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42】 11
28, 송경심통실상(誦經深通實相)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일체 법의 실상을 깊이 통달하는 것이다.
▶강설 ; 만 가지 선행은 모두 다 중도에 돌아간다[萬善同歸中道頌]는 42게송으로 불법수행의 여러 방면을 낱낱이 열거하여 모든 수행이 반드시 중도적 관점에서 실천되기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부처님의 법이 온전히 담겨있는 경전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무엇을 성취하기 위함인가를 분명하게 밝힌 부분이다. 심통실상(深通實相), 즉 일체 존재의 진실한 모습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깊이 통달하는 것이 곧 경전을 공부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을 공부하는 모든 화엄행자들은 부디 사람과 일체 존재의 실상을 깊이 통달하기를 바란다.
29, 산화현제무착(散華顯諸無着)
부처님 앞에 꽃을 올리는 것은 집착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강설 ; 불교에는 일찍부터 부처님께 꽃을 올리는 사례가 있어 왔다. 세존의 전생담(前生譚) 구리선녀와 선혜(善慧)비구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 앞에 꽃을 올리는 일은 아름다운 공양이며 수행의 하나로 여겨오고 있다. 그런데 흩는 꽃이나 꽂아서 올리는 꽃이나 모두가 꽃에서는 집착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30, 탄지이표거진(彈指以表去塵)
손가락을 퉁기는 것은 먼지 같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표현한다.
▶강설 ; 사찰에서나 일반 사회에서나 탄지(彈指), 즉 손가락을 퉁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서로를 알리어 놓고 있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혼침과 망상[塵]을 제거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정신을 놓고 있지만 앞에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가 않다. 정신을 초롱초롱하게 갖게 된다. 설사 혼자 있더라도 언제나 이와 같이 정신을 놓지 말고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탄지는 죽비와 목탁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31, 시위곡향도문(施爲谷響度門)
골짜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은 바라밀을 베풀라.
▶강설 ; 보살이 중생들을 위하여 펼치는 온갖 선근회향들을 바라밀행이라 한다. 석가세존으로부터 역대 많고 많은 보살들과 선지식들이 만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노동을 제공하고 온갖 물질을 베풀고 하는 일들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큰 혜택을 베풀었다. 물론 앞으로도 보살은 세상을 향해 그렇게 하면서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그 훌륭한 좋은 일들은 모두가 골짜기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임을 알고 그와 같은 바라밀행을 베풀어야 한다. 메아리는 직접적인 소리도 아니다. 사람이 내는 소리의 또 다른 울림일 뿐이다.
32, 수습공화만행(修習空華萬行)
허공의 꽃과 같은 만행(萬行)을 닦으라.
▶강설 ; 만행에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위시하여 10바라밀과 10선과 사섭법과 사무량심과 인의예지와 온갖 8만 4천 선행이 모두 만행(萬行)이다.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닦고 익히는 일은 모두가 만행이다. 그런데 그 만행은 눈에 병이 났을 때 환영처럼 보이는 허공의 헛꽃과 같은 것으로 알고 닦아야 한다. 만약 보시를 하고 계행을 지니고 인욕을 닦고, 정진을 하고 선정을 닦았다고 하여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바른 안목이 아니다.
33, 심입연생성해(深入緣生性海)
인연으로 생멸하는 본성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라.
▶강설 ; 대승불교가 깨달은 법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만물의 자성이 있고, 그 자성이 인연을 만나면 천변만화로 변화하면서 생멸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물질이 그렇고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마치 바다의 물이 바람을 만나면 온갖 파도라는 변화를 일으키지만 그 물의 본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본성과 현상의 관계는 이처럼 무엇이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존재의 법칙에 깊이 들어가서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불교의 한 가지 가르침이다.
34, 상유여환법문(常遊如幻法門)
환영과 같은 법문에서 항상 노닐라.
▶강설 ; 법문이 만약 환영과 같다면 그곳에서 노닐 까닭이 없다. 그러나 법문이 환영과 같은 줄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는 그곳에서 항상 노니는 것이 진정으로 법문의 실상을 아는 일이다. 만약 법문이 환영과 같다고만 알고 법문 속에서 노닐지 않는다면 그것은 편협한 세속적 견해이며 치우치고 잘못된 소견이다.
35, 서단무렴진로(誓斷無染塵勞)
본래 오염이 없는 번뇌[塵勞]를 맹서코 끊어라.
▶강설 ; 번뇌에 오염이 없다면 굳이 끊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약 번뇌에 오염이 있다면 실은 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본래 오염이 없으므로 끊을 수도 있으며 그래서 맹서코 끊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염이 없는 번뇌를 맹서코 끊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번뇌에 대한 중도적 안목이다. 번뇌를 이와 같이 아는 것은 바른 견해이고, 이와 달리 아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36, 원생유심정토(願生惟心淨土)
마음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라.
▶강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정토(淨土)든 예토(穢土)든 모든 것은 오직 그 사람의 마음의 영역 안에서 이뤄진 현상이다. 만선동귀중도송의 저자인 영명연수선사는 법안종(法眼宗)의 종조이면서 염불종을 창시한 개조(開祖)이다. 평소에도 염불수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모든 사람이 정토에 태어나기를 권장하였다. 그런데 그 정토가 바로 유심정토인 것이다. 만약 정토가 내 마음 안에 있다면 이미 나의 정토인지라 굳이 가서 태어날 것을 서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모순 같지만 내 마음 안에 있는 정토에 태어나기를 서원하여 열심히 염불하는 것이 바른 견해를 가진 염불수행자이다.
37, 이천실제이지(履踐實際理地)
실제의 진리의 땅[實際理地]을 밟아라.
▶강설 ; 진리란 이 우주에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굳이 진리를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 만약 어느 한 장소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굳이 진리의 땅을 찾아가서 밟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과 한 순간도 떠나있지 않은 진리의 땅을 반드시 밟도록 정진하여야 한다. 이 또한 모순 같지만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38, 출입무득관문(出入無得觀門)
얻음이 없는 지관(止觀)의 문으로 출입하라.
▶강설 ; 초기의 불교수행은 사마타와 비발사나[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뿐이었다. 불교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수행법이 발달하여 왔으나 이 지관수행은 천태종의 지관법과 함께 특히 남방불교에서 지금까지 많이 행하여지고 있는 수행법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수행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을 통해서 무엇인가 큰 소득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설사 소득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얻음이 없는 수행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행을 하더라도 얻음이 없는 수행의 문에 출입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얻을 것도 없는 수행을 왜 하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삿된 견해이지 중도의 바른 견해는 아니다.
39, 항복경상마군(降伏鏡像魔軍)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을 항복 받아라.
▶강설 ; 세존의 일생을 팔상성도(八相成道)라 하여 여덟 가지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정각을 이루신 장면을 정각을 이뤘다고 표현하지 않고 수하항마(樹下降魔)라 하여 보리수나무 밑에서 마군을 항복 받은 것을 정각을 대신하여 보여준다. 그와 같이 수행에는 마군을 항복 받는 것이 곧 깨달음으로 대신한다. 그런데 그 마군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이 보라는 뜻이다. 만약 그토록 항복 받기 어려운 마군이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아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굳이 항복 받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 마군을 항복 받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알고 항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동안 실재하지도 않는 그림자를 보고 싸움을 하느라고 피투성이가 되었던 것이다. 있지도 않는 마군을 항복 받으려고 얼마나 많은 밤을 지세며 싸움을 벌였던가. 세존도 그리고 그 많은 수행자들도 그림자를 쫓아가는 헛수고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