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87:1-3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바벨론 포로 이후 교회가 직면한 비참한 형편은 성도들이 낙심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교회를 놀랍고 믿기지 않는 방법으로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습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입니다.
1) 이 세상의 자녀들이 번영을 누리고 자기들의 처지에 만족해 하면서 번영과 권세를 누리고 있는 한 그들은 교회를 교만한 마음에서 멸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심지어는 환난을 당하고 난 이후라 할지라도 자기들이 도취해 있던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꾸준한 조사에 의해 분명해집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믿음과 예배에 대해 무모한 멸시를 계속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쾌락이나 부귀나 찬란한 영광에 만족을 느끼고 하나님이 없어도 행복할 것으로 공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좋은 것들로 배를 채우게 하시다가도 적당한 때에 이르면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한 형벌을 내리시는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 위에 여러 가지 괴로운 환난들로 짐을 지우시고 가장 낮은 위치나 멸시를 당하는 위치에 두시어 마치 비참한 것처럼 또는 최소한 다른 사람의 멸시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실 때가 가끔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그림자의 모습으로 나타내는데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관심을 다른 문제로 돌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라고 말씀하신 진리에 자기들은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놓여 있기에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나 정부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소동과 폭풍으로 온세상이 흔들리는 중에도 교회만은 계속 안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원리적으로 교회는 동일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보호하심으로 오래 계속된 전쟁으로 수고와 고난을 겪은 후 마침내 지극히 높으신 소명의 승리의 면류관을 씁니다.
이 진리 속에는 하나님의 순전하신 은혜가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은 이 세상 왕국들의 여러 가지 막중한 반역 중에도 교회를 대대로 계속 확장시키고 멸망에서 보호해 주시므로 온 세상에서 교회를 끝까지 유지해 나가신다는 이적이 들어 있습니다.
시편 87 편
그러나 악인들은 풍성한 부(富)를 누리면서 자기들의 세속적 재물과 권위를 마음껏 누리는가 하면 교회는 마치 맹렬한 홍수에 휩싸인 난파선처럼 많은 어려움에 시달리기 에 교회의 복의 근본은 하늘에서 영원한 만족을 누리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시가 기록된 시기에 대한 관심은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록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고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회집되어 오랜 분산 끝에 한 몸으로 연합되었으며 성전은 재건되고 제단이 다시 세워져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다시 회복되었다 할지라도 많은 백성들에게는 교회가 단지 천하고 멸시를 당하는 보잘것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기에 백성들은 점점 그들의 원수들에 의해 약화되어 갔고, 성전은 그 본래 가지고 있던 내적인 장엄성에서 멀어졌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여겨져 그들이 넘어지기 이전의 상태로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경험한 패배에 대한 기억과 현재 당면한 막중한 괴로움은 성도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여 마침내 절망 속에 가라앉도록 할 만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막중한 환난에 그들이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께서는 이 시에서 그들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을 뿐 아니라 교회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한한 영광에 대한 소망을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2:9)는 학개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 우리는 이 시가 주는 교훈이 무엇이며, 부합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이 시에 들어있는 위로는 당시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을 고난 중에서도 바로 설 수 있게 해 주었고, 음부에서부터 일어나 하늘에 오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성령으로 예언된 것은 어떤 것이나 다 성취되었다고 알고 있는 오늘날에 조상들이 경험했던 것을 성령에 따라 말씀한 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력하게 붙들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조상들보다 더 배은망덕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어 그의 교회를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신 것을 적합한 말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종교는 유대의 좁은 지역 안에 갇혀있기 전에 온 세계로 널리 확장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한 백성들에게만 알려지셨던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의 각기 다른 말들로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미신과 실수로 비참한 지경으로 갈라져 있던 세상이 거룩한 신앙의 연합체 속에 서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겨루던 모든 사람들이 전에는 몹시 싫어하던 유대인들의 사회에 동참하여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시편 87 편
땅의 왕들과 그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게 되었으며 이리와 사자들이 어린양으로 변화되었고 세상의 모든 영광과 부귀와 찬란한 것들과 값진 장식품들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은사, 즉 성령의 은사들이 성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교회의 지체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에서부터 모여 이적적인 방법으로 증가되고 보존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에 복음이 널리 전파됨으로 얻어지는 풍성한 열매는 동시에 놀랍게 맺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교회의 명성(名聲)이 찬양되지 않았다 해도 황금 시기라 불리울 수 있을 그 당시의 아름답고도 특출했던 상황은 교회가 진실로 하나님의 천국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 당시에 성도들은 교회의 탁월함은 육체적인 감정이나 판단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가장 왕성했을 때 그토록 교회가 영광스럽게 된 것은 직위나 황금이나 값진 돌이 아니었고 순교자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혜로 부를 누리고 있으나 땅의 소유물로는 가난하고 빈곤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누리던 성결의 아름다움과 영광은 결단코 세상의 눈에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수많은 공인된 원수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맹렬하고도 잔인하며 더욱 간교한 방법으로 간접적인 핍박을 가해 오는 원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깨우침과 경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아름답고 영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 속에는 어떤 불운한 경우라 해도 성도들에게 교회의 보다 더 완전한 상태를 기다리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에 매우 알맞은 위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한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즉 교회의 아름다운 명성은 우리 조상들의 태만으로 악인들의 발 아래 더럽혀지고 짓밟혀서 벌써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들의 죄의 짐에 짓눌려 비참한 절망과 마귀와 세상의 신랄한 비방과 폭군들의 잔인함과 원수들의 악한 모략 아래 신음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편안하게 살기를 더욱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이 시에서 얼마나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이 시를 계속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 일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시의 표제는 저자가 영장으로 성가대에 의해 불려지게 기록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라 자손 중 어떤 레위인이 이 시를 지었다고 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시편 87 편
2. 본문 1절은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입니다.
1) 이 구절에 이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조금 뒤에 언급된 것을 볼 때 우리는 어느 곳에든지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거하고 계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또한 그 나라는 산악지대이므로 우리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주위에 산맥을 이루는 여러 개의 인접한 산을 안중(眼中)에 두고 있다고 봅니다.
예루살렘이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시125:2).
그러므로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의미는 하나님께서 여러 산들 중에서 그의 성을 세우시기 위하여 성산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 곧이어 “지존자가 친히 ..... 세우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다른 성들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성에 관계하고 계신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132:14).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기초가 놓이고 세워지기는 하였지만 세상 정부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성소,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보좌로 세우셨다는 차이가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사14:32) 라고 이사야도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온 유대 나라가 하나님께 바쳐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성읍들은 버리시고 오직 이 성만을 자신이 직접 다스리시는 곳으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땅에 속한 정치가 아니라 영적인 통치입니다.
순수한 종교,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배, 거룩함과 교리는 그 당시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 2절은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한 성의 모든 탁월함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값없는 선택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시편 78편 60절과 6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실로와 에브라임 지파와 요셉의 장막은 싫어서 버리시고 사랑하시는 시온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이 왜 다른 모든 곳을 제치고 한 곳을 택하셨는지. 또 어떤 가치 때문이 아닌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곳을 택하셨는가를 지적합니다.
왜 그토록 고귀하게 예루살렘을 구별해 놓으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그곳을 심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이 한마디로 그 대답이 충분할 것입니다.
시편 87 편
이곳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것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선택하신 목적은 그곳에 참된 종교가 유지되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성도들의 단합이 유지되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신 이후부터는 이곳에서 온 지구상에 참 종교가 전파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왜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찬송하기로 했는가?
또 하나님께서 그 주인이 되시고 설립자와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곳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는 그곳이 다른 곳보다 우월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시온”이라 하고, 온 성의 경내를 “문”이라 한 것은 이중 제유법입니다.
4. 본문 3절은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입니다.
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네 안에서 들리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도다’ 입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의도하는 것, 아니 그보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온 백성들의 천하고 멸시를 당하고 또 사면에서 그들에게 무거운 압제를 가하여 공격하는 수많은 원수들, 자기들의 길에 놓여있는 장애물들을 극복할 만큼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적은 수효, 날마다 일어나는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변화, 점점 부패 속에 빠져들어 마침내는 절망에 빠지는 위험스러운 생활상에서부터 거룩한 성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절망이 성도들의 마음을 전복시키고 그들을 실패시키는 원인이 되지 못하도록 그들 앞에는 주님께서 특별히 교회의 미래 형편에 관해서 말씀하신 위로와 보장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을 현재 사물에서 장차 교회가 누리게 될 놀라운 영광에 대한 소망과 더불어 그들에게 주시기로 했던 언약에로 향하도록 한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이나 이성의 눈으로 보기에는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해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는 망대에 서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이 성취될 것을 끈기 있게 기다리라는 말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이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받았던 권면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로 그들이 옛날의 예언을 기억하여 지키고 특별히 이사야 40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까지 나타나는 자들에게 눈길을 돌이켰던 점입니다.
둘째로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한 점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 교회의 복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87 편
시87:4-7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시인은 예루살렘을 장차 신약 시대에 일어날 교회로 상징하였습니다.
1. 시인은 신약교회의 모체(母體)인 구약교회(시온)를 인해 하나님께 찬송합니다(1-3).
2. 시인은 교회의 세계성(世界性)과 거기 속한 자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말합니다(4-7).
1. 본문 4절은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입니다.
“라합”의 이름은 성경 말씀의 여러 곳에서 애굽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이 구절에서도 아주 잘 부합됩니다.
이 말로 나타내려는 것은 그때까지 소망에 불과했던 교회의 광대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앞서 죽여 마땅할 원수요, 이방인으로 말했던 자들이 장차 친구가 될 뿐 아니라 한 몸에 접붙임 받아 예루살렘 시민으로 간주될 것을 말합니다.
상반절은 ‘내가 애굽과 바벨론을 내 집 가문에 있다 말하리라’이고, 하반절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과 수없이 다투어오던 블레셋과 두로와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이제는 마치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들처럼 그들과 진정한 화목을 이루리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멸시하는 자들까지도 사면에서 모여들고 교회를 완전히 갈라 파괴시켜 버리려던 자들이 교회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깨달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 얼마나 교회의 영광스러운 우월성을 보여주는가!
그들 모두가 전에는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기 나라를 자진해서 포기할 것입니다.
그들이 태어난 곳이 팔레스타인이나 에디오피아나 두로나 그 어느 곳이었든지 그들은 자기들이 거룩한 성의 시인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히브리 학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다른 나라에서는 정신적 재질이나 도덕적으로 뛰어난 자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자들이 매우 많이 일어날 것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두로, 애굽, 구스 사람이나 기타 사람들 가운데서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들 중에서 이러한 자들이 일어난다면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 명에 불과할 것이라는 게 히브리 학자들의 말입니다.
시편 87 편
그러나 ‘시온에서는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날 것이다’ 로 이해하여 유대인들 중에서는 그러한 자들이 많으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이방인이었고 피차 계속 원수로 지내오던 자들이 지금은 왜 예루살렘의 시민들로 여겨지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자들을 믿음으로 연합시켜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해주시는 사역을 가지고 게신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태어나셨으므로 각 지체들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학자들의 해석은 지나친 억지 해석으로 반박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야망에 따라 행동하던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기독교 학자들의 해석은 언뜻 보면 그 정교함이 그럴듯하지만 그 확실성이 부족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민족이 되었든지 기꺼이 자기 나라를 포기하는 자들은 택한 백성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질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도 거기서 났다” 는 말씀은 그들이 본래는 그 나라의 태생이 아니었으므로 날 때부터 그 나라에 속한 자는 아니었음에도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시리라”는 말씀은 ‘시온에 명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교회를 다스리실 때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 본문 5절은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입니다.
1) 앞 절에서 새로운 백성들이 세상 여러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교회로 모이게 될 것이라고 한 것과 똑같은 내용이 여기서도 취급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면서부터 이방인이던 사람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간주되어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과 똑같은 것처럼 여겨질 것을 말하는 또 하나의 비유가 사용됩니다.
앞에서는 갈대아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구스, 블레셋, 두로 사람들은 교회의 자녀들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 뒤에 지금은 분명하게 밝히기를 새 후손의 수효가 심히 많아서 얼마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성에 그 반수가 새로운 백성으로 채워져 큰 무리를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87 편
이사야는 약속된 내용을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54:1-3),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60:4)고 했습니다.
또 다른 곳(44:5)에도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났나니” 라는 말씀도 역시 애굽과 갈대아 사람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가 되어질 것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합니다.
시온이 본래 그들의 출생지가 아니었고 택함 받아 거룩한 백성들의 몸에 접붙임 받았다 해도 우리는 교회에 들어감으로 다시 나고 있기에 이 표현은 매우 적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신부로 맞아들이실 때, 조건은 그들이 자기 백성과 자기 조상들의 집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며(시45:10), 새 피조물이 되어 쇠하지 아니할 씨로 거듭남으로 교회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시작해야 합니다(갈4:19).
교회의 사역만이 우리가 거듭나 하늘나라 생명을 얻는 유일한 수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사도가 이 땅의 예루살렘 - 그 자체가 여자 노예로서 매인 자녀를 생산하기에 똑같은 노예상태에 있는 - 과 복음이 그 도구가 되기에 자유로운 자녀를 생산하는 하늘의 예루살렘 사이에 차이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반절에서는 시온의 견고하고 지속적인 특징이 묘사됩니다.
그 성이 특출하게 높은 지위로 오르는 것이 신속함에 비해 그 번영은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번영은 이처럼 썩어지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닌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다른 성들이 흔들리고 변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이유는 다른 성들은 변화하면서 세상을 맴돌고 한 보호자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진 새 예루살렘은 천지가 멸망할지라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한 것은 매우 반대적인 현상이 되겠습니다.
시편 87 편
3. 본문 6절은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온 열성을 다해 시온의 백성 가운데 들어가기를 바라게 될 정도로 시온이 명성을 떨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최고의 영광을 베풀어 주시기로 하신 자기 백성들의 인구 조사를 하실 때 그들을 시온에 속한 사람들로 등록하시고 바벨론이나 다른 어떤 성에 속한 자들로 기록하시지 않는다는 말씀 속에는 크게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온에서 한 사람의 평민으로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이방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높아져서 그토록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단과 죄악의 노예가 된 자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하늘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결단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하신 사역으로 자신이 기쁘게 여기는 자들을 본질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모든 자들과 구별하시어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십니다.
이 구절은 유효적 소명(有效的 召命) 에 대해 말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창세 전에 벌써 자기 자녀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령으로 중생하여 양자가 됨으로서 하나님의 표적을 받을 때에라야 그들을 성도들의 목록 속에 등록하십니다.
4. 본문 7절은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입니다.
1) 이 구절에서 “근원” 이 어떤 사람들은 ‘소망’을, 다른 사람들은 ‘감정’을, 또 다른 사람들은 ‘생각’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으로 ‘보는 것’이라는 견해를 택합니다.
히브리어의 어근은 ‘눈(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인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나는 항상 네게 눈을 고정시켜 놓고 진지하게 바라보리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2) 이제 상반절의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실상 이 말씀은 단축형으로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는데 심히 큰 기쁨의 근거를 가지고 계속해서 시온에서 살아있는 음성뿐이 아니라 악기로도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87 편
그러므로 이것은 앞에서 시온의 영광스러운 회복에 관해서 말씀한 것의 확증입니다.
큰 기쁨과 여러 겹으로 이룬 화음이나 멜로디의 찬송은 시온에 임하게 될 복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심히 자유로우신 손으로 그의 교회 위에 내려 주신 모든 복들에 대한 의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찬송과 노래로 하나님의 은총들에 대한 기억을 증거하고 그것들에 대한 감사하는 지식을 갖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한 חוללים (홀렐렘)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음악소리에 맞춰 춤추는 자들’이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들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의 연주가 계속될 것이고, 성도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듣고 이에 화답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선지자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순전하신 사랑을 교회에 베푸사 모든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하나님의 열심과 보살피심을 자신의 예를 들어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열심은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137:5)라는 말씀에서도 사랑이 교회에 머물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흩어지게 했던 헛되고 막연한 것들에서 떠나 세상의 영광, 기쁨, 부귀,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적인 영광에서 만족을 누리며 오직 그 안에만 머물 때 입니다.
시88:1-5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이 시에는 시인이 매우 심각한 환난에 빠져 거의 절망할 정도에 이르렀을 때에 쏟아 놓았던 쓰라린 하소연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혹한 슬픔과 싸우며 깊은 사망의 어둠 속에 있을 때도 자신을 하나님께 불러내서 구원을 얻게 해 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믿음의 확고함을 선포합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 안놋에 맞춘 노래(고라 자손의 시 또는 에스라인의 교훈, 겸손케 하기 위해 지휘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 - 칼빈)” 입니다.
헤만은 솔로몬이 자기 지혜를 에단, 헤만, 갈골, 다르다와 비교하고 있는 성경(왕상4:31) 역사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 인물인 듯합니다.
그토록 지혜의 영으로 뛰어난 사람이 이 시의 저자였다는 것은 이상할 것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עלמחלת (알마할랏)을 ‘죄악에 대하여’ 로 번역하는데, 이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된 용법에 의하면 어떤 악기나 노래의 시작을 가리킨다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른 말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극심한 고통과 순수한 인내에 대한 실예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뛰어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헤만을 모질게 대하심으로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게 하는데 이것은 단지 자기 종들만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모든 백성들을 공통적으로 교훈하시려는 것을 목표로 삼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높임을 받았던, 곧 높은 지위에 올랐던 헤만의 믿음과 견고함뿐 아니라 그 죄악까지도 모든 교회에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토록 뛰어났던 하나님의 종이요, 남달리 성령의 두드러진 은혜를 받았던 자가 무거운 환난의 짐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죽은 자나 다름이 없다는 슬픈 탄식을 터뜨리는 것을 바라볼 때에는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난을 당할지라도 우리를 절망 속에 빠뜨릴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피곤, 근심, 슬픔, 비애로 쉽게 연약해지거나 두려움을 갖게 될 때마다 특별히 거룩한 선지자가 이 절망적인 암흑에서부터 밝은 소망의 빛으로 벗어나려는 최고의 능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88 편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헤만의 입을 통해서 모든 환난받는 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기도의 양식을 제공해 준다고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1-2절은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 사오니
(2)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입니다.
신자들은 ‘선지자는 단순하고 과장없이 자기가 당했던 슬픔의 막중한 고뇌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목적하는 것은 그 환난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자기를 넘어뜨리려 하는 환난에 연약해지지 않는다’ 는 사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자기 환난의 쓰라림 때문에 터져 나오는 하소연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이 가열되어 겸손히 하나님께 용서를 빌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평하고 비방하는 일이 없도록 간략한 서론으로 자신을 적절히 억제시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내 구원의 하나님” 이라고 부름으로서 자신에게 재갈을 물려 슬픔이 과도하게 나아가지 못하도록 억제시키고 절망과 맞서 그 문을 닫아버리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준비를 갖춥니다.
그들 자신의 부르짖음과 불행에 대해 말할 때 진지하게 영혼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린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르짖음”이라는 말을 적절히 사용하여 자기 기도의 간절성을 나타냅니다.
그는 “주야로” 계속 부르짖는다고 한 말 속에서도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의 앞에” 라는 말씀은 공연히 한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짓눌릴 때 탄식하는 것은 공통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괴로움을 쏟아놓지 못하고 대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비방하고 부당한 근엄만 부리는 분이라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헛되이 허공에 대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눈앞에 모셔놓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흔치 않은 미덕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본문 3-4절은 “(3)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 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입니다.
시편 88 편
이 말씀은 선지자가 과도한 자신의 슬픔을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또 자신의 계속적인 부르짖음이 영혼의 연약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마땅한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당했던 막중하게 누적된 슬픔은 그로 하여금 마땅히 이러한 탄식을 일으키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단 한가지의 환난만을 말하지 않고 자기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마음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던 환난의 연속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 생명이 음부에서 멀지 않음을 특별히 말합니다.
이 말씀은 다음 구절에서 그가 사실상 죽은 자와 같았다고 탄식하는 가운데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비록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숨은 쉬고 있었을지라도 수많은 죽음이 자신을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많은 무덤들이 순간적으로 자신을 삼킬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단순히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보다는 ‘그가 이겼다’ 또는 ‘그가 강했다’는 뜻을 가진 גבר (가바르)에서 온 גבר (게베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괴로움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도 넘어뜨리기에 충분할 만큼 매우 크고 압도적인 것이었음을 보다 강조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4. 본문 5절은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육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입니다.
1) 선지자는 보통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을 나타내려 합니다.
먼저 그가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인간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모든 일들에 어울리지 못해 세상에서 제거된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를 묘사한다고 보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특별하신 특권으로 죽음을 이기셨으므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이 문맥의 의미와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 세상 생명의 길을 끝마침으로 그의 마음이 모든 세상 염려에서 벗어나고 그의 괴로움이 모든 감정에서 사라지게 될 것을 말한다는 해석이 더 좋습니다.
다음으로는 자신을 ‘부상을 당한 자들과’ 비교함으로서 자기 형편이 환난으로 연약해져서 점점 사망에 내려가는 자보다도 더 못함을 탄식합니다.
우리는 처참한 죽음의 광경을 볼 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편 88 편
2)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또는 보호하심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라는 말씀은 적합지 못한 억지 해석임에 틀림없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미치지 못함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의도가 나빴던 악한 발람이라도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23:10)라고 부르짖기를 결단코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말하듯이 사람이 죽은 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성경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말할때 그 모습을 우리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상태로 말하는 경우와 같이 선지자는 사람들의 보편 견해에 따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미래 혹은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겨우 조금씩 더듬어 올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지자가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눈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 인해 사람 마음에서 일어나는 혼돈과 개념을 말한다고 봅니다.
주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도 슬픔이 자신을 짓누를 때 어리둥절하여 바보처럼 되어 지각없는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실한 종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는 산자와 죽은 자 모두를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마음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종종 슬픔으로 자기 마음이 가려져 하나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욥의 탄식을 깊이 살펴볼 때 우리는 성도들의 마음이 슬픔에 휩싸일 때에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를 즉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마음에 묻혀 있던 사실을 깊은 명상의 주제로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죽은 자도 주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의 괴로움에 대한 첫 발작으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깊이 생각지 못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서 믿음의 빛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곧이어 그 빛이 다시 비추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느 때에 시험을 받아 연약하게 될 경우에라도 결코 실망이나 낙심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특별히 매우 유익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시편 88 편
시88:6-9 주께서 나를
이 시편은 자초지종 그 저술자의 고난의 침상을 심각히 묘사합니다(3-9, 14-18).
이 시인은 주님의 진노(震怒)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1,2,13) 지혜요, 또 인내입니다.
욥은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 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라고 하였습니다(욥5:17).
1. 본문 6-7절은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1) 시인은 자신이 겪은 환난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명확히 깨닫습니다.
진실로 자기를 때리신 것이 주의 손이라는 것과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닫지 않고는 자기를 주께 신실하게 맡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주께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어떤 사람들은 7절 상반절을 ‘주의 노가 내게 접근하시니’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סמך (싸마크)는 때때로 이러한 의미를 취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으로 볼 때 이 말씀은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누르다’ 또는 ‘무겁게 누르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세겹으로 음부에 가라앉아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므로 단순히 ‘내게 접근하시니’ 라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말하는 것은 너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택한 번역은 특별히 본문의 전체 흐름에 잘 부합됩니다.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모든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라는 말로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무서운 홍수도 그의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 기도함을 막지 못했던 것을 볼 때 우리는 그의 본을 받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파선의 위험에서 하늘에 믿음의 닻을 내리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88 편
2. 본문 8절은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입니다.
그는 이제 모든 인간 도움이 사라진 것을 사람의 마음을 겸손케 하든지 아니면 강퍅하게 하사 잔인하게 하는 권능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로 돌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도움을 빼앗긴 것이 하나님이 그의 손을 거두신 데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고는 자신이 끝없는 소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사람들이 정당한 요구로 의무 수행을 강요하면서 그 자신은 우리를 속일 때 인간의 배은망덕함과 잔인함을 불평합니다.
그러나 마치 그가 기쁘게 여기실 때는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펼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쾌히 여기실 때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도움의 방편들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지 않고는 이런 요구도 우리들에게 아무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계속 자기를 괴롭게 하는 슬픈요소들을 친구들이 ‘자기를 증오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환난에서 피할 길이 전혀 없음을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3. 본문 9절은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입니다.
시인은 자기 마음이 쇠같지 않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자신의 환난이 매우 중하고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의 흔적이 얼굴과 눈에 나타난 것으로 말합니다.
고통은 그가 처해 있던 비참한 처지를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기가 마음 속에 은밀히 불평하는 많은 사람들, 곧 격언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송곳 끝에 몸을 비벼대면서 그의 위로를 얻으려 하지 않는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음을 증거합니다.
그는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라고 말함으로 몸짓으로 어떤 의미를 나타냅니다.
시편 88 편
시88:10-13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이 시인은 사람이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에서 몸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동안 뿐 인 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서 더 살기를 원하였습니다(10-12).
그가 세상에서 더 살기 원한 목적은 주를 찬송하며 영화롭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는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는데 만 있는 줄 바로 알았습니다.
1. 본문 10-12절은 “(10)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구하시기 위해 서두르지 않으시면 너무 늦어서 자신과 죽음 사이를 거의 분별할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시려는 의도가 있으시다면 지금이야말로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 아슬아슬한 시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지연시키사 죽음이 임한 이후에 죽은 자를 이적적인 방법으로 일으키시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는 최후에 모든 이적들을 능가해 일어날 부활을 의문형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나가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는 시기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하신 때에 우리가 실제로 당하는 극심한 위험을 막아주시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성도들의 견고함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항상 육체의 죄악이 약간씩 섞여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으로 그들의 미덕 속에까지 오염되어 있는 죄악을 담당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인이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라고 물은 것은 죽은 자들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앞서 말한 것, 즉 그들이 위험 속에서 아직 부르짖고 있을 때 구원해 주시는 것이 그들이 죽은 다음 그들의 무덤에서 일으키는 것보다 그 구원의 시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과 똑같은 감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시편 88 편
그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을 그들의 무덤에서 일으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증언이나 선포자로 삼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흔히 사용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긍휼하심’ 에다 그의 ‘진실’, ‘성실하심’을 추가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구원하실 때는 약속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을 확증해 주십니다.
선지자는 그 약속이 하나님의 순전하신 인자하심에서만 나온다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능력, 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잊음의 땅에서 알게 하시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치 사람이 죽음으로 멸절상태에 들어간다는 잘못된 견해를 지지해 주는 말씀인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선지자는 일상적인 표현 방식으로 이 세상을 자신의 인자하심으로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무대로 삼고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 도움이 임한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2. 본문 13절은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입니다.
선지자의 말에는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는 무절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보기 드문 믿음과 경건의 인내에 대한 증거로 그는 결단코 기도 중에 진실함을 잃지 않습니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는 이 말씀으로 마지못해 자신이 마지못해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천천히, 냉담한 기도로 시간을 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는 오래도록 계속되는 환난에 대한 자신의 번민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태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적절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끊임없이 드림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당분간 응답되지 않을 때 실망하지 않게 하는 본보기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입니다.
시편 88 편
시88:14-18 여호와여 어찌하여
시인은 그 받는 고난이 심함(3-8)에 대하여 재설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재촉합니다.
1. 본문 14-18절은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 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 망하였나이다(내가 고통을 당하며 내 젊은 시절부터 죽음이 임박하였고 주의 공포를 의심하면서 견디었나이다 - 칼빈)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
(18)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 암에 두셨나이다” 입니다.
1) 이 탄식은 언뜻 보기에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하고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탄식 속에는 무언(無言)의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시인은 교만히 하나님과 변론한 게 아니라 환난에서 건짐 받기를 비통히 구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탄식은 바울이 말한 “말할 수 없는 탄식”(롬8:26) 과 같습니다.
만약 선지자가 하나님께 배척을 당해 미움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히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여기서 자기가 그토록 격렬하고 고결하게 투쟁했던 육적인 판단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육적 판단이 결국 그가 결코 헛되게 기도하지 않았다는 결과로서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가 감사로 끝나지 않고 슬픈 탄식으로 끝을 맺어 마치 긍휼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을지라도 이 시는 우리가 계속하여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보다 유익한 교훈을 줍니다.
선지자는 이 탄식의 짐을 하나님의 품에 풀어놓음으로서 감각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표적도 볼 수 없는 구원에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시의 서두에서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에게서부터의 모든 구원 소망에서 멀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시편 88 편
2) 선지자가 15절에서 왜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라고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로 극심한 취급을 당하고 있어서 그의 생명이 사실상 여러 가지 공포와 떨림 가운데 엉켜 있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16절에서 말한 “주의 진노와 두려움”이라는 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적지 않은 동안 계속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17절에서 이것들이 ‘날마다’ 자기를 에워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는 자기의 환난을 ‘홍수’ 에다 적절히 비교합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의심’(칼빈)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느낌이 자기의 마음을 뒤흔들어 쓰라린 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동이 어떻게 믿음과 조화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의심과 혼란을 일으켜 이리저리 방황하게 될 때에는 믿음이 삼키움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소란으로 동요되는 중에도 믿음은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며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질식할 지점에 이른다 할지라도 기필코 보호와 일깨움을 받습니다.
아무리 맹렬한 폭풍우가 와도 하나님은 계속 믿음을 갖게 하시어 자기 자녀들이 결코 실망하거나 버림받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사실, 이것이 성도들의 방패입니다.
성경 말씀의 전체 핵심은 하나님은 믿음의 “방패” 뿐 아니라 “지극히 큰 상급”으로 말씀합니다(창1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