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 껍데기 / 이요원 (2022. 5.)
폐지를 담는 할머니 등에 가을 햇살이 내려앉았다. 갈퀴 같은 손으로 옮긴 종이상자가 리어카에 가득했다. 그동안 우리 약국에서 빈 상자를 거둬가는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병이 나 대신 나섰다며 허리를 편다. 주름으로 깊은 골이 생긴 얼굴로 ‘후유’ 내쉬는 한숨에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 얼굴에 겹치는 얼굴이 있다.
고1 늦봄부터 집안의 공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장미 백일홍 족두리 꽃이 흐드러진 꽃밭에 잡초가 보이기 시작했다. 잉꼬와 문조의 새장 안 모래도 지저분해졌다. 부모님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커지기도 하고 터무니없이 작아지기도 했다. 그에 따라 내 귀와 눈은 커졌다. 사촌오빠의 사업 투자를 거절 못 해서 생긴 경제적 어려움과 믿었던 조카에게 당했다는 배신감은 부모님을 낭떠러지 끝으로 내몰았다. 게다가 땅 부자인 큰 집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해 우리 가족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도시 외곽의 허름한 집 뒷방 한 칸으로 이사했다. 마음을 다졌는데도, 막상 가년스러운 모양을 보니 애써 누르고 있던 절망감으로 속이 텅 비는 듯했다. 방은 햇볕이 들지 않아 늘 형광등을 켜야 했고, 달아낸 부엌은 비좁았다. 어두컴컴한 방은 마음까지도 어둡게 했다. 그러나 상실감이나 막막함보다 시급한 건 세끼 밥과 우리의 학비였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은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꽃을 가꾸고 새를 키우던 엄마는 부업으로 밤늦게까지 쪽파를 까거나 가발을 엮였다. 곱던 엄마의 손끝이 허물을 벗고 갈라졌다. 그걸 보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아버지는 화이트칼라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구해지지 않는 직장 때문에 예민해지고 자책감으로 예리한 면도날이었다. 일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조차 없는 오빠보다 매일 마주치는 아버지를 향한 무람없는 감정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좁은 방에 네 식구는 꼬투리 속 콩이었다. 각자 흘리는 냉기와 최소한의 대화로 집안에는 소소리 바람이 불었다.
찬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어 오스스 소름이 돋을 즈음 엄마 얼굴이 시득부득했다. 파를 까거나 가발을 엮을 때 밭은기침을 여러 날 했다. 밤잠을 줄이며 일하니까 감기가 오래가나보다고 짐작했다. 병원비가 무서운 엄마는 감기약만 사 먹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의 기침이 묵은 감기인 줄 알았는데 보건소에서 검진 결과가 폐결핵이란다. 순간, 방안은 무거운 침묵이 채웠다. 내가 먼저 어느 정도냐고 물었다. 엄마가 초기라며 약 먹고 2주 지나야 전염되지 않으니, 그때까지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를 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병이 그동안 가족 모르게 학교 쓰레기장에서 폐지를 모아 팔았고 그게 원인인 것 같다고 말씀 하셨다. 엄마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행여 들킬까 봐 우리가 다니지 않는 학교를 찾아다녔고, 먼지가 많아 마스크를 썼는데도 병에 걸렸다며 죄인 얼굴을 했다. 40대임에도, 50대처럼 시들어 가는 얼굴과 앙상하고 정맥이 불거진 손등에 눈이 갔다. 엄마가 가여워서 화가 났다. 나도 그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편하게 받아썼으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몹시 불편했다. 엄마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동생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엄마가 상황을 정리했다. 2주 동안 짐을 넣어둔 방에서 동생과 내가 잠자고 수건은 따로 쓰기로 했다. 가장 큰 근심은 엄마의 병이 알려지면 집주인은 방을 빼라고 할 것이었다. 그 집은 방값이 싸다는 것 외에도 젊은 주인 내외가 푸근하여 채소를 키울 수 있는 텃밭을 우리에게도 나눠주었다. 우리는 2주를 두 달처럼 느끼며 살얼음판을 걷듯 했다. 섭생을 잘해야 한다는 엄마 병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나는 절망감에 빠졌다. 학생인 데다 사시랑이인 내가 돈을 벌 방법은 없었다. 그저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엄마의 병으로 날카로운 말들은 푸수수한 말로, 소소리바람은 실바람으로 바뀌었다. 폐지 줍는 일을 그만둔 엄마는 소일거리라면서 여전히 수출용 스웨터 뜨개질이나 옷걸이 만드는 부업으로 내 속을 태웠다.
해가 바뀌고 초가을에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은 후 엄마는 도붓장수로 나섰다. 부끄럼 많던 엄마의 억척을 숨었던 성향으로 생각했다. 교납금이라든가 기타 목돈이 필요할 때면 장삿길을 떠나셨다. 품목은 옷감이었다. 당시 기성복보다는 맞춤옷이 대세였다. 집 부근의 섬유회사에 헐값에 파는 자투리 천을 사서 친척 동네를 돌며 팔러 다녔다. 천을 차곡차곡 접어 보자기에 싸면 부피가 크지 않아도 무거웠다. 보따리가 무겁다고 한들 삶의 무게보다 무거웠을까? 윤기 자르르 흐르는 고급 옷감을 보면 그런 옷을 입었던 엄마 모습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렸다. 무겁기도 하고 오가는 길이 힘이 들었겠지만, 무너진 자존심을 추스르는 게 더 힘들었을 테다. 친척들이 별 뜻 없이 한 말에 상처받는 날이 왜 없었겠는가.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가족들 식사 준비에서 벗어난 것이 홀가분해서 엄마의 마음고생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엄마의 보따리 장사와 아버지의 노동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없는 살림에 딸을 대학 보내는 정신없는 사람들이라는 친척들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엄마는 꿋꿋했다.
예전에는 논에서 우렁이 빈껍데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논에 가면 볼 수 있다. 빈껍데기는 색이 바래고 야물지 않다.
우렁이는 알로 태어나 어미의 몸속에서 부화해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하고 다 크면 밖으로 나온다. 결국 새끼들이 성장하면 어미의 목숨은 다한다. 새끼들에게 모두 주고 번 껍데기만 남아 흐르는 물길에 둥둥 떠내려간다고 한다. 새삼 이런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나도 딸인 동시에 엄마이기 때문이다.
허약체질이던 엄마가 집안이 곤두박질친 후 부린 억척은 우렁이 엄마처럼 자신의 살을 내어주고 빈껍데기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나는 우렁이 새끼였다. 그것이 자연 순환의 냉정한 이치일지라도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이기심이 원인이었다.
“괜찮아, 맏이인 네가 잘돼야지.”
내 몫을 하는 것이 엄마의 보람이고 기쁨일 것이라 여겼다. 어미 우렁이가 빈껍데기가 되어가듯 엄마의 진기가 빠지는 걸 알려고 하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내 사랑은 즉각적이고 가벼웠지만, 엄마의 자식 사랑은 늘 묵직했다.
폐지 실은 리어카를 껍데기만 남은 할머니가 끌고 간다. 여윈 팔에 힘줄이 불거진다. 허리를 구부리고 무겁게 발걸음을 내딛는 뒤로 저녁 긴 그림자가 따라간다.
첫댓글 이요원 선생님, 늦었지만 카페에서 등단작을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좋은 글로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