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강릉(江陵)
4. 강릉의 자랑 허균(許筠)과 난설헌(蘭雪軒)
<1>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난설헌 동상 / 난설헌 영정(影幀) /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강릉시 초당동(草堂洞)에는 허균·허난설헌(許筠·許蘭雪軒) 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초당동에는 기념관뿐만 아니라 바로 근처에 기념공원도 조성되어 있고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경험하는 외에도 힐링(Healing)공간으로의 역할도 충분히 하는 장소이다.
호서장서각터(湖墅藏書閣址) / 초당 가시연 습지(濕地) / 전통차(茶) 체험장 / 경포해변 홍길동 동상
이 기념관에는 허씨 가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다른 건물로는 허난설헌 생가터, 전통차(茶) 체험관 건물이 있고 건물 뒤쪽 소나무 숲길 옆에는 허씨 5문장 비석, 호서장서각터(湖墅藏書閣址), 허난설헌 동상, 공연장도 있다.
호서장서각터(湖墅藏書閣址)는 허균이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으로 말하면 도서관이 있던 곳이다.
기념관 바로 연이어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홍길동 동상이 세워져 있는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경포호수가 펼쳐지며 경포호(鏡浦湖) 일주도로가 나타난다. 또 경포호수를 따라 다양한 습지공원도 조성되어 있어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을 본 후 주변을 둘러보면 기막힌 풍광이 연이어 있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2> 허씨 집안과 천재 문장가들
난설헌의 아버지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엽(許曄)은 조선조(朝鮮朝)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분으로, 자(字)는 대휘(大輝), 호(號)는 초당(草堂), 돌아가신 후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허엽(許曄)은 정실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후일 이조판서를 역임한 허성(許筬)으로 자(字)는 공언(功彦), 호(號)는 악록(岳麓)과 산전(山前)이다.
그러다 정실부인을 사별하고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두는데 아들 봉(崶), 딸 초희(楚姬), 막내로 아들 균(筠) 3남매를 낳는데 딸 초희가 난설헌(蘭雪軒)이다.
허엽(許曄)과 그 자식들은 문장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는데 큰아들 허성(許筬), 이복동생인 허봉(許崶)과 허균(許筠)에 초희(楚姬-蘭雪軒)까지 다섯 사람을 묶어 ‘허씨 5문장(許氏五文章)’이라 불렀다.
난설헌의 외조부 김광철(金光轍)은 고향이 강릉 사천(現 沙川津里)으로 조선조 가선대부 예조참판을 지내셨던 분으로 호(號)는 애일당(愛日堂)이다. 외조부 김광철 또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사사(師事)했다고 하니 그 학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난설헌 기념관 인근에 있는 ‘허씨 5문장 비석’에는 이 다섯 명의 한시(漢詩)가 각각 새겨져 있다.
<3> 허균·허난설헌 생가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 중 한 가지가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生家)에 대하여 이견(異見)들이 있는 것 같아서다. 이곳을 다녀간 외지 분들은 대부분 이곳 초당을 허균, 허난설헌 남매가 태어난 곳으로 안다.
이곳에는 ‘허난설헌 생가터’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옛 건물 한 동(棟)이 있는데 ‘생가(生家)’가 아니고 ‘생가터(生家址)’니 이 건물은 아니고 그 터에 훗날 다른 건물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문헌을 뒤지다 보니 초당동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1912년 초계정씨(草溪鄭氏) 후손 정호경의 집(강원도 문화재자료 59호)으로, 초당동 고택이라 불렀는데 강릉시가 구입하여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으로 조성하였다고 적혀있었다. 난설헌의 동생 허균(許筠)이 태어난 곳은 난설헌 남매의 외가가 있던 사천진리(沙川津里)로, 그곳은 난설헌 남매의 외조부(外祖父) 김광철(金光轍)이 살던 집이다. 외할아버지 김광철의 호가 애일당(愛日堂)이었는데 그 집터였던 곳에 허균이 쓴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난설헌의 외가는 대가 끊겨 후손이 없었고 집도 허물어져 없어졌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후 허균이 외갓집이 있던 터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쓴 시가 애일당 시비에 적혀있는 ‘누실명(陋室銘)’이다.
허균은 어렸을 때 자신의 태(胎)가 묻힌 사천(沙川) 외가에 자주 가서 외사촌들과 사천 앞바다에 나가 바다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외갓집 뒤편 오대산에서 흘러 내려온 구불구불한 산줄기가 작은 산을 이루었는데 마치 이무기(蛟龍) 같아 산 이름이 교산(蛟山)이었다고 한다. 또, 사천 해변에는 교문암(蛟門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무기가 떠나면서 바위를 두 동강 냈다는 전설도 있다.
허균은 훗날 자신의 호(號)를 교산(蛟山)이라 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허균 자신도 ‘학문과 사상이 뛰어났지만 용처럼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았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무기(蛟龍)- 용으로 변하지 못하여 승천하지 못한 거대한 뱀을 일컬음
난설헌도 이곳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디에도 난설헌이 사천 외가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보면 나설헌이 태어난 곳은 강릉 초당이고 허균이 태어난 곳은 사천진리(沙川津里)인 것이 맞는 것 같다.
<4> 허씨 집안의 비극적인 몰락(沒落)
조선조(朝鮮朝)에 청백리로 불리던 허균(許筠)의 아버지 허엽(許曄)이나 이조판서를 지낸 이복형 허성(許筬), 또 창원부사(昌原副使) 등을 역임한 친형 허봉(許崶)과 허균(許筠) 자신도 관료생활이 순탄치 않았는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들 때문이었다.
아버지 허엽(許曄)은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한 객관(客館)에서 향년 63세로 객사(客死), 맏형 허성(許筬)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으나 당파싸움에 휘말리다 향년 64세로 마감.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친형 허봉(許崶)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쓴 기행문 ‘조천기(朝天記)’ 등 문장력이 빛났으나 사색당파 싸움에 휘말려 유배생활을 하다 정치에 뜻을 버리고 금강산 유람 중 생(生)을 마감하니 향년 38세였다.
교문암(蛟門巖) / 애일당(愛日堂) 허균 시비 / 초당(草堂) 순두부 맛집
허균(許筠)은 1614년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데 나라에서 준 돈을 몽땅 털어 책을 사와 강릉 초당에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도서관)을 짓고 선비들이 와서 읽게 했다. 광해군 때 결국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는데 향년 51세였다.
허균(許筠)의 누님 천재시인 난설헌의 비극을 살펴보면, 난설헌은 학문에서 난설헌에 미치지 못했던 남편 안동김씨 성립(誠立)의 끊임없는 외도(外道)에 시달린다.
또 아녀자가 쓸데없는 시(詩)를 쓴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시기(猜忌)와 무지(無知)에 끝없이 시달렸다. 두 자녀를 두었지만 어려서 돌림병으로 잃고 태중(胎中)의 자식마저 잃은 후 27세 되던 해,
今年乃三九之數(금년내삼구지수) 今日霜墮紅(금일상타홍)
금년이 바로 三·九수에 해당되니 / 오늘 서리에 붉은 꽃이 떨어지네. 라 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三九之數(3·9지수)는 3☓9=27, 즉 자신이 죽을 나이 27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난설헌(蘭雪軒)의 묘(墓)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시댁의 선산(先山) 남편의 묘와 함께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고 어려서 잃은 두 남매의 묘도 함께 있다.
또, 강릉시 초당동(草堂洞)이라는 동의 명칭은 허엽(許曄)의 호(號)인 초당(草堂)에서 땄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초당두부’를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자신의 호를 붙여 처음 만들었다고 하니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