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과거 제도
가문 대신 능력 묻던 시험… 1000년 넘게 이어졌죠
과거 제도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입력 2025.11.12. 00:39 조선일보
13일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날입니다. 대학 입학을 위해 치르는 수능은 국가가 직접 주관하는 중요한 시험이에요. 그만큼 관리나 감독도 매우 철저하지요.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이처럼 국가 차원에서 관리·감독하는 시험 제도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나랏일을 할 우수 인재를 뽑기 위해서였죠. 유교 등 학문 시험으로 국가 관리를 선발하던 ‘과거 제도’가 대표적이랍니다. 과거 제도는 중국에서 시작돼 1000년 넘게 이어졌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도 전파됐어요.
중국 송나라 때 과거 시험을 보는 모습 그림. 송나라 때는 황제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 ‘전시’가 생기는 등 과거 제도가 전성기를 맞았어요.
황제권 강화를 위해 시작한 과거 제도
과거 제도는 587년 중국 수나라에서 처음 시행됐습니다. 그 전만 해도 주로 출신 가문을 보고 관리를 선발했대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집안 출신이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죠. 반면 귀족 집안이면 대대로 고위 관리가 됐던 거예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황제는 귀족을 견제하고 자신의 권한을 강화할 방법을 고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도입된 게 출신 가문을 보지 않고 황제에게 충성할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였습니다.
이후 당나라는 과거 제도를 더 체계적으로 만들었어요. 시험 과목을 늘려서 더 많은 분야의 관리를 뽑았습니다. 특히 다른 나라와 교류가 많던 당나라에는 외국인도 응시할 수 있는 ‘빈공과’라는 과거 제도가 있었어요. 신라 유학자 최지원이 당나라 빈공과 장원급제(1등)를 하기도 했죠. 또 당나라 말기로 갈수록 과거 시험 응시자가 늘었고 최고위 관료 중에서도 과거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답니다.
송나라 때 과거 제도가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이전까지는 각 지방에서 1차 시험을 보고, 1차 합격자들만 수도에서 2차 시험을 봤는데요. 송나라 때는 황제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가 새롭게 생겼죠. 이 과정을 거쳐 뽑힌 관료들은 황제에게 더 충성하게 됐다고 해요. 송나라는 부정 시험을 막기 위한 개혁도 했어요. 채점할 때 수험생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이름을 종이로 가리고, 수험생의 필적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급 관리가 답안지를 베껴 쓴 뒤, 베껴 쓴 답안지를 채점했답니다.
‘북관별과도(北關別科圖)’라는 제목의 조선 시대 그림이에요. 조선 함흥에서 과거 시험을 보는 모습을 담았죠.
수십 년 공부해 응시하는 과거 시험 경쟁률은?
과거 제도에는 학문과 행정을 담당하는 문관,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무관, 그 외 전문 기술을 담당하는 기술관 시험이 있었어요. 높은 벼슬을 얻으려면 이 중 문관 시험을 치러야 했지요. 문관 시험을 보려면 57만 자나 되는 유교 경전 12종을 완벽하게 외울 줄 알아야 했답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려면 어릴 적부터 수십 년간 꾸준히 공부해야 했어요. 이 외에도 시 창작 능력과 논술 능력 등도 평가받았대요.
그렇다면 이 만만치 않은 시험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요? 대체로 정기 과거 시험은 3년에 한 번 치러졌어요. 12세기 중엽 과거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한 1차 시험의 합격률은 100분의 1 이하였고, 2차 시험의 합격률은 100분의 3 정도였다고 합니다. 수험생 3000명 중 1명꼴로 합격한 셈이죠.
조선 시대 과거 시험지 ‘시권(試券)’. 응시자는 시권에 자신의 이름과 답안을 쓰고 감독관은 점수나 등수 등을 적었지요.
과거 제도의 한계와 폐지
옛 중국의 과거 제도는 원칙적으로 천민을 제외한 모든 계층이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시험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형편이 여유로운 사람들만 과거에 도전할 수 있었죠. 시험 공부에만 비용이 든 것도 아니었어요. 시골에 사는 수험생은 시험을 치르기 위해 대도시와 수도를 오가야 했는데, 교통비나 숙박비가 많이 들었거든요.
합격이 워낙 어려운 만큼 시험을 엄격하게 관리했지만, 부정행위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시험장에 책을 몰래 숨겨 들어가거나, 작은 종이에 책 내용을 베껴 가는 데서 그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이 대신 시험 봐주기, 땅굴을 파서 몰래 답안 전달하기, 속옷에 깨알만 한 글자를 빽빽하게 적어 가기 등 기상천외한 부정행위도 등장했죠.
과거 제도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출신 배경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출세할 길을 열어주는 혁신적인 제도였어요. 그러나 돈을 주고 시험 문제를 알아내는 등 부정행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 근대로 접어들면서 유교 사상에 기반해 관리를 뽑는 과거제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어요. 그렇게 청나라 말기인 1904년 마지막 시험을 치르며 과거 제도는 중국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답니다.
베트남 레 왕조 전성기를 이끈 성종의 조각상이에요. 레 성종은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과거 시험을 시행했답니다. /위키피디아·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베트남으로 뻗어 나간 과거 제도
과거 제도는 우리나라와 베트남 등 주변국에도 퍼졌어요. 958년 고려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온 쌍기의 제안으로 과거 제도를 처음 시행했어요. 광종은 과거를 통해 새로운 세력을 관리로 앉히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죠. 고위 관료의 후손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 제도가 있었지만, 음서 제도로 관리가 돼도 고위 관료로 오르려면 과거를 거쳐야 했어요.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과거 제도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고려와 조선에서도 천민을 제외한 모두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평민이 합격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많은 선비는 과거 합격을 평생의 숙제로 삼고 살았습니다. 과거 제도 폐지 이후 우리나라도 유교 경전이 아닌 법학, 외교 등 전문 분야에 대한 시험 제도를 도입해 관리를 선발하기 시작했죠.
베트남에서는 1075년 리 왕조 때 과거 제도가 시작됐어요. 그러나 불교 승려의 정치력이 세서 과거 제도가 큰 영향력을 갖진 못했대요. 이어진 쩐 왕조 때도 과거 출신 관료의 영향력이 작았죠. 이후 레 왕조의 초기 황제들이 왕권 강화를 위해 나라의 통치 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꾸고 과거 제도를 정비했어요. 전성기를 이끈 레 성종(타인똥 황제)은 3년에 한 번씩 정기 과거 시험을 시행해 유학생들이 관료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넓혔어요. 합격자를 기리기 위해 돌에 명단을 새겼는데, 이 비석은 지금도 베트남에 남아있답니다.
정해민 기자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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