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Margot
ㅡ1572년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명 소설을
54년작에 이어 파트리스 세로 감독이
5년의 기획 끝에 완성한 대작.
앙리 2세와 카트린 메디치의 딸 마그리트 드 발루아(1553~1615)는 앙리 드 나바르와 혼인을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한 쌍의 결혼식은
‘성 바르텔레미의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유혈사태로 화해 버린다. 러시아의 무서운 이반황제조차도 그 잔혹성을 비난했을 정도였다.
결혼 초기에 앙리는 거의 포로나 다름없이
궁궐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1576년에 그는 무사히 감시망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곧 뒤이어 마고는 1578년 네락(Nérac)에서
남편과 다시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 부부는 결코 남편과 아내로서 살지 않았다. 결혼식 때에도 그들은 결코 서로 마주보는 일이 없이, 똑바로 앞만 응시했다고 전한다.
추기경이 “그대는 앙리 드 나바르를 기꺼이 남편으로 수락하겠는가?”라고 물어 보았을 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샤를 9세가 강제로 여동생의 머리에 손을 대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여 결혼승낙의 표시로 삼았다.
세련된 미녀 마고는 촌스럽고 투박한 사투리를 쓰며, 온종일 마늘냄새를 풍기는 신교도 앙리에게 전혀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
앙리에게는 여러 정부가 있었고,
마그리트 역시 숱한 남성과 화려한 염문을 뿌렸다. 언성을 높이며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았던 그들 사이에서는 결코 자녀가 탄생하지 않았다.
마고는 곧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그녀는 1584년 위송(Usson)으로 도망치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 오빠인 앙리 3세나 남편인 앙리가 혹시 그녀를 죽이지나 않을까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앙리 3세의 명령으로 위송에 감금되어 있다가, 오르베뉴에서 8년의 세월을 보냈다.
1592년부터 앙리 4세와 그녀의 결혼을 무효화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그녀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결국 7년 만에 왕비의 칭호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건하에, 그녀는 앙리와 이혼을 했다(1599년).
ㅡ평화를 위해 구교도인 ‘샤를 9세’의 동생 ‘마고’는 신교도인 나바르 왕 ‘앙리’와 결혼하게 된다.
평화와 화해의 상징이 되어야 했던
‘마고’의 결혼식은 ‘샤를 9세’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학살로 이어진다.
대학살이 일어났던 그 날, ‘마고’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라 몰’을 구해주고,
그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구교도 세력과 왕실에 환멸은 느낀 ‘마고’는 남편 ‘앙리’를 도와 신교도 편에 서고, ‘마고’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탈출했던 ‘라 몰’은 ‘마고’와 ‘앙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는데……
ㅡ 10살에 왕이 된 새를르 9세는 카톨릭 교도인 모친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정권을 맡겼는데, 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이 왕의 신임을 얻자 그녀는 평화를 위해 정략결혼을 계획한다.
딸 마고와 신교도인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의 혼인 정치적 책략이란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한편 콜리니는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전쟁을 준비했다.
그 해 8월 18일 파리는 찌는 듯한 더위에 휩싸였다. 결혼식을 보러 파리로 몰려온 수천명의 신교도들이 여인숙과 거리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들의 검은 옷과 엄격한 태도는 폭동 직전의 파리인들에겐 또하나의 도발이었다.
평화와 화해의 상징이었던 마고의 결혼식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학살을 예고했다.
16세기 프랑스는 카톨릭을 믿는 프랑스와 개신교를 국교로 하는 나바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카톨릭군은 기즈 남작,
개신교군은 꼴리니 제독이 이끌어 왔고 이들 사이엔 서로 싸우고 죽이는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마고는 샤를르 9세의 동생으로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구교도이지만 종교전쟁으로
갈갈이 찢겨진 프랑스를 위해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된다. 상대는 신교도로 나바르의 볼품없는 어린 왕인 앙리 나비르(앙리 4세).
앙리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마고는 결혼 후 앙리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거대한 야망과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샤를르 9세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까뜨린느 메디치이다.
그녀는 왕인 샤를르 9세보다는 동생인 앙리(앙리 3세)를 편애했으며 그를 위해 평화로운 왕국을 만들어서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구교도와 신교도의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종교전쟁을 끝내기 위해 구교도 마고와 신교도 앙리와 결혼시켰던 것이다.
마고의 결혼이 끝난 후 6일동안의 축제 기간에 구교도와 신교도는 축제의 열기에 휩싸이지만 그곳엔 어머니 까뜨린느의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었다.
6일동안 축제 후 동이 돋을 무렵 5000여명의 신교도들은 구교도들에게 무참히 살해된다.
세느강은 피로 물들고, 파리는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한다.
이날의 공포스런 밤이 진행되는 동안
상처투성이의 한 젊은이가 마고의 문을 두드린다.
이 젊은이 라 몰르는 신교도로 다른 이들처럼 죽어가야만 할 시간이지만 마고는 그를 숨겨주고 간호해 준다.
그러던 중 마고는 라 몰르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데.
ㅡ 그녀의 전(前) 남편은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군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자신의 비망록을 집필하였으며, 1658년에 출판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두 오빠 샤를 9세와 앙리 3세,
전남편 앙리 4세의 치세기 내용이었다.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 마고는 조제프 보니파우스 드 라몰을 위시하여, 많은 애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탈모증세로 하얀 머리가 성글어지고 비만해졌을 때,
그녀는 빚에 쪼들려 수중에 있는 보석을 내다 팔지 않으면 안 되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결국 전 남편 앙리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마리 드 메디치와 협상을 한 끝에 그녀는
다시 파리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말년의 그녀는 예술의 후원자, 빈민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리고 궁정의 각종 행사를 도왔으며,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치가 낳은 자녀들의 교육을 성심껏 맡았다. 마고는 1615년 5월 27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발루아 성당에 묻혔다.
수천 명의 사람이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공주였던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마고를 진심으로 따랐던 앙리 4세의 어린 장남(미래의 루이 13세)은 몹시 흐느껴 울면서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마고 여왕』을 집필하였으며,
이는 1994년에 프랑스에서 영화로 상영되었다
ㅡ 첫 번째 왕비 마그리트 드 발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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