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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스크랩 경행공덕에 대하여
milkyway 추천 0 조회 38 19.02.04 03: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행공덕에 대하여

 

 

선종계통의 선원에 몇 차례 가 보았습니다. 좌선을 위주로 하지만 법문도 병행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선원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경행입니다. 위빠사나선원에서는 경행을 좌선 못지 않게 중시하지만, 선종선원에서는 경행에 대하여 포행이라 하여 단지 몸풀기 정도로 보는 것 같습니다.

 

선종선원에서 포행은 빠른 걸음을 특징으로 합니다. 위빠사나선원에서는 한걸음 옮길 때 마다 알아차려야 하나, 선종선원에서는 단지 빠른 걸음걸이로 앞사람과 간격을 유지하면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이렇게 간단히 몸풀기를 한다음 본격적인 몸풀기에 들어갑니다. 두 팔을 크게 벌려서 큰 동작을 한다음 심호흡을 합니다. 두 팔과 두 다리, 허리, 목 등 전신을 마치 체조하듯이 풀어줍니다.

 

선종선원에서는 좌선을 중시합니다. 좌선에 앞서 몸푸는 동작이 포행이라 불리우는 경행입니다. 그것도 불과 십여분 밖에 지나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경행은 좌선과 동등하게 취급합니다. 경행한시간에 좌선한시간이 보통입니다. 집중수행하면 경행과 좌선을 한시간씩 번갈아 시행합니다.

 

부처님도 경행했다

 

경행은 좌선과 함께 주요수행중의 하나입니다. 행주좌와간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경행도 포함됩니다. 경행은 부처님도 했습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Disv? p?s?dach?y?ya?,

ca?kamanta? naruttama?;

Tattha na? upasa?kamma,

vandissa? purisuttama?.

 

누대의 그늘에서 최상자께서

경행하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그에게 다가가

나는 최상자께 예경을 드렸다.”(Thag.480)

 

 

쏘빠까장로가 부처님의 경행 모습을 보고서 읊은 게송입니다. 여기서 최상자는 빠알리어‘naruttama?을 번역한 말로서 영어로 ‘the lord of men’의 뜻입니다. 최상자는 부처님을 뜻합니다. 누대의 그늘은 ‘p?s?dach?y?ya?를 번역한 말로서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계시는 향실(香室: gandhaku?i)의 그늘을 뜻한다.”(ThagA.II.203)라 합니다. 누대는 벽돌을 깔아 단을 높인 고지대의 뜻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머무는 향실 가까이 있는 그늘에서 경행했습니다. 여기서 경행이라는 말은 ‘ca?kamanta?를 번역한 말로서 영어로 ‘walking up and down’의 뜻입니다. 부처님도 시간 나는 대로 경행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장대품 경행과 관련된 가르침

 

경행(Ca?kama)과 관련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는 ‘Vin.I,15, 182; II,220; D.I,105; S.I,212; A.I,114; 183; III,29; IV,87; J.I,17; II,273; V,132’을 참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Vin.I,15’는 율장대품 1 15페이지 경행과 관련 내용이 있다는 뜻입니다. 찾아 보니 율장대품 야싸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 이야기그때 세존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노천에서 경행하고 있었다.”(Vin.I,15) 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부처님도 이른 아침에 경행 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율장대품 ‘Vin.I,82’에도 경행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찾아 보니 신발없는 경행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한때 세존께서 노천에서 신발도 없이 경행했다.” (Vin.I,87)로 시작됩니다. 부처님이 맨발로 경행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섯무리의 수행승들(육군비구)이 신발을 신고 경행했습니다. 이를 본 수행승들이 스승께서 신발도 없이 경행하고 장로 수행승들도 신발없이 경행하는데, 신발을 신고 경행한 것이 사실인가?” (Vin.I,87)라며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궤범사나 궤범사와 같은 자나 친교사나 친교사와 같은 자가 신발도 없이 경행하고 장로 수행승들도 신발 없이 경행할 때에 신발을 신고 경행해서는 안된다. 경행하면 악작죄가 된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승원안에서 신발을 신어서는 안된다. 신는다면, 악작죄가 된다.” (Vin.I,87)

 

 

 

 

 

부처님은 두 가지를 말씀 했습니다. 하나는 경행할 때 신발을 신어서는 안되고, 또하나는 승원에서 신발을 신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경행할 때 신발을 신고 경행한다면 발바닥에서 느끼는 감촉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발바닥의 느낌을 통하여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알아차리는 것인데, 신발을 신고 경행한다면 느낌을 알 차릴 수 없을 것입니다.

 

경행도 수행이기 때문에 맨발로 걸어야 알아차림이 강력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승원내에서도 맨발로 다니라고 했습니다. 승원내에서 돌아 다닐 때 발바닥으로 접촉 되는 감촉을 느껴서 알아차릴 것을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깨어 있음에 철저하라고 했는데

 

경행과 관련하여 ‘A.I,114’를 참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찾아 보니 앙굿따라니까야 확실한 길의 경(A3.16)’입니다. 경에서는 번뇌를 부수기 위한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 그리고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입니다. 이중에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에 대한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Katha?ca bhikkhave bhikkh? j?gariya? anuyutt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divasa? ca?kamena nisajj?ya ?vara??yehi dhammehi citta? parisodheti, rattiy? pa?hama? y?ma? ca?kamena nisajj?ya ?vara??yehi dhammehi citta? parisodheti, rattiy? majjhima? y?ma? dakkhi?ena passena s?haseyya? kappeti, p?de p?da? acc?dh?ya sato sampaj?no u??h?nasa??a? manasikaritv?. Rattiy? pacchima? y?ma? paccu??h?ya ca?kamena nisajj?ya ?vara??yehi dhammehi citta? parisodheti.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은 이러한 것이다.”(A3.16)

 

 

부처님은 늘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깨어있음(j?gariya?)’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좌선할 때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경행할 때도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경에서는 낮에 거닐거나밤에 거닐거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거님(ca?kamena)’ 이라는 말이 경행을 뜻합니다.

 

부처님은 경행을 강조했습니다. 낮에 거닐 때도 밤에 거닐 때 늘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심지어 잠잘 때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야에 잠잘 때 모로 누워 잠을 잘 때 알아차리면서 잠을 자고, 깰 때 역시 알아차리면서 깨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자형상을 하고 잠에 든다고 했습니다. 이는 등을 바닥에 붙이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테라가타에서 빠라싸리야 장로가 배부르게 먹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등을 대고 눕고 깨어서는 이야기를 즐기니 스승께서 꾸짖은 것들이다.”(Thag.935)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절대 바닥에 등을 대고 눕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하늘사람의 경행과 하느님의 경행

 

집중수행하면 경행과 좌선을 번갈아 합니다. 보통 한시간씩 번갈아 합니다. 좌선할 때 고요함을 맛 보았다면 경행할 때 날아 갈 듯 몸과 마음이 가벼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베나가뿌라의 경(A3.63)’에 따르면 하늘사람경행과 하느님경행으로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은 선정삼매에 들고 난 다음 경행에 대하여 말씀 했습니다. 삼매에서 나온 후의 경행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내가 이와 같이 되어서 거닐면, 그때 나의 거님은 하늘사람의 거님이며,..”(A3.63)라 했습니다. 선정에 들었다면 욕계를 벗아난 마음 상태입니다. 그 마음 상태가 경행에서도 그대로 지속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늘사람의 거님이라 했는데, 이는 천상의 경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단계 더 높은 경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무량심을 닦고 난 다음 경행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내가 이와 같이 되어서 거닐면, 그때 나의 거님은 하느님의 거님이며,..”(A3.63)라 했습니다. 자애와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인 상태에서 거니는 것에 대하여 하느님의 경행(범천의 경행)이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졸릴 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졸릴 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걷는 것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졸림의 경(A7.61)’에서 부처님이 졸고 있는 목갈라나 존자를 위한 법문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목갈라나 존자는 졸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이를 천안으로 본 부처님이 목갈라나 존자 앞에 나타나 혼침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 줍니다. 대강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대는 듣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상세히 암송해야 한다.

2) 그대는 양쪽 귀를 잡아 당기고 손으로 신체를 마찰해야 한다.

3) 그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양쪽 눈을 씻고 사방을 쳐다보고, 별자리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4) 그대는 빛에 대한 지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대낮에 대한 지각을 확립해야한다.

5) 그대는 앞과 뒤를 지각하면서 감관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정신을 밖으로 흩어지게 하지 않고 경행한다.

6) 그대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자가 누운 형상을 취해 누어야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졸림의 경(A7.61)에서)

 

 

운전할 때 졸리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껌을 씹는다든가, 창문을 열어 환기시킨다든가, 심지어 큰소리로 외쳐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운전 중에 쏟아 지는 졸음을 참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럴 경우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가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입니다. 명상 중에 졸음이 왔다면 자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가장 마지막 방법으로 사자형상을 취한 채 잠시 눈을 붙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졸음이나 혼침이 왔을 때 부처님은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오늘날 적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 중에 양쪽 귀를 잡아 당기고 손으로 신체를 마찰해야 한다.”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신체에 자극을 주어서 졸음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것도 통하지 않았을 때 경행하라고 했습니다.

 

연수원에 가면 하루 종일 교육을 받습니다. 지루한 교육을 받다 보면 강사의 말이 자장가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일어나서 뒤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서 있다 보면 졸음이 달아납니다. 정신이 맑아 지면 다시 자리에 앉아 강연에 집중하면 됩니다.

 

졸릴 때 잠자는 것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그것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자야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경행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대는 앞과 뒤를 지각하면서 감관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정신을 밖으로 흩어지게 하지 않고 경행한다.” (A7.61)라 했습니다. 이 말이 경행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일 것입니다. 경행이라 하여 단지 걷는 것도 아니고 몸을 푸는 것도 아니라 한동작 한동작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함을 말합니다.

 

다섯 가지 경행 공덕이 있는데

 

초기경전에는 경행에 대하여 수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경행이 단지 좌선을 잘하기 위한 몸푸는 동작이 아니라 끊임 없이 알아차리는 수행의 과정으로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경행을 하면 이익이 있고 공덕이 되는 행위라 했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경행공덕에 대한 경(A5.29)’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Pa?cime bhikkhave ca?kame ?nisa?s?. Katame pa?ca? addh?nakkhamo hoti. Padh?nakkhamo hoti. App?b?dho hoti. Asitap?takh?yitas?yita?1 samm? parin?ma? gacchati. Ca?kam?dhigato sam?dhi cira??hitiko hoti. Ime kho bhikkhave pa?ca ca?kame ?nisa?s?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긴 여행을 견디게 하고, 정근을 견디게 하고, 건강해지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을 완전히 소화시키고,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A5.29)

 

 

부처님은 다섯 가지 경행수행공덕을 말씀 했습니다. , 긴 여행을 견디게 하는 것, 정근을 견디게 하는 것, 건강해지는 것, 완전히 소화시키는 것, 집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경행 하는 것이 건강 유지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건강이나 몸풀기에 국한한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진정한 경행의 이익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마지막에 언급된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경행중에 어떻게 집중을 유지하는가?

 

수행승들은 별도로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가볍게 걸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운동이 됩니다. 걷긴 걷되 알아차리면서 걷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이십분 정도 짧은 시간이 아니라 좌선 시간 만큼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한시간 경행에 한시간 좌선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경행의 이익 중에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앉으면, 서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누우면, 앉아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경행하면,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행주좌와 간에 늘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앉아서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앉기도 하고, 일어나서 걸어다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합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늘 깨어 있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은 경행이 모든 수행중에서 가장 효율적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집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서 있으면 앉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것이 또 사람의 심리입니다. 누워 있으면 잠을 자고 싶어 할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아무 곳에 앉거나 아무 곳에 누워 결국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을 살아서는 가르침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자세가 좌선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좌선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가부좌를 한 상태로 한시간 가량 앉아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행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견딜지 모르지만 이제 갓 입문한 사람에게는 고문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라거나 좌선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방식입니다.”라 합니다.

 

수행의 힘이 없는 자에게 5분 앉아 있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경행을 하면 장시간 견딜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알아차림에 전념하면 집중이 될 뿐만 아니라 오래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라 했습니다.

 

경행을 하면 몸의 자세가 자주 바뀝니다. 그렇다고 집중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발 한발 옮길 때 마다 마음의 의도와 발바닥의 감촉을 알아 차리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집중이 됩니다. 이런 집중이 좌선할 때 보다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몸푸는 정도에 지나지 않은 포행과는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는 좌선과 함께 경행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경행 없는 좌선이 있을 수 없고, 좌선 없는 경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좌선과 경행은 늘 함께 병행합니다. 그것도 한시간 한시간 씩 같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경행을 하면 다리를 튼튼하게 건강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소화시키는 역할도 있고 무엇 보다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이는 경행에 몰두하는 자는 움직이는 대상을 표상으로 잡기 때문에, 그것은 서 있을 때에도 앉을 때에도 누울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초불연 앙굿따라 3 50번 각주) 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경행은 좌선이나 와선 등과 달리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 하기 때문에 자세를 바꾼다고 하여 포착된 표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리운동도 되고 소화도 시키면서 동시에 대상에 집중할 수 있고 더구나 오래지속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음을 말합니다.

 

사대(四大)를 알아차리는 경행수행

 

경행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학이 우아하게 걷는 듯 합니다. 그러나 절수행이나 주력수행 등 신체와 입을 통해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밋밋해 보일 수 있습니다. 천천히 걷는 모습이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느릿느릿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여 다이나믹한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이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행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 수행법입니다. 특히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최적의 수행법으로 보기도 합니다.

 

경행을 할 때는 발의 감촉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합니다. 동시에 손이나 발의 움직임도 포착합니다. 경행을 함으로 인하여 사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경행할 때 발을 올립니다. 이때 가벼운 느낌과 점점 위로 들려지는 느낌을 아는 것은 화대(火大)와 풍대(風大)를 동시에 아는 것입니다. 또한 발을 내 딛을 때는 무거운 느낌입니다. 이는 지대(地大)와 수대(水大)를 아는 것입니다. 발을 한번 들었다가 내딛을 뿐인데도 지, , , 풍 사대를 아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우리몸은 지수화풍사대와 사대와 관련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몸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몸은 물질과 함께 정신으로도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몸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행을 하면 우리 몸과 마음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발을 들기 전에 들려는 의도가 일어나고, 발을 앞으로 내밀기 전에 발을 앞으로 내밀려는 의도가 일어나고, 발을 아래로 내리기 전에 발을 아래로 내리려는 의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도가 있기 때문에 발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의도와 접촉에 따른 사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이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합니다. 이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mar?pa pariccheda ??na)’라 합니다.

 

우리 몸이 단지 정신과 물질 작용인 것을 알게 되면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거나 우리는 우연히 발생된 것이라는 등의 사견이 타파됩니다. 경행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 제1단계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여 알게 되면 우리 몸과 마음의 행위는 모두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게 이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paccaya pariggaha ???a)’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두 번째 지혜에 속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성숙되면 다음 단계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두 지혜는 경행만 잘 해도 얻어 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정신과 물질은 상호관계를 이루며 반드시 원인과 결과, 즉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는 현상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작은 수다원(c?la sot?panna)

 

경행을 하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 두 단계는 성취됩니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16단계 지혜 중에 두 번째 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만 성취해도 작은 수다원(c?la sot?panna)’(Vism.19.27)이라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

 

작은 수다원을 작은 성자또는 준성자라 합니다. 작은 수다원이 되면 성자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수다원에 대하여 안식을 얻은 자’‘태어날 곳이 정해진 자또는 발판을 얻은 자라 합니다. 이것이 경행을 하는 이익이고 경행을 하는 공덕일 것입니다.

 

 

 

2017-06-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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