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자락에 둘러싸인 농암종택. 주변 풍광이 농암의 인품처럼 호방하고 시원하다. 타원형의 넉넉한 얼굴에 거무스름한 낯빛, 가슴에까지 닿은 길고 덥수룩한 흰 구레나룻, 검고 부리부리한 눈망울과 그 위에 일자로 뻗은 선명한 눈썹, 남의 말을 잘 들어줄 듯한 큼지막한 귀, 70대 노인이라곤 믿기지 않는 붉은 입술. 그 가운데 둔덕처럼 두툼하게 솟아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는 주먹코까지, 한마디로 호방하고 활달한 인상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한글 강호문학의 초석을 닦은 대시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초상화(보물 제872호)에 대한 느낌이다.
농암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71세 때 그려진 이 초상화를 처음 본 순간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자화상이 서릿발 같은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선비상의 표본이라면, 농암의 초상화는 온화한 미소 속에 결기가 번뜩이는 외유내강의 선비상을 보여준다. 사람은 불혹을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어떻게 살면 저런 얼굴로 늙을 수 있는지, 궁금증이 일던 지난달 27일 경북 안동의 농암종택을 찾았다.
■ 임금이 인정한 적선지가
| | | 농암의 초상화. 경상도 관찰사 재직 시절 동화사 스님 옥준상인이 그렸다. 안동시청 제공 |
농암종택은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佳松峽)과 도산서원 사이 두루마리 그림처럼 펼쳐진 낙동강변에 있었다. 6600㎡의 너른 땅 위에 들어선 종택은 농암의 고조부인 입향조가 지은 긍구당(肯構堂), 농암이 손수 건축한 명농당(明農堂), 사랑채, 안채 등 6채의 크고 작은 건물로 구성돼 있었다. 오색 단풍이 무르익은 산기슭에 등을 기댄 종택은 깎아지른 벼랑을 마주보고 있었고, 그 사이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휘돌아 나갔다. 벼랑은 천연 성곽을 이뤄 굽이굽이 도산서원 쪽으로 뻗어 내려갔고, 강은 벼랑의 그림자를 담아 그 우뚝한 기상을 농암종택을 비롯한 인가들에 전했다. 종택 주변의 풍광은 농암의 인상처럼 호방하고 시원했다.
종택 사랑채의 마루 벽에는 '적선(積善)'이란 글씨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必有餘慶·적선지가필유여경)'는 주역 문언전의 글귀로, 크기가 1m에 달하는 조선 선조(1552~1608)의 어필이다. 농암의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이 왕자사부로 임명되어 선조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자, 임금은 "너의 집안은 적선지가가 아니냐"며 즉석에서 이 글씨를 써 하사했다고 한다. 선조가 인정한 농암 가문의 적선은 어떤 것일까.
| | | 농암종택 사랑채에 걸려 있는 '적선' 어필 |
으뜸은 농암이 목민관으로 일할 때의 치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신분을 가리지 않은 경로였다. 농암은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1519년(중종 14년), 관내 80세 이상 노인 수백 명을 초청해 성대한 경로잔치를 열었다. 양반은 물론 서민과 천민까지 망라한 잔치였다. '풍년 들고 계절도 청명한 구월에/관청에서 노인들 모아 잔치를 열었네/허연 수염을 지닌 이들 부축하는 곳/주변에 붉은 잎과 노란 꽃이 현란하여라/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지고 두루 술을 권하니/청사 안팎에서 악기 소리 그치지 않는구나/술동이 앞에서 때때옷 입은 일 이상하게 여기지 말게나/내 부모님도 이 자리에 계신다네'. 농암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모에게 하듯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부리며 노인들을 위로했다.
농암은 경상도 관찰사와 안동 영주 등 8개 고을의 수령으로 일하는 동안 청백리로 명성을 얻었다. 아는 사람이 많은 경상도 관찰사로 봉직할 때는 친·인척과 지인들이 공관에 출입하는 것을 엄격히 차단하는가 하면, 영천(현 영주)군수로 재직 시에는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는 방법으로 거두지 못한 세금을 충당하면서 납세자가 사정이 어려워 연체한 세금 문서를 모두 불태워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한 충주 백성은 농암이 안동부사로 전근 가자 "(충주) 백성들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농암을 충주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해달라"고 조정에 상소하기도 했다.
■ "얼마 안 남은 날 아껴 효도"
| | | 종택 옆에 자리한 애일당. |
선조가 칭송한 농암의 그다음 적선은 효도였다. 농암은 46세 되던 1512년, 도산서원에서 1㎞가량 아래에 위치한 고향집 근처 영지산 기슭의 귀먹바위(농암) 위에 애일당(愛日堂)을 지어 부모님을 모셨다. '애일'은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아껴 어버이께 효도하겠다'는 뜻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애일당은 1975년 안동댐 건설 때문에 도산면 분천리로 옮겨졌다가 2005년 다시 도산서원 위쪽인 도산면 가송리의 현재 장소에 농암종택과 함께 나란히 이건됐다.
67세이던 1533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농암은 휴가를 얻어 아버지와 숙부, 외숙 외 고을 노인 6명을 초청해 애일당에서 또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른바 '애일당구로회'다. 이를 계기로 1547년 농암이 참여한 '속구로회'가 이어졌고, 20세기 초까지 참석자 수를 9명으로 제한하지 않은 채 '기로회' '백발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경로잔치가 계속됐다. 1602년에 열린 경로잔치의 기록에는 '오천에서 한 평민이 왔는데 나이가 101세라 한다'는 글귀도 있다. 농암이 뿌린 효의 씨앗이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지역사회의 경로문화로 정착된 셈이다.
농암은 또 진퇴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직언했고, 물러날 때는 미련없이 관복을 벗고 표표히 떠난 진정한 선비였다. 벼슬살이 초기 그의 별명은 '소주도병(燒酒陶甁)'이었다. '겉모습은 검고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맑고 곧다'는 뜻인데, 이 별명은 사관 시절 그가 연산군에게 했던 직언에서 유래했다. 농암은 대간(臺諫:대관과 간관)들보다 임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을 듣고 기록할 수 있게 하고, 이조와 병조의 인사 담당 관리들이 직무를 보는 정청(政廳)에 사관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언했다. 사관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신진관료가 주제넘은 건의를 한다"며 농암을 장형에 처했다.
| | | 농암의 귀거래 의지가 담긴 각자. |
농암은 76세 때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43세 되던 해 지은 명농당 벽에 귀거래도를 그려 붙여놓고 귀거래를 꿈꿔왔으나, 임금의 은퇴 불허로 속앓이를 하다가 33년만에 꿈을 이룬 것이다. 농암이 한양을 떠나던 날 많은 조정 신료가 한강에 나와 그를 배웅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말렸으나 소매를 뿌리치고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자유로이 떠났다. 배 안에는 오직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 중종실록 37년(1542년) 7월 3일의 기사에 적힌 그날의 모습이다. 선비들은 그런 그를 두고 "만족할 줄 아는 뜻이 있다"고 평했다. 농암의 귀거래 의지는 현재 애일당 앞에 세워져 있는 '농암 각자(刻字)'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일에 귀를 닫고 오로지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이 담긴 이 각자 역시 수백 년 세월의 때가 묻어 자연의 한 물상으로 변해 있었다.
■ 한글 강호문학의 효시 | | | 애일당 앞에 우뚝 솟은 벼랑 |
고향에 돌아온 농암은 귀먹바위에 올라 '농암가'를 읊으며 귀거래의 기쁨을 만끽했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얼마나 낙향하고 싶었으면 노안이 밝아지는 것일까. 시에서 농암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농암은 이어 그 유명한 '어부가(漁父歌)'를 편찬한다. 장가 9수와 단가 5수로 된 이 시가는 전래하는 민초의 노래를 수집해 줄이거나 새로 덧붙여 맛깔나게 정리한 것이다. '만사 무심히 오직 낚싯대에 뜻을 두니 정승 자리라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네/돛 내려라 돛 내려라 산 계곡에 비바람 치니 낚싯줄 거두리라/찌그덩 찌그덩 어엿사 평생 자취가 푸른 물결에 있네'.
어부가는 한글 강호문학의 효시다. 그전에 한문으로 된 강호시가는 있었지만 이를 읊을 수는 있어도 우리의 느낌과 흥취를 담아 노래하지 못한다는 점을 농암은 아쉬워했다. 농암이 개척한 한글 강호문학은 송순(宋純·1493~1583)의 '면앙정가(俛仰亭歌)'를 통해 폭이 넓어졌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했다.
농암은 88세 되던 해 "장례는 기한을 넘기지 말고 상사는 간략하고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편히 눈을 감는다. 실록은 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지중추부사 이현보가 졸하였다. 이현보는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는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관에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근래에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를 으뜸으로 친다." 치우침 없는 객관적인 비평을 최고 가치로 삼는 사관이 한 인간의 삶을 정리하면서 이처럼 허물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드물다.
# 농암과 퇴계의 강호지락
- 詩와 자연 벗삼은 둘…학문의 도반이자 인생의 친구로 존경
농암은 은퇴 후 고향집이 있는 분강촌 앞을 흐르는 분강 일대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501~1570) 등 후배 학자들과 함께 시와 자연을 벗 삼는 모임을 가지며 풍류를 즐겼다. 특히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았던 퇴계와 교류가 많았다. 농암은 이런 강호지락(江湖之樂)을 퇴계에게 물려준다고 했고, 퇴계는 이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어 물빛이 흐릿하매 촛불을 켜 밝히니, 바위가 강 한가운데 있고 강물이 바위에 이르러 (양옆으로) 나뉘어 흐른다. 그 한 줄기가 내 자리 곁으로 흘러내려 가는데 아래쪽에 경호(景浩·퇴계의 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장난삼아 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뗏목에 올려 띄우면 경호가 웃으며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하였다." 퇴계와의 놀이를 묘사한 농암의 글이다. 티끌세상을 벗어난 신선들이 선경에서 노니는 듯하다.
퇴계의 제자는 스승이 놀러 다니는 데만 몰두하는 것 같다며 걱정 섞인 충고를 했다. 그러자 퇴계는 "농암 선생이 임천지락(林泉之樂)을 나에게 물려준 까닭이 바로 여기(도산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기는 것)에 있다"며 달랬다. 놀이를 심신수양의 연장으로 본 것이다. 농암과 퇴계는 서로를 학문의 도반이자 인생의 친구로 존경했다.
퇴계는 농암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했다. "죽음을 맞이하매, 아들들이 둘러서서 울음을 억누르고 있으니 공(농암)이 둘러보고 '내가 나이 90이 되도록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고, 너희도 모두 잘 있으니 전혀 유감이 없고 죽어도 영광이다. 너희도 의심하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마치고는 정신이 또렷하신 상태로 돌아가시니 공은 가히 죽음에 이르러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