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와 붓다의 미소
배성옥
우리에게 『쟝 크리스토프』의 작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문호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은 원래 음악평론가였다. 그가 베토벤의 삶을 소설화한 작품『베토벤의 생애』에서 피아노 소나타 제 32번 2악장 ‘아리에타(Arietta)’를 두고 “붓다의 미소”라고 한 표현은 음악인, 특히 피아니스
트들의 입에 자주 오르는 유명한 문구가 되었다.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출신 피아니스트 주 샤오메이도 이에 대하여 자신의 자서전 『마오와 나의 피아노』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참된 슬기로움의 소유자에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기실 아무 것도 아니다. 진정한 힘은 그의 내부에 있다. 옥에 갇힌 죄수라 해도, 버림받고 중상모략 당한다 해도, 참으로 슬기로운 자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참된 자유를 깨달은 사람이다.
이를 가장 훌륭히 표현해주는 음악작품은 베토벤의 마지막「피아노소나타 작품 111번」이라고 생각된다.”(383쪽)
필자는 프랑스어로 쓰인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던 중, 이 대목에 이르러 당혹감을 금할수 없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참된 자유”와 “붓다의 미소”, 서로가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어찌하여 세 마디 문구가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때마침 미국 동부에 사는 대학 동기동창이자 신심 깊은 불자친구 덕분에 이해가 가능해졌고 따라서 어려운 대목의 번역도 그럭저럭 매듭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위 세마디 문구를 대략 다음 세 가지 요점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로맹 롤랑의 프랑스어 문구를 글자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다면 “붓다의 움직임 없는 미소”가 된다. 이 “움직임이 없는 미소(sourire immobile)”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몰라 ‘고요한’, ‘잔잔한’ 등등의 여러 형용사를 놓고 고민하는 나에게 친구가 ‘원각경(圓覺經)’의 게송(偈頌)에 ‘각자부동(覺者不動)’이란 구절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한데, 이 넉자의 한문이 ‘깨달은 자는 움직임이 없다’라고 풀이된다면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가 바로 ‘깨달은 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로맹 롤랑의 표현과 거의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한 편, ‘깨달은자’는 또한 주 샤오메이가 얘기하는 “참으로 슬기로운 자”, 참된 지혜에 다다른 자와 다르지않기에, 나아가 성불(成佛), 즉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른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둘째,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Nirvana’를 한자로 음역한 말이다. 독일의 불교학자 하인츠베헤르트(Heinz Bechert)는 서양 사람들 대부분이 ‘니르바나’를 허무주의(nihilism)의 견지에서 해석하려고 하지만, 기실 ‘니르바나’의 참뜻은 “갖가지 정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진실로 마음의 자유에 다다른 지복(至福)의 상태”라고, 석가모니의 제자 사리푸타(Sariputta)의 표현대로 “더 없는 행복, 지복이 곧 니르바나(Bliss is nirvana)”라고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주 샤오메이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참된 자유를 깨달은 자”야말로 ‘니르바나’에 이른 자, 지복(Bliss)의 상태에 이른 자가 아닐까.
셋째, 이렇듯 지극히 행복한 자이기에, 달리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그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내면의 고요함, 마음의 평정(平靜)을 잃지 않는 자이기에, 그의 입가에 흐르는 “움직이지 않는 미소(sourire immobile)”를 우리는 쉬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게 된다.
「피아노소나타 작품 111번」을 작곡하던 당시 베토벤은 이미 청각을 완전히 잃은 음악가였다. 이 작품은 그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와 진실로 마음의 자유를 누리게 된 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음악,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울려퍼지는 “환희(歡喜)의 음악”임을 주 샤오메이는 제 2악장 ‘아리에타’를 통하여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피아니스트 주 샤오메이 또한 오랜 세월동안 그 지독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음악의 힘으로 헤쳐 나와 마침내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된 과정을 자신이 걸어온 삶의 이야기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차분히 들려주고 있다.
주 샤오메이는 고국을 떠난 지 34년째 되던 2014년 가을에 중국의 주요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베풀었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준 음악,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고향땅 가는 곳마다 연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바흐 음악을 연주할 때 제일 먼저 추구해야할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느냐는 음악학도의 질문을 받고 샤오메이는 주저 없이 “균형”이라고 대답함과 동시에 “바흐는 불교도(佛敎徒)”라고 덧붙여 말했다. 이는 서양 사람들, 특히 루터교 신도들의 귀에 얼토 당토 않는 소리로 들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주 샤오메이의 책 속에서 이렇듯 자세하고도 명료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작품 속에 담겨 있는 갖가지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골고루 두드러지게 표현해 낼 수 있도록하는 균형(均衡)”(323쪽), 이는 곧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절대 진실의 도리, 즉 중도(中道)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샤오메이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오늘 우리의 화두(話頭) ‘붓다의 미소’로 이어진다.
“불상(佛像)에 나타난 부처의 모습은 모두가 하나같이 언제나 미소(微笑)를 머금고 있다.
(...)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통하여 나는 비로소 ‘다성(polyphony)’음악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바흐의 작품이 다른 어떤 음악작품보다 감동을 주는 연유(緣由)를 깨닫게 되었다. 다양한 소리를 동시에 들려주는 다성(多聲)음악만이 우리의 다양한 감정을, 이런 저런 모습으로 서로들 부딪치고 대
립하는 감정을 ‘동시에’ 여럿이 울리는 소리를 통하여 - 그렇다고 한 소리가 다른 소리보다 우세하지도 않으면서 - 골고루 균형 있게 표현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3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