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조천읍 와산리 489-2번지. 당오름 북쪽 기슭
유형 ; 민간신앙(神堂)
시대 ; 조선∼현대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와산리의 옛 지명인 눈미, 또는 눌미의 당오름 밑에 자리한 데서 눈미 불돗당, 눌미 볼돗당, 웃당이라고도 한다. 당오름의 명칭은 당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누워 있는 산(와호산(臥乎山))이라는 데서 누온미, 눈미(와산(臥山))라고 했다는데 당이 들어선 후에 당오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남쪽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두 번째 오른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끝까지 가면 숲가의 밭 가운데 큰 팽나무 아래 붉은 스레트지붕으로 지어진 단칸집 안에 커다란 왕바위가 바로 당신이다. 이 건물은 한 재일동포의 성금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당의 신체(神體)는 가로 2m, 높이 1.5m, 두께 2m 정도의 큰 반석이다.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2014)에 따르면 마을 할머니들의 얘기로는 이 석상미륵에 노란 꽃(이끼)이 피면 시기가 좋고 검은 꽃이 피면 병이 들어 마을에 액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기자(祈子)가 주기능이며 곡식의 풍족함을 가져다주는 농경신의 성격도 갖고 있는 이 당은 마을 주민들이 중시하는 당으로 마을 역사가 긴 선인동의 김씨 가문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당신(불도삼승또)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본풀이①》
옥황상제의 막내딸아기가 부모의 말을 거역한 죄로 민간 세계로 귀양오게 되었는데 눈미(와산)의 당오름 꼭대기에 내려와 큰 바위가 되어서 좌정했다. 마을에는 중년이 되도록 아이를 못 가진 한 부인이 허허탄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시를 받으러 온 중에게 하소연한 즉, 홀연히 나타난 왕바위를 찾아 지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바위를 찾아다니던 부인은 당오름 꼭대기에 난데없는 큰 바위가 하나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마련하고 그 바위를 찾아가 제를 올렸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태기가 있고 해산 달이 가까워지자 다시 제를 지내려고 당오름을 찾았다. 무거운 몸이라 중턱에 앉아 쉬면서 부인은
"산 위에 계신 조상님이여, 영급(靈及)이 있거든 요만큼에나 내려와 좌정하십시오."
하고 축수한 뒤 산꼭대기에 올라가 제를 지내고 내려왔다. 마침내 생남을 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에서 또 제를 올리려 당오름을 오르다 보니 신기하게도 지난 번 축수를 올렸던 중턱 그 곳에 산꼭대기의 바위가 내려와 있었다. 거기서 제를 지내고 난 뒤 이번엔
"이왕이면 더 평평한 데로 내려와 좌정하십시오. 일만 자손이 조상님으로 모실 것이옵니다."
하고 축원을 올리고 돌아왔다. 며칠 뒤 다시 가 보았더니 그 신령스런 바위는 마을 가까이 만년 묵은 팽나무 아래 좌정해 있었다.
그로부터 매해 음력 삼월 열사흘은 대제일(大祭日)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리게 되었으며, 그 밖에도 매달 초사흘, 열사흘, 열이렛날에는 심방을 모시고 치성을 드린다고 하며, 특히 아이 없는 여인들은 간절한 소원을 안고 곳곳에서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김종철, 오름나그네 3. 191-192쪽)
《본풀이②》
와산(臥山)리 주민이면서, 갓 스물부터 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이제 6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당과 함께 보낸 고명월 할머니(2013년 79세)가 말하는 불돗당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몇 백년 전 일이었다. 옥황상제의 막내 딸아기의 전생이 궂어 아버님 눈에 나고 어머님 눈에나 미륵보살로 환생하여 인간땅으로 내려왔다. 꽃피는 삼월 열사흘 백록색 저고리에 연반 물치마를 입고 외코 접은 백복버선 신고 새(鳥)그려 새참빗, 용(龍)그려 용얼레기로 쉬흔 다섯 자 머리를 허울허울 빗어 놓고 꽃댕기 드리우고 인간땅에 내려왔다. 인간땅을 짚어 보고 당오름 중허리로 내려왔다. 어느 자손에 가서 상단골(신앙민)을 청해 보랴하고 살펴보니 내 생이 묵은 가름(現선인동) 김상잔 집 따님아기 시집간 지 이십 둘 삼십서른 넘고 사십마흔이 다 되었다. 남답북답 넓은 밭도 좋고 마소(午馬)도 풍성하였는데 대를 이을 아이가 없어 연일 탄식이었다.
어느 날 꿈속에 할머님이 현신하여 말하기를 “너 김상잔집 따님 아기 아니냐?”
“예”
“부모 몸에 탄생한 후 열다섯에 시집가 남답북답 밭도 좋고 마소도 풍족한 데 애기가 없어 걱정이 아니냐?”
“예”
“내일 아침 저 당오름 중허리에 올라보라. 난데없는 석상 미륵이 있을 터이니 산메에, 돌레떡에, 백시리, 계란, 미나리채, 청감주나 해서 정성을 들여 보면 석달 열흘 백일이 채 못 돼 알아볼 도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따님아기는 당오름 위로 가서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난데없이 큰 석상이 거기 있었다. 그 곳에서 기원을 드려 따님아기는 드디어 임신을 했다.
그런데 임신이 되고 아홉달 열달이 되어가니 앞동산은 높아지고 뒷동산이 낮아져 (배가 불러서) 올라 갈 수가 없었다. 기어서 올라간 따님 아기는
“아이고 할머님아 저 아래 고장남밭에 좌정하였더라면 오가기가 좋을 걸, 앞동산은 높아지고 뒷동산은 낮아져 네발 손으로 기어 왔다 갑니다.”
하고 말했다. 그날 밤 하늘에 천둥치고 지하가 요동하여 벼락 천둥을 치더니 다음 날은 어느 틈에 그 미륵돌이 고장남밭으로 굴러와 있었다.(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2014)
당신(堂神)은 아이의 포태와 출산뿐만 아니라 육아와 치병까지 두루 관장하는 신으로 제주 지역 무속신화에 나오는 삼승할망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2014)에 따르면 이당의 한쪽 구석에는 수렵·목축신인 한라산신이 좌정해 있어 당 전체로는 생산 및 생활전반을 관장한다는 성격을 갖고 있다.
불돗당의 정기 제일은 음력 3월 13일과 7월 7일 두 번, 곡식을 거두고 난 후 그 감사의 뜻으로 음력 11월 7일이나 27일 당을 찾기도 한다. 당제가 열리는 날 심방들은 신석이 있는 당집에 들어가기에 앞서 당오름 중간에 위치한 샘물머리에서 삼석울림을 한다. 샘물머리는 '불도삼승또'가 좌정하기에 앞서 지나온 곳으로 심방들은 이곳에서 삼석을 울려 신을 모셔간다. 그런데 1998~2000년 경에는 신석의 가운데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깨지는 일이 있었는데, 현재까지도 어떠한 이유에서 누가 그랬는지 정확히 이유를 모르고 있다.
불도당제가 마무리될 쯤에는 산신놀이가 행해진다. 산신놀이는 수렵과 목축의 신인 '백중와살'이란 산신을 위하여 벌이는 놀이굿이다. 포수 두 명이 사냥감을 다투다가 화해하고 사냥감을 나누는 과정을 연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 준다. 중산간 마을에서는 근세까지 농경과 더불어 수렵 활동을 계속해 왔는데, 산신놀이는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집안에서 사냥철을 앞두고 행하는 큰굿에서 연행된 놀이였다. 주로 사냥하는 모습을 연출한다고 해서 '사농놀이'라고도 부른다. 와산리가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로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산신놀이가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매인심방은 신촌리 고군찬 심방이었는데, 이용옥(김윤수 큰심방의 부인) 심방으로 이어졌다. 이 심방 부부의 수양어머니인 고 고군찬 심방이 돌아가시면서 1985년 경부터 이들이 와산리 불돗당제를 집전하고 있다. 수양어머니인 고 심방 또한 제주에서 굿을 잘해 이름을 날리던 큰심방이었다.(한라일보 131212)
와산리 마을의 단골외에도 결혼 후 아이를 못가져 마음을 태우는 여성이나, 자녀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부모들이 찾아 신에게 정성을 드리기도 한다. 당제가 시작되면 심방이 본풀이를 하는데 우선 불돗당 본풀이를 먼저하고 다시 알당 본풀이까지 하는 것이 이곳만의 특징이다.
마을 주민들은 당의 신령이 세다고 하면서 "사령이 말 탕 가당 말 발이 딱 자령(저려서) 꼼짝을 못해났젱 허고. 도비상이가 신령 때문에 못 강 실을 올렸젱 허주. 일본 강 사는 사름덜도 마을에 온 땐 꼭 이 당에 들령 가곡 허는디, 굿은 할 땐 3월 13일인디 하루종일 허매. 당새미가 이 왕돌이 내려왕 셔난 디라부난 여기서부터 장귀·북·쇳소리 내왕 들어오멍 굿을 시작허는디 자식 이신 사름은 수륙을 드려사 허주."(2006년 2월 12일 와산리 거주 76세 채평일씨와 대화)
고명월 할머니(2013년 79세)는 이 불도 할머니가 마을 주민들을 구해줬던 역사를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18세 되던 해(1954년) 제일 날, 미륵돌이 두덩어리로 쩍 벌어져 마을 사람들에게 흉사를 예고해 줘서 마을 사람들이 피했고, 마파람이 부는 어느 날 큰 불이 나서 마을 가운데로 타들어가 37가호를 태우며 마을을 두 쪽으로 갈라놓을 정도였지만 사람은 1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그후에 가보니 그 돌이 저절로 달라붙어 갈라졌던 것 같지 않게 되어 있더라면서 믿기지 않는 말을 하기도 했다.(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2014)
《작성 041230, 보완 131212, 1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