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저 영양공주가 되다.
이 때 천자가 태후께 나아와 문안 하시매, 공주와 정씨로 하여금 협방으로 피하게 하고 이르시기를,
“내 공주의 혼사를 위하여 양소유의 예폐를 돌 보내게 하였는데, 마침내 덕화(德化)에 손상함이 있는지라 정사도 집에서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할 것이요, 정녀로 하여금첩이 되게 하는 것 또한 강박한 처사이기로, 오늘 내 정녀를 불러보매 아름답고 또 재주가 있어 족히 공주와 형제가 될 만한지라, 이러므로 내 정녀와 더불어 모녀지의(母女之義)를 맺고서, 공주와 같이 양소유에게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데 이 일이 과연 어떠하오?”
상이 매우 기뻐하며 하례하시되,
“이는 성덕이 천지와 같사옴이니 자고로 두터운 혜택이 태후께 견줄 사람이 없소이다.”
태후가 곧 정씨를 불러 황상께 뵙게 하시니, 상이 명하사 전상에 오르게 하고, 태후께 말씀하시기를,
“정씨 이미 황제의 누이가 되었거늘 아직도 평복을 입고 있으니 어찌됨이오이까?”
태후가 이르시되,
“황상의 조칙이 내리지 아니했다 하여 장복(章服)을 굳이 사양하오.”
상이 여중서(女中書)에게 명하시어 난봉문(鸞鳳紋)의 홍금지(紅錦紙) 한 축을 가져오라 하시니, 진채봉(秦彩鳳)이 받들어 올리자 상이 붓을 들어 쓰려 하시다가 태후께 물으시되,
“정씨를 이미 공주로 봉하였으니 나라 성을 줄까 하나이다.”
태후가 말하시기를,
“내 뜻 또한 그러하나 내 말들으니 정사도 내외는 나이 이미 노쇠하고 다른 자녀가 없다한즉, 내 노신의 성을 전할 사람이 없음을 민망히 여기니, 그 본 성대로 둠이 역시 진념(軫念)하는 뜻이로다.”
상이 친필로 크게 써 이르시되,
“짐이 태후의 성지를 받들어 양녀 정씨로써 봉하여 영양공주(英陽公主)를 삼노라.”
쓰기를 마치시매 황제와 황후 양전궁(兩殿宮)이 어보(御寶)를 찍어 정씨를 주시고 궁녀를 시켜서 관복을 받들어 정씨를 입히시니 정씨는 정상에서 내려와 사은하더라.
상이 난양공주로 하여금 조차(座次)를 정하게 하실새, 영양(英陽)이 난양(蘭陽)보다 한 해위가 되나 감히 위에 앉지 못하니, 태후가 이르시되,
“영양공주는 이제 내 달이니 형이 위에 있고 아우가 아래에 있음은 예이거늘, 형제간에 어찌 가히 겸양하리오?”
영양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되,
“오늘의 좌차는 곧 후일의 항렬이온데 어찌 감히 처음에 삼가지 아니하겠나이까?”
난양공주가 말하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조쇠(趙衰)의 아내가 곧 진문공(晉文公)의 달이로되, 位를 전취한 嫡室에게 사양하였거늘, 하물며 저저는 소매의 형이온데 무슨 의심이 있을 수 있었겠나이까?”
정씨의 사양함이 자못 오래다가, 태후가 명하니 나이를 따라 정하시매, 이후 궁중이 다 영양공주라 일컫더라.
태후가 두 공주의 글지은 것을 상께 보이시니 상이 또한 칭찬하시되.
“두 글이 다 같이 묘미 잇으나, 영양의 글이 주지(周詩: 시경의 주 남편)의 뜻을 읶쓸어 덕을 후비(侯后)에게로 돌려 보냈으니 매우 체례(體例)를 얻었나이다.”
태후가 또한 이르시되,
“상의 말씀이 옳도다.”
상이 다시 이르시되,
“태후께서 영양을 사랑하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실로 전에 없는 바이오라, 또한 우러러 청할 일이 입삽나이다.”
하고, 이에 진중서(秦中書)의 전후 사실을 들어 아뢰되,
“진채봉의 아비가 비록 역적의 죄로써 죽었사오나 그 조상이 다 조정의 신자(臣子)이오니 그 정상을 진념하여 공주를 쫒아 시집을 가게 하여 잉첩(媵妾:귀인의 시중을 드는 첩)을 삼고자 하오니 이를 태후께서 긍측(矜惻)히 여기시고 허락 하옵소서.”
태후가 두 공주를 돌아보시자 난양이 아뢰기를,
“진씨가 일찍이 이 일을 소녀에게 말하더이다. 소녀 이미 정의가 친밀하고 서로 떨어지고자 아니하오니, 마마의 처분이 아니 계실지라도 이 마음이 있었나이다.”
태후가 진채봉을 불러 하교하시되,
“공주가 너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할 뜻이 있는고로 특별히 너로 하여금 양상서의 잉첩을 삼으니, 이후로 더욱 정성을 다하고 그로써 공주의 은의(恩誼)를 갚도록 하라.”
진씨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은한 후에 또 하교하시되,
“두 공주의 혼사를 쾌히 정하매 홀연 기쁜 까치가 와서 길조를 알리어 두 공주의 글을 내 이미 보았으니, 너도 또한 글을 지어 그 경사(慶事)를 같이 하라.”
진씨가 명을 받고 즉시 글을 지어 드리니, 읊었으되,
기쁜 까치가 깍깍거리며 궁궐에 들렸으니
봉선화 위에 춘풍이 일도다.
보금자리를 편케 하여 남으로
날아감을 기다리지 않고
삼오성이 드문드문 바로 동녘에 있더라
태후가 황상과 함게 어람하시고 매우 기꺼워하며 이르시기를,
“옛날에 설경(雪景)을 읊던 사녀(謝女: 사람의 이름)도 이를 따르지 못하리로다. 이 글 속에 또한 주시를 이끌어 정실과 소실의 분의(分義)를 잘 지키니, 이것이 더욱 가상하도다.”
난양공주가 아뢰되,
“이 글제의 글재료가 본래 많지 아니하옵고 또한 우리 형제가 이미 글을 지었사오니 떼어 올 글이 없나이다. 조맬덕(曹孟德:삼국지에서 나오는 조조)의 이른바 나무로 세 겹을 둘렀으되 가히 의지할 가지가 없다는 것이 본디 길한 말이 아니오니 말을 끌어 쓰기가 어렵거늘, 이 글이 맹덕과 두자미(杜子美)와 주시(周詩)를 섞어 끌어 한 귀를 지었지만 조금도 험 잡을 곳 없사오니 실로 옛사람들이 진씨를 위하여 먼저 글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나이다.”
태후가 이르시되,
“예로부터 여자로서 능히 글짓는 자는 오직 반희(班姬: 한나라 상제의 첩)와 채녀(綵女)와 탁문군의 넷뿐이더니, 이제 절재(絶才)의 여자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가히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노라.”
난양공주가 말하기를,
“영양공주의 시비 가춘운의 글재주가 또한 신기하더이다.”
이 때 날은 저물어 상은 외전으로 환어하시고 공주도 또한 물러가 침전에서 드니, 이튿날 새벽에 닭이 첫홰를 치며 울매 영양이 태후께 들어가 문후하고 집에 돌아감을 주청하되,
“소녀 궁중으로 들어올 때, 부모가 필연 놀라고 황송하였을 것이오니 오늘 돌아가 부모에게 태후마마의 은덕과 소녀의 영광을 일문 친척에게 자랑코자하오니, 엎드려 비옵건데 마마는 허락하옵소서.”
태후가 타이르시되,
“딸아기야, 어찌 번거롭게 대내(大內)를 떠나리오? 내 너의 친모와 상의할 일이 있도다.”
하고, 전교를 내려 최부인으로 하여금 입조(入朝)하라 하시더라.
이때 정사도 내외는, 딸아이의 비자가 전하는 말을 듣고 놀란 마음이 놓이며 감축하여 마지 않는데, 갑자기 태후의 부르심을 받고서 급히 내전으로 들어가니, 태후가 접견하고 이르시기를,
“내 부인의 여아를 데려옴은 대체로 난양공주의 혼사를 위함이었는데, 소저의 얼굴을 한 번 보매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양녀로 삼아 난양공주의 형이 되게 하였으니 필시 과인의 전생 딸이 이 세상에서 부인 집에 탄생함인가 하노라. 영양이 이미 공주가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성을 줄 것이나, 내 부인의 자식 없음을 진념하여 성을 고치지 아니 하였으니 부인은 오직 나의 지극한 정을 받들지어다.”
이에 최부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신첩이 늦게서야 여식 하나를 낳아 사랑하다가, 필경에는 혼사가 그릇되와 예폐를 보내게 되어 주고 싶기만 하옵더니, 난양공주께서 여러번 누추한 제집에 왕림하사 친한 딸아이를 사귀시고, 뒤이어 함께 궁중으로 들어와, 세상에 다시없는 은전을 입게 하시니, 마땅히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와 천은(天恩)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오니 신첩의 지아비는 나이 늙고 병들어 이미 벼슬을 하직하옵고, 첩도 또한 늙어서 궁녀를 뒤따라 액정의 때를 지우는 일을 하올 길이 없사온즉, 천지와도 같사온 은덕을 장차 무엇으로써 갚사오리까? 오직 감격하여 눈물만 흘릴 뿐이옵나이다.”
이에 부인이 일어나 절하고 엎디어 우니 옷소매가 젖는지라, 태후가 측은히 여기어 말씀하시기를,
“영양은 이미 내 딸이 되었으니 다시 데려가지는 못하리라.”
최부인이 엎디어 아뢰되,
“모녀가 단란하게 모여서, 하늘 같사온 은덕을 칭송치 못하오니 이것이 한이 되나이다.”
태후가 적이 웃으며 이르시기를,
“성혼 후에는 난양도 또한 부탁할 터이니, 내가 영양을 보듯하라.”
이어서 난양공주를 불러 서로 만나게 하시니 최부인이 누누이 전일의 무례한 허물을 사죄하더라.
태후가 말씀하시기를,
“내 들으니 부인 곁에 가춘은이 있다하니, 내 한 번 봄을 청하노라.”
부인이 곧 춘운을 불러 전각 아래에서 뵈오니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아프로 나오라 한 다음 하교하시되,
“난양의 말을 들으니 네가 글재주가 있다는데, 이제 글을 지어 보겠느냐?”
춘운이 엎디어서 사뢰되,
“신첩이 감히 지존 앞에서 당돌하게 글을 지을 수 있사오리까? 그러하오나 시험 삼아 글제를 듣잡고자 하나이다.”
태후가 지난 번에 지은 세사람의 글을 내리며 이르시기를,
“네 능히 이 글 뜻에 알맞게 짓겠느냐?”
춘운이 그 자리에서 지어 올리니, 읊었으되,
기꺼움을 알리는 적은 정성을 스스로 알지니
우정에서 다행이 봉황의 고동을 따를러라
진루의 봄빛이, 꽃 천 나무에
세겹이 돌렸는데 어찌 한 가지를 빌림이 없으리오?
태후가 다 읽으시고, 두 공주에게 그 글을 보이며 이르시기를,
“가녀의 글재주가 이럴 줄은 짐작치 못한 바로다.”
난양이 여쭙기를,
“이 글이 까치로써 그 몸을 견주고, 봉황으로써 저저를 견주었사오니, 체례가 분명하옵고, 끝 귀에는 소녀가 서로 허락지 아니할까 의심하여 한 가지의 깃들임을 빌리고자 하여, 옛사람의 글을 모으고 시전의 뜻을 캐어 한 귀절로 합하여 이루어졌사오니 진실로 뜻이 정묘하고 간결하여 수완이 민활하나이다. 나는 새가 사람을 의지하매 사람이 스스로 불쌍히 여긴다는 옛말이 혹이 가녀에게 아주 합당한 격언이옵니다.”
공주가 소개하기를,
“이 여중서는 곧 화음현 진씨 여자인데, 춘운과 더불어 해로할 사람이로다.”
춘운이 묻되,
“그러하오면 양류사를 지은 낭자이옵니까?”
이 말에 놀라 진씨가 되묻기를,
“춘랑이 어떠한 사람으로부터 양류사를 들었느뇨?”
춘운이 대답하되,
“양상서께서 매양 낭자를 생각하기고 그 글을 외우시기로 얻어들었소이다.”
진씨가 슬피 그리워하며 외치기를,
“양상서께서는 첩을 잊지 아니하였도다!”
춘랑이 말하기를,
“낭자는 어찌 그러한 말을 하느뇨? 양상서가 양류사를 몸에 지니시고, 보면 눈물이 흐르고 읊은즉 탄식하시더이다.”
진씨가 대답하되,
“상서께서 만일 옛정이 남아 계신다면 첩이 비록 상서를 다시 못뵈고 죽어도 한이 없도다.”
하고, 이어서 비단 부채에 상서의 글 받은 일을 말하니, 춘랑이 또한 이르기를,
“첩이 지닌 보배가 다 상서께서 아는 바로소이다.”
하면서 다시 말을 이으려 할새, 궁인이 알리기를 정사도 부인이 곧 나가신다 하더라. 두 공주가 들어가 모시고 앉으니 태후가 최부인에게 하교하시되,
“양소유가 미구에 돌아올 터이니 전일에 예폐를 부인집 문에 들여 놓겠으나, 이제 영양은 곧 내 딸인즉 두 딸아이의 혼례를 함께 거행코자 하노니, 부인은 허락하겠느뇨?”
최부인이 엎드려 사뢰기를,
“신첩은 오직 태후마마의 처분만 기다리나이다.”
태후가 웃으며 이르시기를,
“양상서가 영양을 위하여 나라의 처분을 세 번 항거하였으니, 내 도 한번 속여 보고자 하노라. 상말에 ‘흉측길(凶測吉)이라’ 하였으니 상서가 돌아온 후에 말하되 정소저 우연히 병을 얻어 불행이도 세상을 떠났다 하라. 또 전일 상서가 올린 상소문에는 정녀를 몸소 보았다 하였으니, 초례를 하는 날, 상서가 그 모습을 아나 모르나 시험코자 하노라.”
최부인이 분부를 받고 하직하고 돌아설새,
영양이 전문 밖에 나와 절하여 보내며 춘운을 불러 양상서를 속일 계교를 조용히 일러주거늘, 춘운이 여쭙기를,
“첩이 신선도 되도 귀신도 되어 상서를 속인 일도 마음에 걸리거늘, 또 다시 계교를 거행함은 너무 무례하고 단정치 못한 것이 아니오리까?”
영양공주가 말하되,
“이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태후마마께서 내게 명하시는 바로다.”
춘운이 웃음을 머금고 물러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