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7,1-9; 마태 11,20-24
+ 찬미 예수님
이사야 예언자는 남유다의 예언자인데요, 기원전 740년경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얼마 뒤인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합니다. 멸망 직전 북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은,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남유다에도 동맹을 제안했지만, 유다 임금 아하즈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이 아하즈를 폐위하고 다른 왕을 세우기 위해 유다를 공격하러 오는데요, 이것이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독서에는 ‘에프라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에프라임이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동맹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합니다. 아시리아 임금에게 사신을 보내어 “저는 당신의 종이며 아들입니다. 오시어 …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하즈 자신과 유다 왕국이 완전히 아시리아에 종속되겠다는 뜻입니다. 야훼 하느님께 드려야 할 고백을 강대국의 우두머리에게 한 것입니다.
이후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었고 종교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에 예속되기를 자처한 굴욕적 외교에 대해, 그것도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그러한 길을 택한 아하즈의 처신에 대해 이사야는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그에게 말하여라.”
‘스아르 야숩’은 이사야의 아들 이름인데,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한편, ‘윗저수지’는 당시 동맹군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수로의 방향을 돌리는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었습니다. 이 수로 끝에서 아하즈를 만나라고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군사적인 대비책만을 강구하고 있는 아하즈에게, 당신에 대해서는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는 말씀으로 1독서는 끝나는데요,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로 타아미누, 로 테아메누”입니다. ‘믿다’와 ‘서 있다’는 같은 어근에서 파생한 말인데요, ‘아멘’ 역시 같은 어근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특정한 교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정말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지하는가’라는 차원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마치며 ‘아멘’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서 있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를 향해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티로와 시돈은 이교인들에 의해 더럽혀졌기에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된 도시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을 향해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14,13)를 인용한 것인데요, 이사야는 하늘까지 오르려던 바빌론 왕의 야망을 조롱하며, 그가 당시 가장 밑바닥이라 생각되던 저승으로 떨어질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카파르나움을 바빌론에 비유하시는가 하면,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소돔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정착하기 이전에 멸망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세 고을은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도시들이었지만, 기적들에 반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습니다. 그들은 왜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기적들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주님의 은총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도시들에서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수많은 은총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놀라고 감사하며 대하고 있을까요?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저는 작년 재의 수요일에 담배를 끊었고 1년 5개월이 되었습니다. 주위에서 대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었습니다. 의지력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주위 분들이 기도를 많이 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담배 끊을 힘을 얻었고, 다리가 아프셔서 자전거를 못 타시는 분들도 많으신데, 제가 매일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제 자랑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을 제 자랑으로 돌릴 때, 하느님의 것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릴 은총을 제 공로로 여기는 것이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힘에 기대는 것이나 모두 하느님 외의 다른 것을 믿고 따르는 우상 숭배입니다.
1독서의 말씀을 다시 되뇝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아하즈를 만나는 이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