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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묵상글 들 ( 12월 18일-이용만 당한 요셉?.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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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2월 18일-이용만 당한 요셉?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퍼뜩 드는 느낌은 '이용당하다'는 느낌입니다.
요셉이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느낌 말입니다.
우리말에 이용되다라는 말에 비해
이용당한다는 말은 좋은 뜻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이용되다는 말은 쓸모 있다는 뜻과 맥을 같이합니다.
쓸모가 있어서 많이 이용되는 것이지요.
사실 아무 쓸모가 없거나 쓸 데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그를 찾지 않을 것이니 불행합니다.
이것은 심지어 버림받는 것과 마찬가지의 불행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의미 있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크게 두 경우,
곧 사랑받을 때와 귀하게 쓰임 받을 때인데
공통적인 것은 이때 우리는 홀로 있지 않고 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쓸모가 있고 그래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랑받는 것만은 못해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쓸모가 있어 쓰임 받긴 하지만 이용만 당하는 것은 쓸모없어
쓰임 받지 못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불행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용만 당하는 것은 단물만 빼먹고 차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고,
쓸모없어 버림받는 것보다 더 쓰라린 버림받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용만 당한 존재일까요?
파혼해도 시원치 않을 마리아와 결혼해주었건만 아내는 물론
혈육도 얻지 못했으니 요셉은 이용만 당한 것이고 그래서 불행했을까요?
며칠 전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모세가 죽기 전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이 눈에 보이는 모압 땅에 묻혔는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그렇게 부려먹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뜻인지,
하느님께서 너무 하신 것이 아닌지,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데 있어서
적지 아니 걸림돌이 되기에 묻는 거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문제를 많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적절한 답을 제가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 요셉을 생각하며 둘 다 이용만 당한 것인지 같이 생각해봤습니다.
이 세상의 복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고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둘은 하느님께 이용만 당하고 복은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의 기준이 이 세상이 아니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라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이 세상 가나안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그 기준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히브리서와 묵시록을 보면 천상 예루살렘이 우리가 가야 할 곳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이 지상의 가나안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가야 하는 순례자인 우리 모든 인간의 예표이고,
그의 사명도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것까지이지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 다윗처럼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은 두 가지입니다.
모세의 광야의 전통과 다윗의 왕조 전통,
모세의 순례자 전통과 다윗의 정주 전통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사명을 완수한 뒤에는
순례자로서의 삶으로 자신의 삶을 마쳐야 예표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요셉도 이 세상에서의 자기 성취가 인생의 목표라면
그는 이용만 당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을 진실하게 믿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사명완수가
인생의 목표였을 것이고 그것으로 행복하였을 것이고,
그것은 어제 봤듯이 영적 족보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더 할 수 없는 영광을 그가 얻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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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12월 18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사가가 이방인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쓴 목적은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결하는 데 있었습니다. 약속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그분께서 어떻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태오는 복음서의 시작인 족보(1,1-17 참조)에서부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1,1)이라 부릅니다. 메시아께서 다윗 가문에서 나실 것이라 굳게 믿으며 기다려 온 유다인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태오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음을 강조하고자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마태오로서는 “다윗의 자손”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구절만으로 예수님과 이스라엘 역사를 연결 짓기에는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더욱 명확하게 핵심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메시아 탄생 예고가 그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언이 성취되었음과 함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가를 밝힌 마태오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응답이 필요하였고, 하느님 뜻에 순종할 본보기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제시됩니다. 그가 ‘다윗의 자손이요 의로운 사람’이여서나 아내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배려심도 있었겠지만, 처녀가 혼인 전에 아이를 가진 현실의 엄청난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꿈의 계시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요셉의 순종이야말로 마태오가 간절히 전하고 싶었던 바입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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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12.18.“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오늘 <입당송>은 주님의 오심을 알립니다.
“우리 임금님 그리스도 오시리라.”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복음>은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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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12월 18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 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1,1)으로 나셨고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위대한 태어남이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투심이 아닌, 남다른 자제심을 지닌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한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 이름은 어떤 죄와도 연관된 적이 없다. ‘요셉’이라는 말은 ‘흠잡을 데 없는’이란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 하셨기 때문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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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 20)
세상 일은
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
받아들임을 통해
하느님의 뜻은
우리 관계안에서
더욱 빛난다.
맞아들임은
나만을
생각지 않는
올바른 믿음이다.
소박한
요셉의 믿음은
우리 믿음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느님 뜻안에서
늦은 약속이란
없다.
탄생은 약속의
뜨거운 선물이다.
하느님의
약속마저
믿지 않는
우리들이 되었다.
하느님과의
약속이 탄생이다.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하느님과의
약속이 모든
관계를
성장시킨다.
대림은 우리의
약속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성 요셉은
약속의 길을
충실히 걸어간다.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깊어지는
맞아들임의
은총이다.
맞아들임으로
약속은
구체적인
구원의
시작이 된다.
우리가 건네준
하느님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에게
우리는 구원의
기쁜소식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구원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이시다.
맞아들임으로
우리의 대림은
뜨거운 탄생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맞아들이고
있는지를
다시금 묻는다.
하느님의 뜻은
맞아들임이라는
구원의 탄생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우리들
여정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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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12월 18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2018년 8월에 저는 안식년을 신청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들어주셨고, 9월부터 제주도 엠마오 연수원에서 3개월간 연수를 하면서 안식년을 시작하였습니다. 광주교구, 전주교구, 대구교구, 안동교구, 마산교구, 원주교구, 청주교구, 인천교구, 의정부교구, 수원교구, 서울교구의 사제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18명의 사제들이 연수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두 신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밤이면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사목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쉬는 날이면 제주도 올레 길을 걸었습니다. 마라도, 추자도에도 같이 다녀왔습니다. 이시돌 피정의 집에서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오름에 올라 밤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주특기가 있었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노래를 잘 하는 사제, 낚시를 잘 하는 사제, 요리를 잘 하는 사제, 운전을 잘 하는 사제, 이야기를 잘 하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신학생 때 즐겨 부르던 성가 84번이 생각났습니다. “얼마나 좋고도 즐거운고 형제들이 함께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 얼마나 좋은고 뭇 나라 백성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주님 사랑 우리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매일 아침 이시돌 피정의 집에 있는 호수를 걸었습니다. 호수 둘레에는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엠마오 연수는 충전의 시간이었고, 사제들과 우정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배움의 기회도 되지만 나눔의 시간도 되었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달라스에 있는 동창신부에게 가기로 했습니다. 동창 신부가 휴가를 가면서 1달 동안 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안식년 중이기에 기분 좋게 가겠다고 했습니다. 여행도 가고, 미사도 할 수 있으니 마당 쓸고 동전 줍는 일이었습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었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달라스로 가기 전입니다. 주교님께서 부르셨고, 미국에서의 사목을 제안하셨습니다. 뉴욕에 있는 가톨릭평화신문을 맡아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제는 서품을 받을 때 ‘신앙고백, 독신서약, 순명’을 약속합니다. 주교님의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작년 8월에 미국으로 왔고,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홍보를 다니려고 하는데 코로나19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공동체의 미사가 중단되었고, 식당이 문을 닫았습니다. 갈 곳도 없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언론사는 예외적으로 문을 열었고, 직원들과 함께 신문을 제작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제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역시 사제들이었습니다. 각자의 일로 모두 바쁘게 지냈는데 코로나19로 뜻하지 않게 여유가 생겼습니다. 영상으로 하는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매주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의기투합해서 캠핑장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뉴욕에서도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굳이 장소를 따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면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면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은 불가마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난야와 아자르야와 미사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우리를 저승에서 구해 주시고 죽음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으며 불길이 타오르는 가마에서 건져 내시고 불 속에서 건져 내셨다.(다니엘 3, 88)” 사랑하는 부부는 칼날 위에 서도 행복하게 잠들 수 있지만 사랑이 없는 부부는 넓은 침대에서도 잠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커다란 집과 넓은 식탁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작고 누추한 집일지라도 사랑이 있으면 행복한 가정입니다.
요셉 성인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충분히 아름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이제 새로운 삶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마리아가 선택한 삶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나눔과 봉사, 희생과 친절’의 선물을 준비해서 주님께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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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가정의 배경; 의인 성 요셉 - 우리 모두가 임마누엘입니다 -
오늘은 은혜로운 대림시기 2부, 둘째 날인 12월18일입니다. 어제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성가정의 배경이신 의인 성요셉입니다. 오늘의 ‘오 후렴’의 간절한 기도 역시 아름답고 깊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은연중 드러내는 성 요셉이 생각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마치 오늘 복음은 의인 성 요셉의 태몽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 위인들의 탄생을 앞두고 태몽이 있었듯이 예수님 탄생을 앞둔 의인 성 요셉의 태몽입니다. 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행복한 84회 생신, 교황 프란치스코!(Happy 84th Birthday, Pope Francis!)란 말마디가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바로 어제 12월17일은 고령의 연세에도 영원한 청춘을 사시는 성 요셉을 닮은 성가정 가톨릭 교회의 아버지같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84회 생신날이었습니다. 저보다 13세 연상이신 교황님처럼 ‘영원한 청춘’의 영적 젊음으로 사는 것이 제 간절한 소망입니다. 교황님은 어제 늘 해오시던 대로 숙소에서 거주하는 다른 이들과 식사를 나누셨으며 ‘기도중에 고요하고 단순한 하루(a quiet and simple day in prayer)’를 보내셨다 합니다.
또 하나 교황님에 관한 톱뉴스 메시지는 1월1일 세계 평화의 날을 앞둔 담화문이었습니다. ‘배려의 문화없이는 평화도 없다(no peace without a “culture of care”)’란 말마디도 인상깊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교황님은 얼마전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2020.12.8.일부터 다음해 대축일인 2021.12월8일까지 성요셉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대로 성 요셉을 닮은 교황님의 요셉 신심을 짐작케 합니다. 성 요셉의 해를 선포하시며 성 요셉의 면모를 여러 측면에 걸쳐 나눠주셨습니다.
1.사랑받으시고 온유하시고 순종하시는 아버지
2.하느님의 뜻을 환영하시는 아버지
3.사랑의 모범, 창의적인 용기를 지닌 아버지
4.노동의 가치, 존엄성과 기쁨을 가르치신 아버지
5.그늘의 어둠 중에도 마리아와 요셉에 집중하신 아버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요셉을 통해 날마다 바치는 전구의 기도 내용이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묘사된 의인 성 요셉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배려의 문화없이는 평화도 없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에 대한 성 요셉의 배려와, 주님의 천사를 통해 침묵중에 하느님께 경청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성 요셉의 하느님께 대한 배려는 얼마나 놀라운지요! 하여 의로운 사람 성 요셉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 요셉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는 지극할 수 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신뢰받음이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절정은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 이름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예수님은 물론이고 주님을 닮은 성 요셉, 그리고 성인성녀들과 우리들 역시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임마누엘들입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은 그대로 예수님에 앞서 성 요셉을 통해, 또 오늘의 임마누엘들인 우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대림시기 오늘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 예언인지요! 예수님과 요셉뿐 아니라 우리도 임마누엘들이요,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 불릴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렇게 살 수 있게 하십니다.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확인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이 ‘임마누엘’이자 ‘주님은 우리의 정의’입니다. 끝으로 성 가정의 든든한 배경이자 버팀목이 되시는 성 요셉을 닮고 싶은 열망에 20년전 써놓고 애송했던 ‘산처럼!’ 이란 시를 나눕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눈물이 흐른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는 없을까
크고 깊고 고요한
배경의 불암산처럼!(2000.11.17.)”-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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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대림 금요일 18일.<우리와 함께 계시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 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성조들이 전쟁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를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과 고통,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고, 숨었을 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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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송영진 모세 신부님. 12. 18. 금요일 12월 18일 (마태 1,18-24)<요셉의 응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18-21)”
이 이야기는 요셉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을 함께 선택하셨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실 때,
그냥 마리아가 아니라,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루카 1,26-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뜻하는 말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게 될
예수님을 위해서 ‘다윗 집안’을 선택하셨음을 나타내고,
또 다윗 집안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요셉’을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셉 한 사람만 다윗의 자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은 요셉 외에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을 선택하신 일은,
이미 구약시대 때에(다윗 시대에) 하신 일입니다(2사무 7,12-13).
이야기에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아가 요셉에게 ‘성령 잉태’를 알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도(루카 1,28.30-33.35-37)
모두 요셉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들도,
또 성령 잉태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만일에 안 믿었다면, 그 일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율법대로 처리했을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도,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 모르게 파혼한다면, 즉 파혼 사실을 감춘다면,
세상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를 요셉의 아들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성령 잉태 전에 먼저 요셉에게 알려 줄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일의 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성령 잉태는 마리아 쪽의 동의와 순종이 먼저 필요한 일이었지만,
요셉의 동의와 순종이 ‘먼저’ 필요했던 일은 아니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임무와 역할은 성령 잉태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아기가 태어난 후에 법적인 보호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는 천사의 말은,
마리아와 아기의 법적인 보호자가 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요셉이 자유의지로 ‘응답’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초대’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거부할 사람이었으면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선택하시지 않았겠지만,
어떻든 인간 쪽에서 거부해도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부한 그 사람은 구원사업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응답하고 순종함으로써 받게 되었을 ‘큰 은총’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이 모든 일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말입니다.
(믿음 없이는 응답도, 순종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라는 말은,
요셉이 아버지로서 하게 될 일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아기의 이름을 정하셨지만, 사람들 앞에서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은
법적인 보호자로서(아버지로서) 요셉이 하게 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셉이 일생 동안 아기의 법적인 보호자로서(아버지로서)
살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요셉의 응답은 바로 그 임무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겠다는 응답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요셉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받게 될 은총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요셉의 응답과 순종은 그 자신도 구원의 은총을 받고,
다른 사람들도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큰 일’입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2-24).”
여기서 ‘이 모든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탄생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메시아 강생은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로 오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잠에서 깨어난’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번민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천사의 설명 덕분에 요셉이 모든 번민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겠다고
기꺼이 결심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응답과 순종을 실행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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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새벽을 열며. 2020년 12월 18일, 빠다킹 신부님.
거리를 보면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연인의 모습보다 늙은 노부부의 사랑을 볼 때 더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보다, 은은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랑은 좋은 것을 넘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예전에 보았던 노부부의 사랑을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치매 걸린 할머니의 손을 마주 잡고 성당에 나오시는 할아버지이십니다. 성체 영하는 순간에서도 옆에서 도와주며 할머니께서 성체를 실수 없이 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할아버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 젊었을 때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끝까지 할머니를 간호할 수 있도록 할머니가 먼저 하늘 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할머니께서 건강하실 때도 두 분의 금술이 너무나 좋았다고 합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위한 잔잔한 사랑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누구 한쪽이 아프다고 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힘이 있을 때, 젊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마치는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사랑의 아름이 널리 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양아버지,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에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지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율법에 따르면, 혼인하기 전에 아기를 가지면 공개 처형을 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답지 않게 율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남모르게 성모님과 파혼하기로 작정하지요. 왜 그랬을까요? 바로 성모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으로 주님의 천사가 개입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초대한다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떤 사랑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주님의 넓은 자리를 만들어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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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이 우리를 위로한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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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 많은 세상 안에서….
아침에 제가 키우는 개에게 밥을 주면서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동요였지요. 그런데 부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름에는 나무꾼을 볼 수 없습니다. 더운 여름에 불을 때는 사람도 없고, 잎사귀가 무성할 때는 마르지 않아서 불을 땔 수가 없어서 나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이 노래를 불렀고, 여름에도 나무꾼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거짓이 없을까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진실만일까요? 아닙니다. 거짓이 너무나 많기에,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인 것처럼 거짓을 남들에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가짜뉴스가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은 우리 삶에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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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성탄 8일 전; 2020.12.18.(금).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탄생을 위한 하느님의 개입
메시아를 보내시는 데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차원에서 일하셨습니다.
신성의 차원에서는 성자를 메시아로 보내시고자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시켜 인간으로 탄생하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성자의 강생과 부활로 인류를 새로이 창조하시려는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또한 인성의 차원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서 아브라함과 야곱, 유다와 다윗,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심으로써(히브 1,1)
하느님께서 마귀의 방해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시고
‘아나빔’으로 불리운 소수의 백성들이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시키셨습니다.
메시아의 강생과 부활이라는 구원계획이 신성 차원에서 세워졌다면,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아나빔들의 믿음과 이 구원을 이루시러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가 인성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두 번에 걸친 하느님의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나자렛에서 요셉과 마리아를 함께 이웃으로 살게 하시어 만나게 하시고는 지켜보셨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은 이웃에 살던 마리아의 믿음과 성품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혼기를 미루어가며 마리아의 혼기가 차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성년이 되었을 때 사랑을 고백한 요셉은 마리아가
동의하자 1년 후에 혼인하기로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약혼한 남녀는 서로 떨어져 지내는데 이는 신부의 순결을 확인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혼식 직후에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시어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하여 출산시키려는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며 천사는 마리아에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 정식 혼인을 하기 전인 동정의 몸으로
잉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이미 어려서부터 기다려온 메시아였기 때문에 그분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전갈을 믿고 순명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떠났습니다.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한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전갈이 사실인지 확인하고도 싶었을 것이고,
또 출산이 임박하면 도울 일도 있을 것 같아서였겠지만, 무엇보다 동정 잉태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당장에는 부모나 약혼자에게 알릴 자신이 도저히 없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석 달을 지낸 후 돌아오자 마리아는 이미 임신 3개월이 되어서 배가 불렀기 때문에
부모도 요셉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고, 아마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였습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함께 살기도 전에 잉태한 것을 알게 되자 몹시 괴로웠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장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불길한 예감은,
만약 자신이 이 사실을 회당장에게 고발하게 되면 마리아의 신변에 닥칠 수도 있는 끔찍한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한 끝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의 의로운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게 되면 하느님의 메시아 파견 작전이 허사가 될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다행한 것은 요셉도 이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나빔 중의 한 사람이었고,
마리아라면 충분히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고도 남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개입하신 이 타이밍이 절묘했던 이유는,
이렇게 해야 태어난 구세주가 다윗 가문의 후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래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대대로 약속하셨던 바를 지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요셉과 정혼하기 전에 구세주를 잉태했다면 구세주는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고 예언자들을 시켜 약속하신 바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십자가,
또 정혼자 요셉이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명예와 믿음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그만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그토록 중요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가 전해준 내용이 바로 이 약속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23,5-7). 예언자의 이러한 전갈을 들은 백성들도 기대와 희망을 간직하며 기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 이렇게 신성과 인성의 두 차원에서 어마어마한
구원계획이 아슬아슬하게 동시에 입체 작전처럼 이루어진 하느님의 개입은 성공적으로 나자렛 성가정을
만드는 데까지 착오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미사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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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2020년 12월 18일 금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십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제1독서의 대목은 다윗 집안에서 임금이 탄생하리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은 떠돌이 유목민에서 출발해 하느님 백성이 되어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정착하기는 했지만, 늘 외세의 침략과 우상의 유혹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지요.
언젠가 도래할 메시아의 시대는 구원과 안전한 삶을 약속하신 주님 말씀의 성취인 동시에, 하느님이 자기들과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만큼 민족의 위상과 영광을 드높여줄 사건은 또다시 없을 겁니다.
복음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 안의 한 사건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는 의로운 사람 요셉에게 충격이었겠지요. 당시 관습으로선 마리아를 고발해 성난 군중 앞에 세워도 과하지 않은 사안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조용히 물러나기로 합니다. 개인적 분노보다 사랑하는 여인의 의사와 안위를 소중이 여겨서였겠지요.
자신에게 벌어진 지극히 사적인 사고의 구원사적 의미를 당연히 알 수 없는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마태 1,19)하고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마태 1,20)습니다. 포기한 것에 대한 단호함이 드러납니다. 건강한 의지는 사욕이 끼지 않은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게 마련이니까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이에 주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 이 둘은 구원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선택된 협력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평범히 살던 이들에게 벌어진 엄청난 사건에 대해 천사는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마리아의 동정 잉태는 인간의 생물학적 이치를 초월하는 신비입니다. 이 말씀이 실현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인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하느님께 순종합니다. 곧바로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말씀께 길을 내어드립니다. 그의 순명은 단순하고 즉각적이며 성실합니다. 인간 삶의 매우 중차대한 일 앞에서 그 스스로 자신을 챙기지 않았으니 이제 주님께서 그를 챙겨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의 애틋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의지는, 자신의 의지와 이익을 내려놓는 순수하고 선한 이들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길을 주님의 길이 되도록 내어드린 이들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가 주님의 의지가 되고, 우리의 길이 주님의 길이 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아직 여정 중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크건 작건 다가오는 모든 일을 통해 주님께 협력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 감염증 사태로 기도하러 성전에 갈 수는 없지만 말씀을 품고 주님 앞에 머무르는 우리가 있는 곳이 곧 성전이지요. 저마다의 성전에서 더욱 힘 내어 기도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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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이병우 루카 신부님. <12월 18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마태1,18)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 잉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대의 풍속은 약혼 기간에 약혼녀는 친정에 머물러야 했고, 육체적인 성관계는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의로운 요셉은 이 사실을 알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아버지 요셉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을 지닌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탄생하시는데 '꼭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성탄의 '꼭 필요한 도구'가 됩시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내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 탄생하시는데 '꼭 필요한 도구'가 됩시다!
주님 성탄의 '꼭 필요한 그 도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의 회개'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님과 전화로 영적 대화를 했는데,
그 자매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주님께 너무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주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해 드렸습니다."
이 자매님의 작은 행동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의 창고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 자신을 바라볼 때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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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0년 12월 18일.<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오신다>
가끔 본인의 영성이 뛰어나다고 믿는 이들을 만납니다. 그런 분들은 삶이 매우 절제되어 있고 많은 나눔을 해서 가난하고 기도를 오래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영성을 분별할 때 특별히 보는 것 중의 하나는 그 사람의 관계에 대한 태도입니다. 관계의 주체가 마치 자신인 것처럼 끊고 맺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 사람을 높은 영성의 소유자로 보아주기 어렵습니다.
영성은 성령을 어느 만큼 지니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런데 성령은 관계를 돈독하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요셉 성인이 천사의 도움으로 성모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내용입니다. 언뜻 보기에 마리아와 몰래 파혼하려는 요셉의 모습은 본인 스스로 관계의 주체라고 여기는 사람처럼 비칩니다. 그러나 남의 아기를 임신한 여자와 어떻게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리아를 고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야 파혼을 하더라도 자신이 정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남모르게 파혼하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약혼해서 임신시켜놓고 버리는 파렴치한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떠안고 마리아는 아기 아버지와 잘 살 수 있도록 보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은 이런 마음을 보시고 요셉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알려줍니다.
만약 요셉이 관계를 딱 단절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느님께서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천사는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순교 복자 수녀회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하신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분은 병원에서 꽤 오래 일하셨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한 여성이 고민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 여성은 허리가 아파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방사선도 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의사는 아기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낙태를 권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미 자녀가 딸 둘 아들 하나, 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녀님에게 물어본 것입니다. 수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낙태하면 안 됩니다. 만약 장애인으로 태어나면 저를 주시고 정상으로 태어나면 잘 키우세요.”
그리고 수녀님은 매일 그 자매에게 가서 배에다 손을 얹고 아기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8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아야 했습니다. 아기는 정상으로 태어났습니다.
돌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수녀님들을 다 초대했습니다. 다른 수녀님들이 아기를 불러도 가지 않았는데, 베드로 수녀님이 부르니 반응하였습니다. 아마도 태중에서 기도해 주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 어머니가 이 아기를 낳지 않았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수녀님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수녀님은 마치 천사와 같이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를 유지 시켜 주었습니다. 관계를 유지할 마음이 있어야 천사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 죄짓게 만드는 사람과의 관계는 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리옷 유다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관계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맺어주셨으니까 지금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수녀님이 사시던 수녀원 밑에는 무당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무당들은 하루에 5번 종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무당에게 지지 않기 위해 수녀님들도 무당들의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무당들이 수녀님들을 기도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들이 무언가를 태워 연기가 수녀원으로 올라올 때는 매우 괴로웠다고 합니다.
한 번은 연기가 올라올 때 그쪽을 향해 성수를 뿌렸습니다.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았었는데 성수를 뿌리니 연기가 수녀원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무당들을 통해서도 기도를 시키고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심을 보여주십니다. 그저 불평만 하고 있었다면 그런 체험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피정 지도를 할 때 어떤 수녀님은 엄마가 아들이기를 바랐는데 딸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수녀님도 수녀원에 들어와서 8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수녀님은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으면 인간관계의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며 어서 어머니와 화해하고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관계를 맺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위해 지는 십자가가 우리를 성숙시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관계 안에서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도우십니다.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요셉이 마리아와의 관계, 또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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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8.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12월 18일]
군말 없이 길을 떠나는 요셉
신임 관구장 교육차 로마에 와있습니다.
어제는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으로부터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한 멋진 선생님, 프란치스코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은 오랜 세월 멕시코의 한 고등학교에서 재직하면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낸 은퇴를 앞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 멋진 신사가 교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교무실에 앉아있던 젊은 선생님들은 즉시 그가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는 크게 성공한 졸업생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떻게 오셨냐는 물음에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담임선생님이셨던 프란치스코 선생님을 만나 뵈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종소리가 울리고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는 정말이지 감동적인 사제지간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크게 성공한 제자는 이제 노인이 된 프란치스코 선생님에게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선생님, 그때 정말 선생님으로부터 너무나도 소중하고 은혜로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평생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프란치스코 선생님이 제자에게 묻습니다.
“그래, 내게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데? 내가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던가?”
성공한 제자는 그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프란치스코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선생님께 다가갔더니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셨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몹시 당황했던 저는 그제야 제 오른쪽 신발 끈이 풀려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주 정성껏 제 신발 끈을 묶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자 이제 됐다, 빨리 가서 재미있게 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마치 다정한 아버지처럼 친근한 행동으로, 따뜻한 미소로, 모범과 겸손으로 저희를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십년 세월 동안 언제나 선생님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 전해드리려고 저는 독일에서 멕시코까지 날아왔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가 주목해야할 또 한분의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양부 요셉 성인입니다.
그분의 일생도 마리아 못지않게 특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으로 인해 쫄딱 망한 인생입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와 함께 평범하지만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입니까?
철석같이 믿었던 약혼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덜컥 아이를 가졌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보면 속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크게 마음먹고 남모르게 파혼을 결심합니다.
이런 요셉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더 이상 요셉은 군말이 없습니다.
단 한마디 불평도 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하느님께서 펼쳐주시는 길을 따라 침묵 속에, 기도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섰습니다. 길을 떠나라시면 떠났습니다.
이제 정붙여 살만했는데 또 다시 이삿짐을 싸라니 아무 말 없이 보따리를 쌌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밤길이었지만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그저 묵묵히 순종하며 매일 길을 떠난 요셉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이 완수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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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8일 금요일 매일미사_남승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https://youtu.be/t_XF-8keqpM (27:52)
•2020. 12. 18.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남승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집전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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