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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칼럼] (14) 생태주의자 예수
돌이켜보면, 21세기는 전쟁으로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2001년 9월 11일에 9·11 테러가 일어났고, 2003년 3월 20일에 이라크전쟁이 일어났다. 이라크전쟁은 미국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개발과 테러지원에 대한 반대 명분을 내세웠지만, 입증되지 않았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테러와 전쟁의 근원적 원인은 ‘석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유를 에너지로 사용하게 된 산업문명시대에 인류는 엄청나게 비약적 발전을 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 혜택을 많이 누린 국가에 속한다. 반면 화석연료시대에 전쟁과 테러는 끝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한편으론 고조되는 측면도 있다.
그런 점에서 화석연료는 인류에게 풍요와 함께 공격적 성향과 폭력성을 증폭시켰다고 생각된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원자력에너지도 전쟁에서 개발된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전사고의 치명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점차 대체에너지를 찾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 또한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기후변화를 인식하면서 자연에너지로 대체하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 전환의 추세에 대해서 단순히 정책전환의 관점에서만 접근할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초래될 사회변화와 인간의 성격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독일의 언론인 프란츠 알트는 「생태주의자 예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태적 발전과 인류의 평화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같은 기존의 에너지 자원이 희소해질수록 그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무력 충돌의 위험성은 증폭된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석유로 인한 전쟁이냐, 아니면 태양을 통한 평화냐?”
저자의 말대로 에너지 쟁탈전이 더 고조될 가능성도 있고, 기후변화로 초래되는 재앙의 증대로 약탈적 공격과 폭력이 일시 증대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크게 보아 태양에너지와 같은 자연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인류의 폭력 성향과 무력 충돌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된다. 자연에너지는 기본적으로 각 지역의 태양, 바람, 물의 환경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알트는 ‘태양을 통한 평화’를 주장하면서 “시냇물·들판·태양·바람과 사랑에 빠지고, 동물·식물과 사랑에 빠지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모든 사람들과 사랑에 빠져 온 세상과 하나된 삶을 살았던” 예수를 이야기한다. 자연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면 우리도 자연의 선물에 더 감사하며 사랑을 증대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너지가 일반화될 것으로 예측되는 21세기 중반 이후는 각 지역별로 자생력을 갖춘 새로운 세대의 글로벌 평화네트워크가 가능해 질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인류는 에너지 전환으로 초래된 평화와 사랑의 성향으로 더 결속하고 새로운 생태적 삶의 방식들을 개발해서 기후변화로 초래되는 재앙에 잘 대처해나갈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와 들에 핀 백합처럼 아무 걱정 없이 입고 먹고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했다(마태 6,26-33). 우리 다음세대는 한걸음 더 그런 세상에 가까이 나아갔으면 좋겠다.
[생태칼럼] (16) 생명의 나무와 유전자 편집
최근 우리는 살충제 계란 파동을 겪었는데, 돌이켜 보면 2008년 수입쇠고기 광우병 파동, 2010~2011년 구제역으로 인한 가축 350여 만 마리 살처분, 그 후에도 2014~2016년 3차례 구제역 발생, 2008년 조류독감으로 1000만 마리가 넘는 가축 살처분, 2011년부터 2017년 사이 네 차례 조류독감 발생과 가축 살처분, 특히 2016년에는 살처분 숫자가 3300만 마리를 넘기는 사태 등을 겪어왔다.
이러한 대강의 흐름만 보더라도, 축산업 관련사고가 전국적 규모로 대량화, 연례화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장형 축산시스템이 그 원인이라는 것은 이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가치관에서 찾아야 한다.
스위스 출신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삶의 격」이라는 책에서 공장형 축산시스템은 동물을 “인간의 식생활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사육된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동물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그들 하나하나가 경험의 ‘주체’임에도 애초부터 ‘죽임을 당하고 상품으로 변환된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길러지고 관리되며,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음식물의 전 단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은 모두 진화계통수인 생명의 나무의 가지들이다. 생명의 나무 꼭대기에 앉은 인간은 다른 가지의 생명체를 철저히 사물화하여 생산하고 사육하며 잔인한 방식으로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와 웰빙의 가치가 우선시되고, ‘인간’ 외 다른 존재에는 1차적 가치를 두지 않는 과도한 인간중심의 가치관은 오랜 생명진화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생명의 나무를 훼손하고 나무가 뿌리내린 지구마저도 파괴하는 생태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인간 외 생명체를 다루는 이러한 가치관은 이제 인간 배아를 다루는 방식에도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
지난 8월 2일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이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와 공동으로 인간 배아에서 비후성 심근증을 유발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크리스퍼(CRISPR-CAS9) 유전자 가위로 잘라내는데 성공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생명윤리법상 실험이 금지되어 있어 관련 정부기관 중심으로 ‘연구 목적 범위 내’ 인간배아 실험은 허용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자는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한다.
유전자가위 연구의 실험성공은 기술특허와 난치병 등 치료제 개발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미래먹거리’ 산업이기 때문에 국가가 생명과학기술정책을 경제적 성장동력(유전자가위 기술은 제4차 산업혁명으로 꼽히는 ‘바이오 융합기술’의 핵심기술로 활용되면서 기존 산업의 지형을 새롭게 바꿀 것으로 기대된다고 한다)으로 취급하는 한 이 연구허용을 반대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경제와 건강면에서 인간 웰빙의 가치가 최우선시되고, 이 가치는 배아연구나 공장형 축산의 추세에 일관되게 흐르는 매우 강력한 것이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생명나무에는 손을 대지 못하도록 주 하느님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한다(창세 3,24). 유전자를 인간기술로 임의편집하는 것은 생명의 성역을 건드리는 일이기에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되, 반대만으로는 웰빙의 가치관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금지할 것인지, 어디까지 한계를 둘 것인지, 명료하고 면밀한 과학적 대안을 위한 논의가 절실히 요구된다.
[생태칼럼] (12) 무지개의 언약
지난 5월에는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수도 비슈케크(Bishkek)에서 열린 고려인 이주 80주년 기념 학술행사에 참가할 기회를 가졌다. 행사 다음날에는 한국에서 함께 간 일행과 높이 3600m에 이르는 텐산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식쿨(Issykkul) 호수를 방문했다.
이식쿨 호수는 6만5000년 정도의 나이를 가졌다고 한다. 바다처럼 길게 누워있는데 면적은 보통 제주도의 4배 크기로 비유된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의 계곡 물들이 계속 흘러나와 모여 고여있다가 수증기로 증발해서 수면의 높이를 유지한다. 그래서 이식쿨 호수 위에는 습기가 많아서 무지개가 자주 뜬다.
호수를 방문한 다음날 점심때쯤 호숫가로 나갔을 때 하늘에 낮게 가로로 퍼진 무지개가 떴다. 그런데 곧이어 그 무지개 위로 커다란 햇무리가 나타나더니 가장자리로 둥그런 무지개가 형성되어 쌍무지개의 장관을 이루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에 마주쳐서 일행은 탄성을 질렀고, 자연스레 무지개의 의미에 대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눴다.
무지개는 비가 멈춘 뒤에 아름다운 일곱 빛깔로 부드러운 반원을 그리며 나타나기에 상서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특히 무지개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언약을 일깨우는 표징의 의미를 갖고 있다(창세 9,17). 창세기에 하느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피신하게 한 후 홍수로 땅 위에 살아있는 인간과 생물들을 모두 쓸어버리셨다. 세상이 사람으로 인해 타락한 것을 보시고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기 때문이다(창세 6,5-7).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축복을 내리신 다음 계약을 맺으신다. 하느님의 계약은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람 뿐 아니라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창세 9,10-11)고 언명하셨다. 생물들이 사람에게 종속되어 계약을 좇아간 게 아니었다. 하느님은 생물들과 따로 계약을 세우셨다. 사람으로 인하여 저주받았던(창세 3,17) 생물들은 이제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으니, 사람으로 인하여 파멸하지 아니하며 하느님이 직접 생명을 보존해주는 존엄한 존재가 되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생물들과 함께 있으라 하셨다. 하느님은 함께 있어야할 사람과 생물들에게 각각 그 존엄을 보장해주는 계약을 세우셨다. 하느님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고 계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다(창세 9,13-14).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사람과 사이에,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시겠다고 했다(창세 9,15-16).
쌍무지개를 볼 수 있었던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은 산의 면적이 90%가 넘어서 자연 속에 사람들이 에워싸여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호수로 가는 길은 넓은 평야와 산맥이 이어졌으며 구름이 따라왔다. 마을마다 함께 살아온 동물들인 하얀표범, 독수리, 양들의 조각들을 세워놓았다. 아마도 이식쿨 호수에 뜨는 무지개는 하느님 계약의 표징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 무지개는 사라졌다. 함께 있으라 한 생물들도 우리 곁에 없다. 우리는 무지개를 잊어버렸다. 하느님은 무지개가 뜨지 않는 곳에서 사람과 생물들에게 축복을 내리신 그 영원한 계약을 어찌 기억할 수 있으랴.
[생태칼럼] (11) 미세먼지 속 ‘정의’ 문제
어느덧 6월, 한해의 반이 지나고 있다. 올 상반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웠던 환경문제는 두말 할 것 없이 미세먼지였다. 절기로 봄이 왔어도, 새순이 오르고 꽃도 피어도, 영 봄 같지 않았다. 뿌연 날씨로 화사한 벚꽃도 그 빛을 잃었다. 입에선 먼지 냄새가 났고, 길거리에선 마스크 얼굴이 일상이 됐다. 2013년,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미세먼지를 1군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미세먼지가 수명을 감축한다는 연구 결과도 종종 보도되고 있다. 헌데, 지난 3월 서울의 공기는 뉴델리 다음으로 세계 최악을 기록했다.
최근 들어, 미세먼지 상태가 나아졌다. 맑은 하늘이 자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미세먼지의 배출원 감소가 아니라 공기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배출원이 줄지 않으면, 미세먼지는 언제고 다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미세먼지의 국내 요인이 50~70%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중국을 비롯한 국외 요인이다. 국내에서는 석탄화력 발전과 경유차가 주요 배출원으로 꼽힌다.
지난 3월 25일, 세계 최대 규모의 석탄 발전 단지인 당진에서 ‘브레이크 프리(Brake Free)’ 캠페인이 열렸다. 전국에서 모여온 시민들이 미세먼지와 기후변화의 주범인 석탄 발전 ‘그만’을 외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더’를 외쳐 왔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운행 중인 석탄발전소가 59기, 건설 중인 것이 6기, 건설 계획인 것이 9기다. 노후 발전소를 폐쇄한다지만, 신규 설비용량이 폐기 예정의 용량보다 5배나 많다.
다행히 에너지 정책의 흐름이 바뀔 조짐이 보인다. 새 정부는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8기를 올해는 6월 한 달간, 내년부터는 3~6월 동안 가동을 중단하도록 했다. 이른 시일 안에 미세먼지 대책기구가 설치될 것 같다. 지자체도 움직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5월 27일, 미세먼지 해법을 찾기 위해 시민 3000명이 참여하는 시민 대토론회를 광화문 광장에서 열었다.
한편, 미세먼지에는 다른 생태 문제에서와같이 정의 문제가 들어있다.
첫째, 개인적 차원의 불평등이다. 우리는 미세먼지의 위험에 똑같이 노출되지만, 그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다. 부자는 공기청정기로 공기를 정화시킬 수 있고, 밖에 나가지 않을 수 있고, 밖에서는 자기 차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생계를 위해 필요하면, 미세먼지가 아무리 심해도 밖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헌데, 누가 더 미세먼지의 발생에 책임이 클까?
둘째, 지역적 차원의 불평등이다. 미세먼지는 수도권에 영향을 끼치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석탄발전소 인근 주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미세먼지로 큰 불편과 피해를 겪어 왔다. 수도권 주민과 지방 주민이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셋째, 국제적 차원의 불평등이다. 미세먼지의 주요 배출국인 중국의 미세먼지 배출량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미세먼지가 어떤 과정에서 배출되는지, 그 과정에서 어느 나라가 수혜자이고 어느 나라가 피해자인지 묻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렇게 미세먼지 문제에는 불평등이라는 정의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태적 접근은 가장 취약한 이들의 기본권을 배려하는 사회적 관점을 포함”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93항). 미세먼지에 대해서도 가난한 이들의 형편을 충분히 고려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생태칼럼] (7) 창조 질서 보전 : 사회정의와 생태정의
사회와 자연의 정의 모두 고려한 창조 질서 보전될 때 평화 가능
누구나 평화를 원한다. 남과 북이 갈라진 한반도에서는 더욱 절박하다. 그러나 최근 사드의 기습 배치를 둘러싼 격렬한 대립이 보여주듯, 평화의 길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무엇일까?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사 32,17)입니다.” 2014년 한국 방문 첫날, 프란치스코 교종이 청와대 연설에서 하신 말씀이다. 평화는 “전쟁의 부재”나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가 아니라, “정의의 작품”이며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다(「사목헌장」, 78항). 정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질서, 곧 창조 질서에 있고, 평화는 창조 질서가 보전될 때 이루어진다.
창조 질서 보전에서 본 정의는 신앙과 관련 없는 어떤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신앙 자체에서 비롯된다. 참된 신앙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이 세상에 심어 놓으신 창조 질서에 있으며, 따라서 신앙은 창조 질서의 존중과 보전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신앙 자체가 정의를 요구한다. 신앙은 정의와 분리될 수 없다.
창조 질서 보전에서 본 정의는 인간 사회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적용된다. 사회 정의를 말한다면, 자연의 정의, 곧 생태 정의도 말해야 한다. 사회 정의와 생태 정의는 별개가 아니라, 창조 질서 보전의 두 가지 측면이다. 생태 정의 훼손의 일차적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이며, 사회 정의 훼손은 생태계 악화를 초래한다. 4대강 사업, 핵발전소, 밀양·청도의 송전탑이 좋은 사례들이다.
사회정의가 제대로 있었다면, 4대강 사업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편법과 변칙으로 시작된 4대강 사업으로 강은 망가졌고, 강가에서 농사짓던 농부들은 땅을 잃었다. 우리는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모두 귀여겨 들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49항).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찬미받으소서」, 91항)이 없는 사회는 자연생태계도 존중하지 않는다. 송전탑으로 삶의 터전을 짓밟힌 밀양과 청도의 힘 없는 이들을 존중했다면, 불과 며칠간의 동계올림픽을 치른다며 가리왕산 원시림을 밀어버렸을까?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만”(82항) 취급하는 사회는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가 설악산의 산양을 존중했다면, 과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까?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을 능멸하고, 세월호를 3년씩이나 바다에 방치했을까?
이렇게 호세아 예언자의 말은 오늘 다시 현실이 된다. 이 땅에 “저주와 속임수와 살인, 도둑질과 간음이 난무”하고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 마저 죽어 간다.”(호세 4,2-3)
오늘 우리의 문제는 “환경 위기와 사회 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다(「찬미받으소서」, 139항). 따라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생태적 접근은 가장 취약한 이들의 기본권을 배려하는 사회적 관점을 포함”(93항)하고, 사회적 접근 또한 생태적 관점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창조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깨닫고 “겸손한 존중”(89항)으로 타자를 대할 때에만 오늘의 문제를 풀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사드 배치를 밀어 붙여 온 현 정부에서 성주 주민을 비롯한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한 겸손한 존중의 태도를 과연 찾아볼 수 있을까?
[생태칼럼] (8)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
환경일보 보도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 발생으로 살(殺)처분된 동물은 총 8524만여 마리이며, 총 4조 4038억 원의 비용이 지출됐다고 한다. 최근 발생된 경우만도 3월 말 현재까지 살처분된 닭, 오리 등은 3720여만 마리이며, 총 3600여억 원이 투입됐다.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하면 예방조치로 질병이 의심되는 농장과 그 농장의 반경 3㎞의 다른 농장을 모두 묶어서 살처분 조치를 하는데, 감염 여부를 가리지 않고 그 반경 안의 가축을 모조리 생매장한다. 몇 년 전부터 달라진 점은 구덩이를 파서 그냥 묻던 것을 플라스틱 저장조 등을 사용하는 것으로 바꾼 정도다.
이러한 집단살육방식의 매몰처분은 사후관리가 부실한 경우, 매몰지에서 제4암모늄염 등 가습기 살균제에 함유된 유해물질과 유사하다고 지적되는 오염물질들을 발생시킨다. 토양 및 수질 오염뿐만 아니라 대기오염을 일으키고, 질산과다 식물 섭취시 청색증 등 인체 질병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사진작가 문선희씨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주최로 가축 살처분 현장에 관한 사진전(‘묻다-동물과 함께 인간성마저 묻혀버린 땅에 관한 기록’)을 열었다. 매몰지 중에서 3년의 법정 발굴금지 기간이 지난 4800여 곳 중 100곳의 현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땅 전체에 곰팡이가 피어올라있기도 했고, 콩밭으로 변한 어떤 현장에는 듬성듬성한 풀 속에 돼지뼈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옥수수밭에서는 제대로 풀이 자라나지 못했고, 물컹한 땅은 알 수 없는 액체를 토해내고 있기도 했다고 한다.
문선희씨는 생명이 죽어 땅에 묻히고 다시 그 땅으로부터 생명이 돋아나는 자연의 순환 리듬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전한다. 생매장된 가축들의 비명 소리를 가두어버린 그 곳은 저주받은 채 땅이 썩어가고 있었다.
한편 겨울이면 월동을 위해 몽골로부터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독수리들도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주로 동물사체를 먹이로 하는 독수리는 민간인 통제선 내 월동지에서 머무르다 가곤 했고 세계적인 멸종 위기의 야생조류이기 때문에 먹이주기를 통해서 보호해 왔다.
그러나 먹이주기 행사가 중단되면서, 독수리들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축산농가들에 떼 지어 나타난다. 그리고 농약을 먹고 죽은 먹잇감을 잘못 먹고서 길바닥에 죽은 채로 발견되기도 한다. 2011년에 구제역 발생으로 350여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생매장된 임진강 근처 야산의 한 매몰지에는, 먹이를 찾는 수백 마리의 독수리 떼가 몰려와 앉아 섬뜩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우리가 값싼 가격에 더 많은 육식을 즐기기 위해서 공장식으로 가축들을 대량생산하는 동안에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로 가축들은 계속 생매장 당하고 있고, 땅은 저주받아 썩어가고 있으며, 야생의 순환 리듬은 교란되고 파괴된다.
성경 말씀 중에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마태 24,28; 루카 17,37)는 구절이 있다. 우리의 이런 상황이 초래할 재난을 예고하는 듯해서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슴이 서늘해졌다.
성경의 이 종말론적 메시지는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촉구한다. 또한 아무도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 외의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을 너무나 상실해버렸다. 언젠가 우리 안으로 독수리들이 모여들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