일 발언으로 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서울 강북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완쾌되는 등 건강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었으나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다시 MC로 복귀,
이후 12월에는 데뷔 41년 만에 모두 신곡으로 이루어진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2010년 조영남의 청담동 집이 연예인들 중에서 가장 비싼 집에 사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2011년 12월, 조영남의 미술작품이 현대자동차 갤러리를 장식에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12년 8월에 조영남이 작곡하고 김연식 태백시장이 작사한 〈태백의 노래〉를 선보였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경기도 제물포시 신흥동(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서 태어난 송창식은 한국 전쟁 때 아버지가 전사하고, 이후 어머니도 행방불명된 뒤 조부모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이듬해 1968년 《트윈폴리오 1집》 앨범과 함께 〈하얀 손수건〉이라는 곡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또 이듬해 1969년 영화 《푸른 사과》의 조연으로 영화배우 데뷔하기도 하였다. 또 그 이듬해 1970년에는 솔로 가수로 전향했다. 70년대 초중반에 세시봉카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4년에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음해에도 〈왜 불러〉라는 곡으로 대박을 터뜨려 가요부문의 여러가지 상을 받으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장악했다. 1978년 한일 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 일본 공연을 갖기도 했으며 또 같은 해부터 연속 3년 동안 계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요즘에는 자신만의 공연을 펼치고 있으며 세시봉에서 활동하던 동료들과 자주 공연을 펼치고 있고 가끔씩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개성있는 가창력으로 인기를 모았다. 주요 곡으로 〈고래사냥〉, 〈그대 있음에〉, 〈날이 갈수록〉, 〈사랑이야〉, 〈상아의 노래〉,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피리부는 사나이〉, 〈우리는〉, 〈푸르른 날〉, 〈하얀 손수건〉, 〈가나다라〉,〈한번쯤〉등이 있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2년 후 1968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하였으나 1971년 중퇴하였다.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등을 발표했다.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으며 1971년에는 동아방송 심야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기도 하였다. 다시 1973년엔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를 맡았으며 1976년과 1978년엔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와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그는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냈다. 그는 시인 윤동주와 시인 겸 건축학자 윤일주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김세환(金世煥, 1948년 7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포크 팝 가수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1948년 7월 1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보성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그는 가수로 데뷔한 1972년에 제8회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으며, 1974년에는 영화 《맹물로 가는 자동차》의 조연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고 같은 해 제10회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최우수 남자 가수상을 수상했고, 이어 같은 해에 MBC 10대 가수상 및 TBC 7대 가수상, 또 연예대상도 수상했다.
1975년 제11회 방송가요대상 최우수 남자 가수상을 받았으며, 그해 11월 MBC 10대 가수상, TBC 7대 가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히트곡으로는 "사랑하는 마음", "화가 났을까", "비", "옛 친구", "잊지 못할 추억", "목장길 따라" 등이 있다. 가족관계로는 연극배우인 아버지 김동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