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隨筆)
影園 / 김인희
주말 아침에 잠에서 깨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깊은 밤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비는 새벽부터 내렸을 것이다. 오랜만에 일정이 없는 주말을 맞이하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간밤에 잠을 청하면서 늦잠 자야겠다고 단단히 벼르던 마음은 어디로 도망갔나. 달력에 적어 놓은 일정을 확인하고 우선순위대로 하나씩 일을 마무리 짓겠다고 다짐한다.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듣는다. 빗줄기가 눈에 보일락 말락 내리고 있다. 커피 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시선을 창밖 내리는 비에 고정한 채 커피를 마신다. 커피의 향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빗물이 목련의 커다란 잎에서 미끄럼을 타고 키 작은 동백의 잎에 떨어지고 다시 땅으로 낙하한다. 나는 소리 없는 빗물의 발걸음에서 소녀의 기도 피아노 선율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세레나데의 음을 듣고 있었다. 별의 허밍을 들을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감촉이 오감을 자극하고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대!
글제를 놓고 그대의 의미를 천착한다. 분명 문법적으로는 2인칭 대명사일진대, 나의 그대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감동을 준 대상에게 부여한 이름이 그대였다. 최초의 그대는 누구였을까. 책을 끼고 살면서 좋은 작가를 만났을 때 책이 그대가 되었다. 작가가 그대가 되었으며 주인공이 또한 그대가 되었다. 길을 걷다가 길섶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이 그대였으며 캄캄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그대가 되었다. 나의 그대는 나이불문 대상불문이다.
그대는 꿈이다. 지금까지 숨이 차도록 찾아 헤맨 미지의 그 무엇이다. 저만치서 손짓하여 따라가면 다가간 거리만큼 멀어지는 꿈. 산을 하나 넘으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사력을 다하여 산등선에 올라서면 다시 그 높이만큼 올라서서 유혹하는 꿈이다. 소녀시절에 만난 그 꿈을 따라 예까지 왔다. 고단한 여정이었다. 그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고 아직도 잡히지 않는 꿈을 주목하면서 쉴 수 없는 일상이다. 더러 교차로를 만났을 때도 일순의 망설임 없이 직진하였다. 그 길을 수십 년 동안 걸어왔건만 일정 구간을 무한 반복하면서 진전 없이 제자리걸음이다.
그대를 거머쥐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였다면 지금쯤 어디에 당도했을까. 진작부터 야망을 품고 전력질주 하였더라면 저만치 앞서갈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 출발선상에 미리 기다리고 있지 못했을까. 도중에 도돌이표를 연주하지 않고 곧장 달렸더라면 지금쯤 목적지에 도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빗줄기가 땅을 적시듯 조소가 번진다.
그대는 운명이다. 나의 그대는 잡을 수 없는 파랑새인지도 모른다. 소나기 내린 날 햇빛에 반사된 빛들의 반란, 무지개인지도 모른다. 일생에 몇 번 볼 수 없는 무지개! 과학책에서 햇빛을 등지고 호수를 통하여 물살을 뿌리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무지개를 잡으려고 가없는 발돋움을 하던 내가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무지개를 알았을 때의 허무와 허탈감은 단애의 끝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그대! 내가 사는 이유이다. 나를 살게 한다. 내가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착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은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따뜻하게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이유도 그대다. 밤하늘에 그물을 치고 붙들고 싶은 순결한 별이다. 망망대해에 빈 낚싯대 드리우고 불을 밝히는 등대의 기다림이다. 삼라만상의 소리를 한 편의 詩로 붙들고 자지러지는 나르시시스트의 환호다.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혼신을 다하여 전신을 땀으로 흥건히 적셨는가. 열정을 다하여 코피를 쏟았는가. 제 몸의 가시로 제 심장을 찔러 피투성이가 된 꽃의 사연을 들었는가.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