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패티김 이야기 ◎ *
반세기를 한 분야에서 최고라는
명예와 평가를 받으며 산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격조 있는 무대매너와
강렬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우리 가요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패티김은 그렇게 타의 모범이 되도록
자신의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1959년 꽃다운 스물의 나이에 악극단의 퇴조를 부추긴
미8군무대를 통해 데뷔한 패티김(본명 김혜자)은
이듬해 광복 후 일본 정부로부터 초청된
최초의 가수로 일본 진출이라는 화제를 모았다.
이어 팝의 고장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활동무대를 넓혀
미국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
쟈니카슨 투나이트쇼’에 출연하는 등
공연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4년간의 미국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패티김은
1967년 TBC와 KBS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
패티김쇼’를 선보임으로써 국내 개인 프로그램의 시초가
되는 이력을 새겼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만큼
그녀의 행보는 주목을 받았다. 1967년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 출연해 노래 실력 못지않은
연기력을 선보이며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끼는 1974년 여름 개봉된 영화
이별’에서 신성일과의 열연으로 이어졌다.
서울 관객 5만명이라는 흥행 성적표를 올렸으나
그녀는 가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성숙함을 보였다.
1989년 가요계에서는 놀랄 만한 경사를 맞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예술 무대만을 허락한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중가수에게 공연을 허락한 일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당시 대중가수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세종문화회관의 첫 입성 역시
패티김의 몫이었으니 가수로서의 그녀의 위상을 가늠할 만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데뷔 30주년인 1989년 패티김은 우리나라 대중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단독콘서트를 열어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의 대중음악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함으로써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국민에게 경이로운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음악팬들에게 받은 사랑과 부와 명예를 모두 돌려주기 위해 죽는 날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패티김은 사회복지기금마련 공연을 수없이 펼쳐오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데뷔 45주년 공연에서 최근 가수로 데뷔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딸
카밀라와 함께 열창하는 모습은 공연장을 찾은 관객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초우’ ‘서울의 찬가’ ‘못 잊어’ 등
주옥같은 수백곡을 남긴 그녀의 나이 80세. 반백의 가수 인생은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모자람이 없다.
“여가수는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잃으면 안 된다. 아름다움을 지키려면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참는 자세가 요구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게 없다’는 게 내 신조다”고 말하는 그녀는
나이를 거꾸로 먹으며 여전히 노래로 우리 가슴을 파고들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답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으리라.
본명 김혜자 1938-02
학력 중앙여자고등학교(졸업)
데뷔 미8군 무대 데뷔
수상경력 동경국제가요제(3위,1974),여성을 돕는 여성상,
대한민국 연예예술상(대상,1996),대한민국 화관 문화훈장
작곡가 길옥윤(작고)과의 사이에서 딸 진아와
이태리 남편 사이에서의 딸 카밀라가 있다.
TV - 속 이별(2004,없음), 한국영화 특선(2003,EBS),
열린 음악회(2001,KBS1),
정미정의 추억,그리고 노래 스페셜(2001,KBS2)
영화 - 속 이별(1974)
대표곡 - 초우, 이별, 못잊어
연극 - 살짜기 옵서예(1968)
기타경력 -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1999),
대전 엑스포 조직위원회 명예홍보요원,
<자니카슨 투나잇쇼>에 8회 출연,
국내 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과 카네기홀,
시드니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
[참고]吉屋潤 1927∼1995 대중음악 작사·작곡가. 색소폰 연주가.
평안북도 영변(寧邊) 출생. 본명은 최치정(崔致禎).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1943년 경성제대 치과에 다니다 음악에 심취,
광복 직후 그룹 <핫팝>을 결성하여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62년 《내 사랑아》로 가요계에 데뷔한 뒤
<4월이 가면>서울의 찬가》《이별》 등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한많은 곡을 발표하였다.
66년에는 패티김과 결혼하였으나 7년 뒤 이혼하였다.
각종 가요제·재즈 연주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서울올림픽 폐막식 음악,
남태평양 마셜공화국 국가(92년)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서양음악을 적극 수용하면서 한국적 색깔을 가진 음악을 만든 것은
가요사의 큰 업적으로 남는다.
[한국일보-추억의 LP 여행] 패티김
한국의 패티 페이지
국내 최초 개인 리사이틀
서구적인 외모와 시원한 목소리, 깔끔한 무대 매너, 몸 관리 등의
덕택으로 반 세기 가까이 카리스마의 가수로 군림해 온 패티김.
그녀는 "사랑하는 마리아", "서울의 찬가", "빛과 그림자", "모정", ‘
이별’, ‘초우’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만큼
히트곡을 양산해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초대형 가수였다.
94년 MBC 라디오에서 선정한 "가장 즐겨 듣는 한국가요 100곡"에는
"초우","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 여자 가수로는 가장 많은
3곡이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의 본명은 김혜자. 일본 명지대 출신의 엘리트였던 김인현씨와 숙대의
전신인 경성보육학교를 나온 차옥성씨 사이의 3남 5녀 중 여섯째로
1938년 1월 29일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잘 울지도 않고, 다른 아이들과 다투면
꼭 이겨야 직성이 풀렸던 야무진 성격이었다.
부친이 재혼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혜화동으로 이사를 가
혜화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커 나이보다 항상 숙성했던 그녀는 골목대장 노릇을
할 만큼 개구쟁이 이기도 했다.
눈이 가늘었던 그녀의 어릴적 별명은 "실죽이".
종로 화신 뒤로 이사를 간 후로는 화신백화점이 놀이터였다.
이후 당시에는 시골이나 진배없었던 흑석동으로 이사를 갔다.
자연에 묻혀 산 이 시절을 두고, 그녀는 평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당시 저녁식사가 끝난 후 식구 모두가 모여 항상 웃고 노래하며 놀았어요"
초등학교 시절 그녀의 학업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음악과 체조에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둘째 오빠가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극적으로 돌아온 일,
1.4후퇴 때는 걸어서 평택 근처까지 가 기차 지붕 위에 올라
대구로 내려왔던 일 등 그 역시 6ㆍ25를 온몸으로 겪었다.
대구에 내려가서는 경북여고 정문 옆에 셋방을 얻어 정착했다.
형제들은 흩어지고 어머니와 세자매만 함께 살았다.
피난 중에 이화여중에 응시했지만 떨어져 2차였던 중앙여중에 입학했다.
전쟁이 끝난 중2 때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부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가사를 외우며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노래만 불러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러나 큰 키 때문에 배구와 수영반원으로 활동해야 했다.
중앙여고 때는 키가 크고 숙성한 몸매에 비해 시력이 나빠
언제나 교실 맨 앞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여고시절 그녀는 순하고 노래 잘하는 아이로 통하며 교내 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교의 인기 가수였다. 당시 레퍼토리는 "산타루치아", "대니 보이" 등.
그러던 중 우연하게 국악특별활동반의 수업을 구경 하다 시조를 따라 읊는
그녀의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의 권유로 6개월 동안 국립국악원에 다니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판소리 ‘심청전’을 반년만에 완창 해 주위의 놀라움을 샀다.
또한 덕성여대 주최 전국중고교 국악 콩쿠르에 참가해 단가 "운단풍경"을 불러
창부분 1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이었던 큰오빠의 반대로 국악을 그만 두어야 했다.
1958년 봄, 여고 졸업 직후 아나운서가 되려고 응시했지만 시력이 나빠
원고를 더듬더듬 잘못 읽어 버려 낙방했다.
당시 우연히 명동거리에서 큰오빠의 친구인 기타연주가 곽준용을 만난 것이
가요 가수의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며칠 후, 곽씨의 소개로 미8군의 프로덕션 화양에서 전무로 있던
김영순(베니 김)에게 오디션을 받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베니 김은 자신의 "베니 쇼"에 신인 가수로 픽업을 했다.
첫 무대는 오산 미 공군 기지의 한 클럽. 첫 예명은 패티김 아닌 린다김이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노래 한 곡을 끝냈더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의 레퍼토리는 "You Don"t Know Me", "추억은 이렇게" 등 단 두 곡이었다.
이후 봉급도 없이 2개월 간의 견습기간을 보냈다.
린다김은 정기 오디션에서 스페셜 A등급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노래 연습에
몰두했다. 59년 3월, 3만환의 첫 봉급을 받았다.
자신의 힘으로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는 마음에 의기양양했지만
큰오빠의 호통에 가출을 해야 했다. 예명을 바꾼 것은 당시.
"패티 페이지만큼 유명해 지라"는 베니 김의 권유때문이었다.
그렇게 점차 가수로서 틀이 잡혀갔다. 하지만 1년 후 큰오빠의 엄명에 따라
은퇴 아닌 은퇴를 하고 잠시 활동을 접었다.
강제로 맞선까지 봤지만 1년을 참지 못하고 베니 김의 주선으로 1960년 초,
조선호텔 나이트클럽무대에 올라 "사랑의 맹세"와 "파드레"를 불러
주한외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느 날 당시 AFKN간부의 주선으로 일본 NET-TV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았다.
당시는 한일국교정상화 이전. 이로써 패티 김은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으로부터 정식 초청을 받은 가수"로 기록되었다.
월 3백달러의 캐런티를 받고 일본의 톱 클래스 악단 "스타 더스트"와 3개월 간
일본 전국 투어를 돌았다. 팝송은 물론, 한복 차림으로 장고를 메고
장고춤을 추며 "아리랑 목동", "도라지", "아리랑" 등을 노래했다.
반응이 대단해 도쿄 최고의 영화 촬영소였던 니치게키(日劇) 등지에서
7개월 동안 리사이틀 쇼를 갖다, 61년 5월에 귀국했다.
돌아 온 패티김은 반도극장에서 "일본에서 돌아온 패티김 귀국쇼"를 열었다.
이 무대는 국내 최초의 개인 리사이틀이기도 하다.
당시 귀국 무대에는 현인, 장세정, 박재란,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15세의 소녀가수 윤복희 등이 우정 출연해 대성황을 이뤘다.
이 무대는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 였을 뿐 아니라,
큰오빠의 마음을 돌리게 해 주었다
용산 미 8군 무대에 작곡가 박춘석이 찾아왔다.
그는 "사랑의 맹세", "파드레" 등 팝송을 개사해 패티김의 데뷔 음반(10인치 LP)
발표를 주선했다. 음반 발표 후 김치캐츠, 이해련 등과 함께 일본에 초청 받았다.
초청자는 당시 일본의 인기 테너 색소폰 연주가로 재즈 캄보 "쿨 캐츠"의
리더였던 길옥윤이었다.
패티김은 일본과 동남아 공연을 마치고 1962년 5월에 새롭게 개관한
서울시민회관 무대에서 또 다시 귀국 쇼를 성공리에 마쳤다.
그 해 말 김시스터즈를 픽업했던 맥 매킨의 주선으로 꿈의 무대인 미국
라스베가스 공연이 성사되었다.
63년 3월, 부푼 꿈을 안고 미국 땅을 밟아 신인임에도 선더버드 호텔 등에서
뮤지컬 "훌라워 드럼 송"의 주연 배우로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는 새벽 4시가 되야 하루 일과가 끝나던 고된 시절이었지만 꿈에 부풀어
피곤할 줄도 몰랐다." 가수로 성공하고 싶어 술 담배도 멀리 했지만
매니저 해약 갈등으로 4달간 활동을 못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65년 가을, 유명 TV쇼인 "자니 카슨 쇼"와 NBC TV "투나잇 쇼"에
8회나 출연하며 제법 유명세를 탔다.
66년 1월, 서울로부터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는 전화 한 통이 왔다.
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이때부터 패티김은 국제적인 가수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TV 쇼에서는 특집 쇼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 자신과 똑같이 어머니의 병 문안 때문에 일본에서 귀국한
길옥균과 재회를 했다.
일시 귀국한 공통점 때문에 같은 프로들에 함께 출연을 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친해져 신보LP음반 제작까지 하게 되었다. 길옥윤이 그녀를 위해
처음으로 작곡해 준 노래는 "4월이 가면". 이후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12월 10일 워커힐호텔에서 3,000여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보통 개런티의 10배가 넘는 36만원의 거액을 받고 발표한
<크리스마스 앨범-신세기.66년 12월>은 결혼 기념 음반으로 화제가 되었다.
일본에서 신접 살림을 시작한 이들 부부는 67년 5월 월남 장병 위문 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국내 가요계에 정착한 패티김은 국내환경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부부의 활약은 대단했다.
길옥윤은 DBS 전속 악단장을 맡아 부부가 함께 "패티와 이밤을"을 진행하며
더욱 대중과 친숙해 졌다.
결혼 직전에 예그린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 출연하며 뮤지컬 배우로도
데뷔했었던 패티김은 68년 2월, 시민회관에서 예그린 악단 뮤지컬 3회 공연인
"대춘향전"의 주연을 맡아 한껏 재능도 뽐냈다.
11월 첫 딸 정아를 얻었다. 12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길옥윤의
첫 리사이틀에서 "사랑하는 마리아"를 처음으로 불렀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때 패티김의 일본 대중 잡지 "주간대중"에 게재된
살색 수영복 누드 사진 사건으로 곤혹을 겪었다.
"잉꼬부부"로 불렸던 이들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부터.
마침내 길옥윤의 3차례의 사업 실패로 71년 9월 하와이에서
결별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패티김은 "이민설"에 이어 "유태계 사업가 W씨가 새 애인",
"주한 고위 미군 장성 모씨와 동거중" 등 온갖 스캔들의 초점이 되었다.
72년 5월 길옥윤은 새 노래 "이별", "서울의 모정",
"사랑의 기도"를 들고 돌아왔다.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빅 히트가 터졌지만 73년 9월 두 사람은
이혼을 발표해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이별"은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 했다.
이혼 후 모든 출연 스케줄을 취소하며 2개월 간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74년 새해가 되면서도 "패티가 이태리인과 결혼하고 이민 간다.
이혼은 그 남자 때문이다"는 스캔들은 계속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앙드레김과 패션쇼를 펼치고 이형표감독의 "속 이별" 영화에
딸과 함께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74년 6월 패티김은 4회 동경국제가요제에 길옥윤과 함께 "사랑은 영원히"로
출전해 14개국 450곡 중에서 3위에 입상했다.
야심 찬 포부를 가졌던 그녀는 3위 입상에 충격을 받고 일본 활동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76년 3월엔 오랫동안 열애 설이 돌았던 이태리계 미국인
아바라도 게디니와 뉴욕에서 재혼을 했다.
또한 캐나다 토론토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80년 3월, 강남구 서초동에 이태리 식당 "마마潔?를 오픈하며
사업가로 거듭났다. 가수 활동은 대형 디너쇼에만 치중,
지나친 거물 가수 행세로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83년에는 25주년 기념 신보 "가을을 남기고 간사랑"으로
팬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확인했다.
또한 가수 생활 30년과 서울올림픽 1주년 기념공연으로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무대에 올랐다.
93년에는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노래인생 35년을 결산했고
94년에는 "서울의 찬가"로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95년에는 영원한 콤비 길옥윤의 영결식에 참가해 "서울의 찬가"를
떨리는 음성으로 불러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노래는 결국 95년 10월 26일 서울 세종로공원에 노래비로 탄생되었다.
또한 고 길옥윤씨가 암투병중에 만든 곡 "인형의 눈물" 등을 모아
유작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96년 패티김은 대한민국연예예술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 여성단체연합후원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녀는
왕성한 사회 활동과 더불어 여전히 전국 투어에 나서며
가요계의 여성 거목으로 우뚝 서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3Dkschoi@hk.co.kr">kschoi@hk.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