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히 구원의 방주에 승선하라!(행20:22-28)
- 왜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① -
2022.5.29 성결교회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제가 교회에 다녀야 할 이유가 뭔가요?”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한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에 다닌다(또는 나간다)’는 말은 단순히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뜻한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평상시에 잘 알고 있는 것도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적절한 대답이 선뜻 생각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우리들이 왜 교회에 다녀하는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나누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자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큰 지혜와 능력을 주실 줄 확신한다.
우리들이 교회에 다녀야할(또는 주님을 믿어야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천국에 평안히 들어가기 위해서 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행 구원의 방주에 승선하는 것과 같다. 미국에 가려면 미국행 비행기나 배를 타는 것이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려면 천국행 교통수단을 타야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배에 비유하자면, 지구상 각 지역에 있는 복음적인 교회들은 각각 그 지역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국행 구원의 방주와 같다(이단은 짝퉁일 뿐 교회가 아님). 우리들이 죽음의 바다를 건너 천국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길은 오직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배를 타고 건널 때이다. 그 구원의 배가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은 우리 지역을 위해서 “안흥교회호(號)”를 보내주셨다. 우리들은 지금 그 배 안에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20장 28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 앞에서 영혼구원을 위해 주신 사명을 고백하면서,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다 같이 함께 읽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 말씀처럼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피(예수님)로 세웠다. 그렇기에 교회라는 구원의 방주의 선주(船主)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선장(船長)은 예수님이시고, 배의 꼭대기에는 십자가라는 깃발이 세워져 있다. 목회자와 여러 직분들은 배 안에서 승객들을 섬기도록 세움 받은 선원(船員)들과 같고, 승객들은(앞으로 믿어야할 지역 주민들을 포함) 모든 성도님들이다. 이 배에 정원초과라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구원의 방주 안에 최대한 태워야 한다.
이처럼 천국행 구원의 방주에 “속히 올라타라”고 말해주는 것을 전도(傳道)라고 한다. 만약 여러분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같이 교회에 가세……. 예수님을 믿고 함께 천국에 가세”라고 말했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행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라고 말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전도이다. 물론 탑승을 권유할 때 타고 안타고는 그것을 듣는 사람이 선택할 문제이다. 그러나 말해줘야 할 책임은 성도들에게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이고,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얼마 전 태국의 어느 지역 공사장 근처에서 아스발트 구덩이에 빠져서 죽어가는 개를 구조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동물 뿐 아니라 사람들도 늪이나 구덩이에 빠져서 실종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바닷가 갯벌에는 이런 유사한 것들이 더 많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실존이 마치 이와 같다.
만약 사랑하는 어린 자녀나 손주가 늪에 빠졌거나 길거리에서 양아치들에게 얻어맞는 것을 봤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맨발로라도 즉시 뛰어나갈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들 한 분 한 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지체하지 않고 달려오셨다 .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단순한 어떤 원리나 철학이나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절규이며, 하나님이 던져 주신 생명의 밧줄이다.
지금 우리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늪이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과 복음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율법 - “야~ 너 왜 규정대로 안하고 거기에 갔어!”
* 철학 - “너를 구해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증명해봐”
* 과학 - “먼저 늪의 성분과 깊이와 넓이를 분석하고 계산해 볼께”
* 종교생활 - “더 열심히 스스로 몸부림치고 노력해 보게나....”
* 복음, 교회 - 즉시 밧줄을 던져서 구해 주고, 배에 태워 항구로 돌아온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방주에 탑승하는 것을 미루고 심지어 의심하고 거부한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갑자기 배의 문이 닫히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때는 발버둥 치며 후회하고 탄식해도 늦는다. 노아의 홍수 때도 그랬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주님은 재림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홍수 때를 언급하셨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굳이 이러한 성경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이 시대를 종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구 종말 시계(Doomsday Clock)”같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지금이 종말 몇 분 전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아인슈타인 등이 시작, 1947년에 시작할 때는 종말 7분전, 현재는 100초전).
설령 이러한 인류적인 종말이 아니어도 그 이전에도 우리들은 각종 사고와 질병 등으로 늘 개인적인 종말이 만난다. 최근에 본설교자가 아는 지인 중에 한 분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회복하기 쉽지 않은 깊은 병에 걸려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우리 주변에는 믿기는 믿는데, 안일한 마음으로 꾀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는 것을 쉬는 분들도 있다. 이런 것들은 마치 배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바다 한 가운데서 무모하게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은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보듯이 무리에서 떨어져서 혼자 초원을 거니는 어린 야생 동물과도 같다. 맹수가 숨어서 노린다. 영적으로는 그 맹수가 바로 마귀 사탄이며, 그 바람잡이들이 이단들이다.
그렇기에 아직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는 분들은 지금 기회가 있을 때, 배가 출발하기 전에 구원의 방주 안으로 속히 들어가야 한다. 미루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넉넉하고 평안하게 도착할 수 있다. 만약 믿다가 쉬고 계신 분들은 속히 다시 타야 한다.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계속해서 주님 안에 굳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빨리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라”고 말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 다녀야 할 이유이고, 교회의 본질이다.
마침 오늘이 성결교회주일이다(사진-교단마크). 우리들이 속한 성결교회는 1907년 처음 출발에서부터 지금까지 둘째라고 말하면 서러울 만큼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뜨겁게 전도와 선교사역에 힘써왔다. 이것은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결교회의 전도표제인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도 첫 번째가 중생이다.
중생(重生, 다시 태어남)이란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천국행 구원의 방주에 탑승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된 후에 다른 것들(교육, 예배, 봉사, 교제, 기타)이 그 뒤를 잇는 것이다. 교회의 활동이 일반 봉사단체들과 구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덮어놓고 믿지 말고, 성경을 펼쳐놓고 믿어야 한다. 열심히 믿는 것보다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왜 교회에 나와야 하고, 왜 교회에 나오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는 하나님이 독생자의 핏값으로 세우신 유일한 천국행 구원의 방주이기 때문이다. 언제 방주의 문이 닫힐지, 언제 개인적인 종말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 즉시 믿음으로 생명의 배에 승선해야 한다. 이미 승선한 성도들은 최대한 더 많은 인원을 구원의 방주에 태워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며,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이다. 복음의 능력은 단지 그것을 갖고만 있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할 때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