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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루소 (1844~1910) 프랑스 - 환상과 전설의 소박파
- 사육제의 밤 -
루소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이면서 1886년 앙데팡당 전에 첫 출품한 작품이다. 밤 하늘에 휘영청 달빛은 밝고, 검은 나무의 그림자는 사방을 감싸며 조용한 밤의 분위기가 흐른다.
카니발에 나가면서 입던 무복(舞服)을 그대로 입은 채 두 젊은 연인은 손을 잡고 깊은 연정을 나눈다.
화면 전체가 검푸른 청색과 검은색으로 메워져 달빛과 남자의 유니크한 흰 옷은 우리에게 청아(淸雅)한 감정을 준다.
아마 이 여자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루소의 첫 애인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나날의 정겨웠던 회고록이 화면에서 스며나오는 듯 하다.
- 숲 속의 산책 -
이 작품은 루소의 초기 작품에 속한다. 숲 속에 자주빛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서 있다. 숲과 여인은 그가 좋아했던 테마이고, 후일 원시림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많이 반복되어 그려졌다. 촘촘히 서 있는 나무들과 서로 교차하고 있는 가지와 잎은 아직 약하고 성기게 그려져 있지만, 그가 말년에 그린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이미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루소의 그림에서 흐르는 이미지가 이 초기 작품은 숲 속의 산책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초가을철의 숲인 듯 엷은 연두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노랑·분홍 등이 잘 조화되어 화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 잠자는 집시여인 -
만돌린을 키며 방랑하는 한 흑인 여자가 물병과 만돌린을 놓고 피곤에 지쳐 잠들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자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나, 잡아 먹지는 않습니다. 집시의 여인은 오리엔트 복장을 하고 있고, 주변은 삭막한 사막에 달빛만 휘영청, 퍽 시적인 효과가 납니다.
고향은 라봐르 시에 이 그림을 사 달라는 루소의 편지 글 가운데 1절이다. 만돌린이나, 물병 등의 기하학적인 형태는 입체파보다 10년이나 앞섰고, 몽환적(夢幻的) 세계는 초현실파의 까마득한 선구적 입장에 서 있다. 피카소를 비롯 많은 예술인들이 이 화가에게 보내는 찬사가 가난하고 소박한 화가를 동정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 나 자신, 초상:풍경 -
루소 /루소의 자화상 〈나 자신 ...
명제의 뜻은 자화상 배경에 풍경이 보인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1890년에 그린 것으로 루소 나이 44살 때이고 아직 세관직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이지만, 그는 화가로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렸다. 배경은 1889년 만국박람회 때의 파리 풍경이다.
세느 강변에 만국기를 단 배가 있고 에펠 탑이 멀리 보인다. 하늘에는 오색의 구름이 춤을 추듯 흐르고 기구도 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팔레트에는 죽은 두 애처 크레망스와 조세핀느의 이름이 써 있으니 애환이 교차된다고나 할까. 새로운 과학의 경이와 더불어 이국적 풍물이 공존하는 이 만국박람회는 현실과 꿈을 낳게 하는 루소의 회화 세계와 서로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 포병들 -
검정 상의에 흰 바지를 입고 전원 팔자 수염을 기른 포병들이 차 바퀴에 '제 4 포병대 제 3 야포'라고 쓰여 있는 대포의 정면으로 줄지어 서 있다. 배경의 수목들도 대포의 모양과 같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점차 얕아지고 있다. '시골 결혼식'이나, '주니에 아저씨의 마차'와 같이 이것도 기념사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정면을 좋아한 루소는 기념 사진에서 착상한 그림이 많았다. 대포와 군인들이 화면 가득히 그려져 있지만 용감스럽다든가 공격적이라든가 하는 전의(戰意)는 전혀 느낄 수가 없고, 어디까지나 색채적인 배합에서 아름다움만이 가득하다. 특히 맑고 길어 보이는 초록색과 흰 옷, 검정상의와 빨간 모자 테두리와의 색의 대비는 매우 효과적이다.
- 꽃병 -
루소는 꽃을 테마로 상당히 많은 그림을 남겨 놓았으나, 거의 모두 동일한 수법이다. 단순한 구도에 단일한 배경 중앙부에 빽빽이 꽃아 놓은 꼬써?로 거의가 공통적이다. 루소의 꽃은 르동의 꽃과 매우 대조적이다. 르동의 꽃 그림에서는 테이블이나 배경이 보라빛 안개에 묻혀 버리기도 하고 꽃은 공간에 엷게 부상하듯 그린 데 반해,루소는 배경과 테이블, 명확한 두 면에 한정하는 공간은 매우 가볍고 인공적이다.
루소는 풍경화에 있어서는 공간 표현에 많은 힘을 기울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게 하였으나, 꽃 그림에 있어서의 공간은 단순화되고 배경은 단지 막을 내린 듯 차단되었다. 꽃들도 꽃잎이나 잎맥까지 자세히 그렸으나 현실과는 다른 창작에 의한 꽃이다. 역시 루소적인 초현실감을 준다.
- 열대림 속의 태풍 -
- 생 클르 공원의 나무들 -
- 호랑이 사냥 -
- 르 비에브르 계곡의 봄 -
- 알포르의 풍차 -
- 시골 결혼식 -
- 즐거워하는 광대 -
- 땅꾼 -
- 주니에 아저씨 마차 -
-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
- 오와즈 강의 강변 -
별칭은 Le Douanier(프랑스어로 '세관 관리'라는 뜻).
1844. 5. 21 프랑스 라발~1910. 9. 2 파리.
일요화가로 출발했던 프랑스의 화가.
그는 주로 화려한 색채로 세부를 꼼꼼하게 묘사한 덤불 숲과 야생동물 및 이국적인 인물(예를 들면 〈잠자는 집시 The Sleeping Gypsy〉, 1897) 그림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했다. 1905년(야수파)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가진 뒤, 전위예술가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소박파)
양철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라발에 있는 중학교를 중퇴한 뒤 곧 군대에 들어가 4년 동안 복무했다.
군대에 있는 동안 그는 막시밀리안 황제를 돕기 위해 멕시코로 원정(1862~65)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군인들을 만나, 그들의 추억담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나중에 그는 이국적 풍경을 주된 주제의 하나로 삼게 되었는데, 이 주제에 대한 영감은 아열대국가에 대한 그들의 묘사에서 처음으로 촉발되었음이 분명하다. 루소가 묘사한 밀림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그가 멕시코를 여행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루소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사실 한번도 프랑스를 떠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과부가 된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군에서 제대한 그는 1868년 파리에 정착했다. 이듬해 가구제조업자인 플레망스 부아타르의 딸과 결혼했다. 파리에서 그는 하급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1871년 파리 세관의 세금징수원이 되었다.
이 관세사무소는 실제적인 세관기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의 유명한 별명이 된 '르 두아니에', 즉 '세관 관리'라는 이름은 이 직책에서 유래했다. 그는 직업과 가족의 일로 바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그림을 그렸다. 어린시절의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는 아마 일찍부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당시의 아카데미 회원들과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1884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을 베껴 그릴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1886년 처음으로 미술전에 참가했는데, 공식미술전인 살롱은 그와 같이 천진난만한 작품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앵데팡당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해마다 열리는 이 앵데팡당전은 젊은 화가들이 표현양식과 주제에 대한 살롱의 편협한 요구에 맞서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기 위해 창설한 전람회였다.
루소가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 〈사육제의 저녁 Carnival Evening〉은 사실 이런 종류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며, 그로서는 매우 인상적인 출발이었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을 정확하고 신중하게 그리는 순박한 예술가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모든 나뭇가지를 낱낱이 그렸고, 구름은 기묘한 양감을 갖도록 표현되었으며, 인물 자체보다는 의상의 세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림의 구도는 사실상 시적이며, 석양의 빛깔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관찰하는 한편 나무와 구름을 즉물적으로 묘사하여 결국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인상적인 분위기와 정취를 얻고 있다.
출발은 순조로웠지만, 루소의 작품은 그후 7년 동안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조롱을 받았을 뿐 일반으로부터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앵데팡당 미술전에 약 20점의 그림을 출품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직도 아마추어여서 그림 작업과 직장 및 가정생활에 시간을 쪼개 쓰고 있었다. 아내는 얼마 동안 앓다가 1888년 세상을 떠났고, 그후 몇 년에 걸쳐 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었다. 그는 하나 남은 딸을 친척에게 보냈다.
개인적으로 고난이 거듭된 이 시기는 예술활동이 차츰 늘어난 기간이기도 했다. 이무렵 루소의 인생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소박하지만 상상력에 가득찬 루소는 박람회에서 본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박람회에서 재현된 세네갈과 통킹 및 타히티의 풍경은 그의 후기 작품의 이국적 취향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는 〈1889년 박람회 방문 A Visit to the Exposition of 1889〉이라는 제목의 희가극 극본까지 쓸 정도로 박람회에 열광하였지만, 이 각본을 무대에 올리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희곡은 그가 쓴 다른 희곡들과 마찬가지로, 기법적 측면에서 볼 때 다분히 순진무구한 것이지만 자신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잘 드러나 있다. 심지어 그는 음악을 작곡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래도 역시 그가 타고난 진정한 재능은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다.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풍경에 매혹되었고, 자연을 모방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관 The Toll-House〉(1900경, 영국 런던 코톨드 미술관 소장)이라는 그림은 그의 일터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 건물을 찍은 옛날 사진을 참고해 보면 루소가 대상에 충실하면서도 깊은 서정성을 담아 자신을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무렵 루소가 그린 가장 중요한 작품은 자화상 〈나 자신:초상-풍경 Myself:Portrait-Landscape〉이다. 그림 앞쪽에 루소가 팔레트를 손에 든 채 서 있고, 그 주위에는 파리 풍경이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의도는 아카데미 예술의 전통인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그림 솜씨는 천진난만하지만, 이 의도의 진지함은 인상적이다.
1893년 루소는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하기 위해 세관에서 퇴직했다. 그 직후에 동향인 라발 출신의 알프레드 "자리"는 젊은 문필가를 만났다. 자리는 관습에 따르지 않는 행동으로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던 작가였다. 그는 루소의 독특한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독학한 이 예술가를 전위파 평론지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Le Mercure de France〉에 관여하고 있는 지식인들에게 소개해주었다. 루소를 호평하는 글을 처음으로 실은 것은 바로 이 평론지였다. 여기서는 그가 1894년 앵데팡당 미술전에 출품한 우화적인 작품 〈전쟁 War〉을 다루었는데, 이 그림은 또한 루소가 진지한 화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무렵에 그린 가장 중요한 그림은 〈잠자는 집시〉이다. 이 그림은 달빛 비치는 사막에 잠들어 있는 집시 여자와 그 집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사자 1마리를 그리고 있다. 배경은 집시의 항아리와 만돌린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이 공허한 풍경이며 극도로 원시적으로 그려졌다. 집시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땅바닥에 뻣뻣하게 누워 있고, 미소띤 얼굴은 어린애 그림처럼 유치하게 그려져 있다. 일일이 그려져 있는 옷의 줄무늬와 사자의 갈기는 순박하지만 장식적이고, 심지어는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은 놀랄 만큼 표현력이 풍부하다. 집시의 미소, 집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자의 눈, 아무것도 없는 초자연적인 풍경, 그리고 별나게 뒤틀린 사자의 꼬리 등은 평화와 위험, 진지한 신비와 일시적 변덕이라는 대립적 인상을 하나로 통합하여, 마법에 걸린 듯한 상태를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루소는 이 그림을 발표하면서, 고향인 라발의 시장에게 이 그림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이 그림을 고향에 바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라발 시장은 이 생각을 그저 재미있게 여겼을 뿐이었다. 이때쯤 루소는 이미 자신을 위대한 화가로 여겼고, 자신의 작품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통적 기법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이 아카데미 소속 화가들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믿었다. 그는 아직도 공식적인 명예를 꿈꾸었지만, 그의 그림이 지닌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사람은 로베르 들로네와 피카소 같은 젊은 전위파 화가들, 그리고 그들의 옹호자인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뿐이었다. 아폴리네르는 루소의 주요한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1905년 루소는 가을 살롱전(아카데미가 흩어진 뒤 창설된 비공식 미술전)에 초대를 받았는데, 이 전시회에서 그의 출품작 〈굶주린 사자 The Hungry Lion〉는 그당시 가장 주목을 받은 화가들, 즉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 및 모리스 드 블라맹크 같은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과 같은 방에 전시되었다. 이런 화가들의 작품은 순수한 색채를 강조하고 전통적 사실주의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루소의 작품과 비슷했다. 마침내 비평가들도 그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근대 미술품을 거래하는 가장 중요한 미술상인 앙브루아즈 '볼라르'도 그의 그림을 사들였다.
루소는 파리의 초라한 구역에서 살았고, 집에서 그림을 가르쳤다(1899년에 재혼한 2번째 아내는 1903년에 죽음). 전위파 예술가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는 인기있는 인물이 되었다. 1908년 피카소는 자신의 화실에서 루소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가장 진보적인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초대를 받았다.
말년에 루소는 주로 이국적인 풍경을 그렸는데, 이런 경향을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은 〈굶주린 사자〉였다. 그는 이런 경향의 작품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으며, 원시적인 접근방식으로 이국적 풍경을 묘사하는 독특한 방식을 창조했다. 그의 그림은 이국적인 식물들이 화폭을 무성하게 뒤덮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식물들은 세부가 주의깊게 묘사되어 있다. 파리 식물원에서 연구한 것이 분명한 다양한 식물들은 서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그가 여러 가지 잎사귀 모양에 매혹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식물들은 서로 촘촘히 붙어 있지만, 잎사귀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그려져 있고, 잎사귀가 매달린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추상적 무늬를 이루도록 신중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 울창한 식물들 사이에서는 다채로운 새들이 훨훨 날아다니고, 신비로운 동물들이 관람객을 뚫어지게 내다보고 있다. 그림의 한가운데에는 사자가 먹이를 공격하는 따위의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당시의 전통회화가 추구하는 웅장하고 역사적이며 극적인 서술성에 대한 루소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루소는 죽기 직전인 1910년 이러한 밀림 그림들 가운데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며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야디비가의 꿈 Yadivigha's Dream〉을 그렸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 환상적인 그림에서는 울창한 밀림 한가운데에 붉은 벨벳을 씌운 빅토리아식 소파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매혹적인 여인이 나체로 누워 있다. 거대한 꽃들이 여인의 머리 주위에서 물결치고, 사자 2마리와 코끼리 1마리가 덤불 뒤에서 여인을 엿보고, 검은 피부의 음악가가 여인의 뒤에서 플루트를 불고 있다. 루소는 이 그림에 대해, 소파 위에서 잠든 여인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곳으로 옮겨진 꿈을 꾸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루소의 창작과 정신적 태도가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놀랄 만큼 독창적인 주제를 선택한 이유를 솔직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대상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루소의 솜씨를 남김없이 보여주는 이 그림은 또한 그의 강렬하고 비범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다.
루소의 활동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에 진정으로 천진난만한 그림의 부활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현대예술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D. Callier 글 | 옮겨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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