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 論語, Analects ]
해설자: 박성규(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로고
원전 요약
『논어』는 공자의 말을 어록의 형식으로 기록한 유학의 경전으로 『사서(四書)』의 하나이다. 공자는 천하를 경영하려는 꿈이 어긋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 교육에 전념하였는데, 『논어』에는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과 풍모가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인력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시세의 흐름을 마주하고 좌절하여 그저 한숨만 쉬지 않았다. 공자는 항상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반문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깨달아 아는 일이 곧 “지명(知命)”이다. 그래서 공자는 “명(命)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공자는 많은 공부를 하여 “하의 예를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지만, 기나라(하나라 후손국)에 충분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고, 은의 예를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지만, 송나라(은나라 후손국)에 충분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만약 문헌만 충분하다면 나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하와 은의 예[문화]에서 감손 증익된 내용[損益]을 고찰하면 “앞으로 백 세대 후의 문화라도 알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공자는 향당에서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인양 공손했고, 종묘나 조정에서는 분명한 말을 하되 어디까지나 삼갔다. 조정에서 상대부들과 이야기할 때는 중용을 지켜 치우치지 않았으며, 하대부들과 이야기할 때는 화기애애하였다. 공문을 들어갈 때는 몸을 움츠렸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갈 때도 새가 날개를 펴듯 단아하였다. 임금이 불러 외빈 접대를 맡기면 낯빛을 장중히 했고, 재직 시에 임금이 명(命)으로 부르면 수레가 채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달려갔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또 상(喪)을 당한 사람 옆에서 식사할 때는 포식한 적이 없었고, 곡을 한 그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 입은 사람이나 소경을 보면, 비록 어린아이이더라도 낯빛을 고쳤다. 이와 같이 스스로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기를 스스로 찾아 행하는 삶을 보임으로써 제자와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긴 사람이 곧 공자였고, 그 내용이 곧 『논어』이다.
원전 해설
『논어』에서 “학(學)”이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논해지는 사상은 바로 오늘날 “학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공자는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於學)”고 말하였다. 또 『논어』에는 “널리 배워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질문한다[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배움만 있고 생각이 없으면 망령되고 생각만 있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말이 있다. 이 때 질문과 생각은 학문의 ‘문(問)'에 대응된다.
즉 『논어』는 어떤 지식이든 항상 의문과 의심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때에만 참된 나의 지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학문이란 세상의 도(道)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 도를 배우지만, 세상에는 아직 그 도가 온전히 실현되어 있지 못하다. 도가 실현되어 있는 사회상은 우리의 이상 속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현실 속의 인간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 “도가 실현되어 있지 않다.” 공자의 시대에는 특히 무도(無道)의 상태가 심했다.
그런데 세상에 도가 없기 때문에 도를 세우려는 노력이 유의미하게 된다. 즉 혼란한 세상을 개혁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도를 세우는(有道)” 일이다. 요즘 말로 설명하면, 법이 공평하게 제정되고 제정된 법은 공평하게 집행되어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편법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도가 서 있는 사회”이다.
또 『논어』의 중요한 사상이 정명론(正名論)이다. 공자는 “모난 술잔(名)이 모나지 않으면, 그것이 모난 술잔인가! 모난 술잔인가!”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털공에 털이 없으면 그것이 털공인가?”라는 의미이다. 털이 있는 공이 ‘털공(名)'이듯이, 그 ‘명'에는 그에 부합한 ‘실(實)'이 있어야 그 ‘명'은 성립한다. 공자의 정명 해석에서 명(名)은 군·신·부·자 등 신분질서를 지칭하는 이름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결국 명은 모든 개념을 포함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하가 신하답게 되기 위해서는 “충(忠)” 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자식이 자식답게 되기 위해서는” “효(孝)” 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는 『논어』에서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 뿐 아니라, 효효(孝孝), 인인(仁仁), 직직(直直), 의의(義義), 예예(禮禮) [···]” 등도 논하고 있다. 즉 모든 ‘명(개념)'에는 그 ‘명'에 어울리는 ‘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예컨대 불의(不義)를 저지르고 그에 대해 “정의”라고 이름을 붙인 경우가 부정명(不正名)이다.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하였다. 당시 불의한 일에 대해 “정의”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공자는 그것을 “불의”라고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논어』는 군자 개념에 대한 많은 분석을 하고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바탕(質: 진실한 감정)이 형식(文: 예의범절)을 압도하면 거칠고, 형식이 바탕을 압도하면 태깔만 난다. 형식과 바탕을 잘 어울러야(文質彬彬) 비로소 군자다”라고 하였다. 즉 진실된 마음(質)을 바탕으로 예(文)를 행할 수 있어야 군자이다. 『논어』에서 “군자”는 대체로 “소인”과 대비되어 논해지고 있다. 군자와 소인은 우선 다음 두 맥락에서 나누어진다.
첫째, 정치적 사회적 계급적 의미에서 ‘군자'는 통치자(귀인)이고 ‘소인'은 피통치자(천인)이다. 둘째, 도덕적인 의미에서 ‘군자'는 국가·사회의 이익에 우선 관심을 갖는 도덕적인 인물을 지칭하고, ‘소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 갖는 부도덕한 사람을 지칭한다. 공자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고 하였다. 이 말을 정명론으로 이해하면, “어떤 개인의 명목상의 위치가 어떻든 의리를 추구하면 군자이고 잇속에 탐닉하면 소인이다”는 뜻이 된다. “군자”에 대한 공자의 논의의 특징은, 군자가 우선 그에 어울리는 도덕적 품성을 갖추어야 비로소 정치적 사회적으로 진정한 군자가 된다는 주장에 있다.
공자는 군자의 덕성으로 인(仁)을 논했다. “살신성인(殺身成仁)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은 쉽게 이룰 수 없는 최고의 덕목이다. 또한 인은 효(孝), 충(忠), 지혜(智), 용기(勇), 예(禮), 공(恭) 등 모든 덕목을 포괄하는 완전한 덕(全德)에 대한 이름이다. 공자는 당시 사람들이 예에 따라 행하지 않는 까닭을 모두가 그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자신의 욕구에 따라 행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예를 실천(復禮)'하려면 반드시 ‘극기(克己)'해야 한다. ‘극(克)'이란 싸워 이긴다는 뜻이므로, ‘극기'는 ‘예'로써 자기의 욕구와 싸워 이기려는 것으로서, ‘극기'할 수 있다면 자연히 ‘예를 실천'하게 된다. 인이란 우리 마음이 진실하면서도 예에 맞는 발로이니,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推己及人)을 말한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고”,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인을 실천하는 방법은 이처럼 간단하다. 그래서 공자는 “인이 멀리 있다고 여기는가? 내가 인을 바라기만 하면 인은 바로 곁에 있다”고 말했다.
당시 통치계층의 기초를 구성하며 장차 그 영향력을 사회전체로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계층이 바로 당시 선비(士) 계층이었다. 공자가 보기에 세상의 비극은 대체로, 윗사람들, 특히 최고 통치자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윗사람들이 예의도 염치도 없이 사리사욕에 따라 불의를 일삼음으로써 민생을 파탄에 빠뜨린 결과이다. 즉 비극의 원인은 통치계층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러므로 통치계층의 기초를 형성하는 선비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증자는 말하기를 “선비는 의로운 기상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의 실현을 자기 임무로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다음에야 그만 두나니 멀지 않은가?” 하였고, 공자는 말하기를 “선비로서 가정(안락한 생활)을 동경한다면 선비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선비란 결코 “놀고먹는” 사람들이 아니고 국가적 대사에 몸을 바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공자 문하에서 자로가 그 대표였다. ‘자로'라는 인물은, 『논어』에 나오는 ‘은자'처럼 순수하고 순정한 그 마음을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로 뛰어든 인물이었다.
또 중국 전통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일찍부터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인간 위주의 안목을 견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귀신(鬼神)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는 공자 이전부터 정립되기 시작했다. 춘추 시대 정자산은 “천도(天道)는 멀고 인도(人道)는 가까운 것이어서, 양자는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어떻게 천도로 말미암아 인도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천도는 누구도 쉽게 추측할 수 없는 일이나, 인도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추측하기 어려운 영역의 어떤 일을 누가 임의로 해석한 다음 그런 해석을 바탕으로 인도(人道)를 제약하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공자는 비록 말로는 하늘에 관해 “죄를 짓고” “증오하고” “속이고” “버리고” “알아주고”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지만, 인격적인 기능을 가진 존재로는 여기지 않았다. 공자는 천명을 두려워했고 천명을 따랐다. 그런데 ‘천명'의 구체적 내용은 고대 문헌 어디에도 규정된 바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 스스로 모색한 어떤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체적 환경 속에 처한 구체적 인간이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 천명일 따름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모색한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이 어겼다면 다시 또 어디 가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말했다. 공자가 말한 천명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작은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의연히 앞길을 개척하려는 스스로의 다짐의 반영인 셈이다. “천명(운명)을 아는 사람은 위태로운 담장 아래 서지 않는다! 는 맹자의 말은 바로 공자의 사상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