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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 칠보장 , 노용숙
1, ‘ 파란 · 칠보 ’ 기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파란 · 칠보 란 금 · 은 · 구리 · 점토 · 유리 등의 바탕 재료에 다채로운 유약을 덧씌워 구워 내어 디자인에 필요한 색상을 연출하는 독특한 표현 기법 중의 하나이다. 파란 · 칠보작업으로 바탕재료에 올려 진 유약이 약 500∼900℃의 온도로 구워지면 본래의 바탕 재료로 사용된 재료의 성질이 보완되므로 금속은 공기 중에서 쉽게 색상이 변하거나 부식되는 것을 방지하고 점토의 경우 물을 쉽게 빨아들이는 점을 막아 주면서 장식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인데, 여러 번에 걸쳐 반복 작업하여 완성할 수 있으므로 장신구에서 장식 용품, 크게는 벽화 작업에 이르기까지 예술 작업을 광범위하게 전개할 수 있는 색상표현을 위한 기법 중의 하나이다.
2. 파란 · 칠보 유약의 특성 ;
파란 · 칠보 유약의 주요 구성 성분은 지구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석영으로 1,700℃의 매우 높은 온도에서만 녹기 때문에 더 쉽게 녹는 물질들(용제, fluxes)을 첨가한다. 석영에 포함된 용제의 비율과 그 특유의 성질에 의해서 유리질의 모양, 화학적·물리적 성질과 안정성이 결정되는데, 순수한 석영·유리일수록 부식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고, 용제가 많이 섞여 낮은 온도에서 녹을 수 있는 유리의 경우는 부식에 약하다.
또한 일반 유리는 가열하고 나서 식히게 되면 금속 표면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칠보 유약을 만들 때에는 금속 표면에 잘 붙어 있을 수 있도록 용해성과 부착력을 높여 주는 금속 산화물을 넣는다.
파란 · 칠보유약은 같은 색상의 유약이라 하더라도 구워 내는 과정이나 바탕 재료의 종류에 따라 색상이 다르게 나타나므로 그 재료의 열팽창률 , 수축률, 녹는 온도 등의 특성을 잘 활용하면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다.
또한 파란 · 칠보 예술의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가 유약을 다채롭게 입혀 조화시키는 것이므로, 색채의 오묘함과 찬란함을 연출하는 색채 구사의 창작성이 요구되기도한다.
동칠보 불투명유약으로 10색상환 제작 ( 먼셀의 색채 시스템을 토대로 3개국 유약으로 제작, 아름다운 빛깔구이 칠보예술연구소 작업 )
주 ) 파란 · 칠보란 무엇인가?
파란 · 칠보 ( 七寶, enamelling) 를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는 ‘파란’, ‘파랑’이라 불렀으며, 중국에서는 ‘페르시아요(大食窯)’, ‘화랑(琺瑯)’이라 불렀다. 비잔틴(Byzantine)이나 아라비아 등의 수입 지명에 따라 ‘궤이궈요(鬼國窯)’, ‘훠랑칸(佛郞嵌)’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경태년(景泰年)의 연호를 따라서 ‘징타이란(景泰藍)’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595∼1615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부터 칠보를 배울 당시 부터 일본에서는 시포 야키(七寶燒)라고 하여 ‘칠보 굽는 작업’이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했던 자료가 확인 되었으며 이 명칭이 한국에서 칠보(七寶)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방자여사의 환국이후이다. 영어로는 ‘에나멜링 (enamelling : 프랑스어의 email가 영어로 enamel이 되었다)’, 독일어로는 ‘에마일리에렌(Email-lieren)’, 공통 학술 용어로는 프랑스어인 ‘클루아조네 (cloison-ne)’로 불린다.
3. 파란으로 시작된 칠보기법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파란은 삼국 시대의 금으로 만든 장신구에서 볼 수 있으며, 처음에는 파랑 한 가지 색이었던 것이 조선 시대에 이르러 색상이 황색(黃色, 짙은 노랑) · 감색(紺色) · 파랑과 녹색의 중간색인 벽색(碧色) · 보라색 계열의 가지색(자색, 紫色)의 네 가지로 발전하였다. 은이나 금으로 된 장신구나 소형의 은 기물 등에 주로 사용되기 시작된 파란은 계속해서 한국의 전통의상과 조화를 이루며 전래되고 있다.
이후 다양한 색상 표현을 위한 연구, 개발에 의해 갖가지 색상의 유약이 제작, 판매 되고 있고 그에 맞추어 유약이 구워지는 데 필요한 온도인 850℃정도의 열에서 견딜 수 있는 바탕 재료 또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어서 칠보기법으로서의 예술적 표현 영역은 넓어지게 되었다.
칠보유약을 올려서 구워낼 수 있는 바탕 재료로는 금속·유리·점토 등을 사용하는데, 이들 재료에 어떠한 조형을 가하더라도 열팽창 계수 관리, 유약 관리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내구성이 있는 아름다운 조형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므로 칠보 기법은 장신구에서부터 실내 용품, 실외 조형물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 넓은 분야에서 그 아름다운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약을 올린 조형물을 넣어 구워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칠보 가마는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초보자가 사용하는 정도의 일반적인 가마는 전력 소모도 적고 작은 공간에서도 환기시설이 있고 작업대 정도를 갖춘다면 별다른 부담 없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다.
현대의 공예가들이 금속으로 작업한 갖가지 공예품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소재가 사용되었으나 작가들의 미적 감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금속만으로는 질감과 색상 표현의 한계를 넘고자 칠보 유약을 폭넓게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장신구의 제작에는 보석을 주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형태와 색상을 표현하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었으나, 아르 누보 시대에 이르러 작품의 색상이나 다양한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하여 각종 칠보 기법이 시도되고 일반화 되었다.
* 노용숙, 신비로운 파란에 눈길이 가다 ;
노용숙은 1963년 진명여중에 입학하여 당시 연례행사로 경복궁에서 개최되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전 )을 관람하거나 인사동, 박물관에서 보게 된 아름다운 물건들의 신비로운 색상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후 고교재학시절 학교 예술제 작품 준비로 동양화를 그릴 한지 배접을 의뢰하고 찾기 위하여 인사동에 가게 되고 골동품가게에서 예쁜 장신구로 보이는 물건에 눈길이 갔지만 때가 끼고 검은 (은의 유화로 변색)물체에 예쁜 색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군데군데 깨진 것 같은 물건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었고 누구에겐가 물어볼 줄도 모르는 여고생 시절이었다.
수년 후 대학에 진학하여 생활미술학과 학생으로서 박물관에 드나들며 지적 갈급함으로 인하여 수소문 하는 가운데 그것이 ‘파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검게 변한 은이 그 바탕금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인사동에 문을 연 ‘도라장 ( 칠보공예가 김기련 공방 겸 전시장)’의 전시회 덕분이었다.
이후 미술교사로 봉직하면서 이방자 여사가 환국하여 이끌게 된 낙선재 칠보작업장과 명휘원 등의 기관에서 바자회를 개최할 때 칠보물품을 자주 보게 되었다. 또한 덕수궁 석조전 등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칠보작품과 국전에서 만나게 되는 김지희, 김기련 선생님의 칠보대작에 주목하였다
이후 노용숙은 전통적으로 공방에서 대물림해 내려오고 있는 장신구류 등의 ‘ 파란 ’ 재현작업과 전통문양을 도입하여 다양하게 제작한 본인 창작 장신구작업, 전통가구의 멋을 이어갈 수 있도록 문양과 칠보 작업을 조화시킨 사주함, 삼층장, 기타 실내용품으로서의 쓰임새를 현대인의 식생활과 주생활 속에서 아우러지도록 연구한 동필보 생활용품, 각종 문양과 은칠보의 아름다움을 가미한 은기(銀器) 등을 작업 하면서 가장 한국적이기에 조촐하고도 단아한 우리‘파란’의 멋을 심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노용숙은 전통적으로 공방에서 대물림해 내려오고 있는 장신구류 등의 ‘ 파란 ’ 재현작업과 전통문양을 도입하여 다양하게 제작한 본인 창작 장신구작업, 전통가구의 멋을 이어갈 수 있도록 문양과 칠보 작업을 조화시킨 사주함, 삼층장, 기타 실내용품으로서의 쓰임새를 현대인의 식생활과 주생활 속에서 아우러지도록 연구한 동필보 생활용품, 각종 문양과 은칠보의 아름다움을 가미한 은기(銀器) 등을 작업 하면서 가장 한국적이기에 조촐하고도 단아한 우리‘파란’의 멋을 심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단절 가능성이 농후하던 기법을 생활 속의 공예품에서 진정한 공예품을 통하여 되살려 내려고 노력해 오다가 2000년 ‘ 아름다운 빛깔구이 칠보예술, 미진사 간행,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 을 계기로 대한민국 금속공예계에 칠보창작이 융성하게 되고 한국전통공예학교와 숙대 , 강원대들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제는 발전을 거듭해 온 한국의 칠보예술세계를 노용숙의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빛깔구이 칠보예술을 작품집 제작을 통하여 정리하고 더욱 발전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칠보예술은 어떠한 것인가 ? ‘파란’은 서역을 의미하는 말로 실크로드를 통해서 ‘파란(스펠링)’ ‘화랑(琺瑯)’으로 전해진 엿가락처럼 생긴 유약을 빻아 올려서 구우면 색깔이 파란 색으로 되는 것 한 가지가 먼저 전해졌으므로 우리말 ‘파란’으로 일반화 되었던 것으로 삼국 시대의 금으로 만든 장신구에서 처음 볼 수 있다. 파란을 올릴 경우에는 작업할 부분을 정으로 조이질 해 놓거나 문양의 외곽선을 양각(은선 땜질)이나 음각으로 만들어 놓고 그 칸 사이사이를 유약으로 채워서 바탕재료에 유약이 잘 녹아 붙을 수 있고 보존 가능 하도록 하는 작업을 먼저 하는데 이러한 작업상의 특성 때문에 파란 작업만의 독특한 디자인이 형성되었다. 또한 은으로 만든 장신구를 더 아름답고 값지게 보이게 하려고 금도금을 해서 마무리 하거나 금박을 나중에 붙이는 금부 기법을 활용하기도 하였지만 금에다 칠보를 하는 예는 드물었다. 금이 귀한 재료이기도 했지만, 하얗고 깨끗한 은에 색깔을 조화시키는 멋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일본의 《금공보략(金工譜略)》의 지은이 구리하라(栗原信充)의 기록에 보면,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은 조선으로부터 온 것 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선조들이 일본인들에게 전해 준 문화와 기술은 여러 분야에 많이 있었다. 파란의 제작 기술도 우리 선조들이 일본인들에게 가르쳤는데, 1595∼1615년에 일본 교토에 거주하던 금속 공예가 히라다(平田)가 조선인으로부터 열심히 칠보 기법을 배워 에도 시대의 칠보사(七寶師)가 되었다는 기록을 본인이 확인하게 된 것은 자료 조사차 1995년 일본에 갔을 때 였다. 이 때 입수하게 된 ‘ 七寶文化史 ’(森秀人 , 日本 近藤出版社 , 1982) 를 통해 우리의 칠보 기법은 일찍이 일본에 제작 기술을 전해 줄 정도로 발전되었으며 당시부터 일본에서는 시포 야키(七寶燒)라고 하여 ‘칠보 굽는 작업’이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파란을 구워 내는 방법도 1970년 이전에는 구할 수 있었던 유약을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고 500℃ 정도의 온도에서 구워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여러 가지 도구를 활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에 한 가지 방법은 공기가 통할 수 있는 공간을 두고 두꺼운 철판을 깔아 백탄 ( 숯 )을 태워 열이 일정 시간 유지될 수 있는 상태에서 구워내는 방법과 작은 장신구에 파란유약을 올리고 간단히 불대를 이용하여 손풍구질을 해 가며 기물의 뒷면에 불질을 하여 구워 내었던 우리 선조들의 칠보 작업은 작업자마다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공법은 색상에 따라 구워지는 온도가 다른 유약을 사용하는데 아름다운 발색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유약의 색상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그에 따라 칠보 유약을 녹이는 온도가 800℃ 이상 필요하게 되면서 시설도 보완되어, 최근에는 전기 열선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구워지는 정도를 밖에서 관찰하면서 깨끗하게 작업하고 일정한 온도에서 반복 작업할 수 있는 칠보 전용 가마가 일반적으로 쓰인다. 생활 문화의 변천과 함께 은이나 동 등으로 두께가 있는 물건들을 생산하게 되면서 칠보 기법은 장신구에 장식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상을 효과 있게 연출하여 사용할 수 있는 예술 작업과 함께 대량생산이 가능한 산업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표면도장 색료(色料)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옛 것을 그대로 재현하여 ‘파란’ 유약으로 조화시키는 작업이 전통공방 체제와 함께 5, 6 종의 유약을 조화시켜 약 700도 내외의 온도에서 구워내는 기법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수련을 위한 칠보 기법과 우리나라의 전통 문양에 관하여 연구하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의 연구와 재창조 작업, 재현 작업이 존속되는 상황이다 .
오늘날 칠보의 제작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본인에게는 더욱더 보배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이 시대를 풍미하는 칠보작업을 해야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우리 조상들이 풍격이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다각도로 발전시켜 세계 칠보를 선도해야겠다는 각오를 마음에 품고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시각적 아름다움과 견고한 외형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보다 폭 넓은 칠보 작업에 관한 연구에 임하고 있다.
노용숙의 아름다운 빛깔구이 칠보예술 연구는 크게 세 가지의 연구 과제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첫째는 우리 선조들이 이루어낸 ‘파란’의 독보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탐구이다. 1965년 고교시절부터 미술활동을 시작하고 고궁에서 그림그리기 · 전시장 방문하기 · 박물관 관람 및 서적 구입탐독, 인사동 등 골동품 진열대 둘러보기, 1968년부터 대학생활 중에는 도라장 ( 칠보공예가 김기련의 공방을 겸한 전시장으로 독일에서 칠보기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한국의 전통미와 연계연구 다수 발표) 작품관람과 견학, 1973년부터 1986년 고교미술교사로 봉직 중에는 이방자여사가 이끌어 나가는 칠보작업장의 ( 칠궁에서 시작되어 창덕궁으로 이어졌다 ) 생산품에 관련해서 ‘명휘원’의 박애사업을 위한 판매품 전시관람 및 구입과 함께 1983년 창립된 칠보작가회의 전시관람, 창덕궁 칠보공방 강사 김 수복 선생과의 교류 등을 통하여 하나하나 관찰하고 자료조사에 힘쓰면서 ‘마음으로 찍고, 눈으로 찍고, 그 다음으로는 마음에 간직한 우리선조들의 유품이나 재현 작 등을 하나하나 그려나가면서 제작 준비에 힘쓰게 되었다. 또한 고교미술교사로서 제자를 양성 ( 고송님, 김재량, 박애자 외 )하고 한국의 전통미술에 관한 교육에 주력하면서 함께 칠보기법을 연마하였다. 공방 설립 후 다품종 소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당시 반도호텔 지하상가의 명품 샾 ( 토파즈, 운영자 이 메리여사 ) 에 납품하고 판매하는 작업을 6년여 지속하였다. 이때에 제작한 은 칠보 생활 용품이나 동 칠보 제품들은 각기 독립한 수련생들의 작업공방을 통하여 아직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후 13년간의 중고등학교미술교사로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1986년부터는 ‘전문가’가 되고자하는 일념으로 파란의 재현과 칠보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그 원형이 공방에서 대 물림 되고 있는 것을 수소문 하고, 그 원형을 지켜 온 분들의 손길로 제작 된 바탕에 파란의 전승 ( 노용숙 재현작 목록 및 자료 별첨 )을 위하여 유약을 올려 구워 보면서 그 멋의 진가를 체득해 나가는 과정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수련의 기틀로 삼으며 제작에 전념하면서 ‘서울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 진흥사업’ 기금을 수혜, 1999년부터 현재까지 본인이 재현한 파란 유물은 약 100여 점에 이른다
이러한 연구 과정을 고수하게 된 이유는 자학자습할 수밖에 없었던 학습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도제 교육을 통하여 스승의 그림자를 좇아 갈 수 있는 다른 분야에 비해서 ‘파란’은 대를 이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을 직접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박물관의 유물이 노용숙의 스승이었으며 각종 전시회를 감상하면서 미적 감각과 판단력이 생길 수 있었다고 회고해 본다. 또한 미국문화원 도서실이나 불란서문화원, 일본문화원 등에서 접할 수 있었던 각종 문화의 소산물들을 즐겨 감상하면서 우리의 것과 비교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가까이에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 이었다.
또한 전통공예에 관한 탐구력을 마음껏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생활자체가 오늘날의 공예인과 같은 삶을 살며 필요한 것을 손수 만들며 ( 옷과 보자기 만들기, 천연염색의 생활화, 민화 구입 및 생활화, 약주 만들기 , 유기그릇 관리 등 )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셨던 어머니로 부터의 교육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되기에 노용숙은 어머니(최 어진, 崔 於 辰 )를 첫 번째 스승으로 마음에 모시고 마음껏 연구에 매진 할 수 있었다. 각종 민예품 속에서 생활하는 것과 더불어 어머니에게서 다양한 평가와 자문을 받을 수 있었던 노용숙의 삶은 1950년부터 2000년까지 50년의 수련기간을 통하여 공예인으로서의 기초가 놓이는 과정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장신구는 단순하게 몸치장을 위한 도구라고 볼 수 없는 것이 그 하나하나에 담긴 섬세한 표정들은 당시의 생활 전반을 응축시킨 생활의 지혜와 여유로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신구 특성상 일반인들의 생활과 관련되기보다는 왕실이나 사대부 계층에서 많이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신구에서 그 당시 사회의 상류층 사람들이 지녔던 세련되고도 우아한 미의식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장신구는 한 사람이 만들어 사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를 물리면서 사용하고 이어져 왔다. 따라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장신구들에는 그런 세월의 흐름이나 시간이 담겨 있으며, 나름대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지면서 생활 속에서 전해져 온 것이기에 호화로움이나 파격적인 대담함보다는 섬세함과 아기자기함이 두드러진 소박한 향을 간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노용숙의 인간됨과 많은 관련이 있다. 번쩍이는 작품보다는 땀내 나는 인고의 작업을 애써 해 온 노용숙은 조촐하게 살아온 인생길에서 만난 많은 선후배들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고 살아 왔기에 그들이 아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부분, 어느 하나라도 담당하고 싶은 마음으로 늘 살아오면서 금속작업도 삶의 자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품목을 택하여 매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재현과정 이후, 창작의 단계로 우리 선조들의 유물에서 찾아 낸 형태와 문양을 주제로 본인의 손길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재창작의 단계를 통하여 집념어린 노력의 결과물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각가지 공예품에서 감명 받았던 형태와 문양을 내 손으로 직접 그려 나가 창작에 임 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생활미술과 )에서 1968년부터 김덕겸 선생님 ( 문양서적, ‘ 김덕겸의 길상문양 ’ 외 발간 권)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요, 사회에서는 임영주 선생님 ( 저서 한국문양사 외 권)과의 협동작업을 통하여 1971년 당시 순흥어숙묘(順興於宿墓)에서 발굴된 벽화를 종이에 다시 실측된 모양대로 그리는 일에 공동작업을 하게 되어 이화대학 박물관 자료실에서 작업에 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숙대 사진반 선배이셨던 장양환님과 그 언니 장숙환 님( 후에 이대 박물관 에 유물 기증, 현 담인박물관장 ) 의 중학동 한옥에 가면 갖가지 생활용품들이 가득하여 중요한 볼거리였던 것이 나의 공예적 감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기억으로도 간직하고 있다. 그들 자매가 선친으로부터 대물림해온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고 사라져가는 많은 것들을 구입하던 시기였기에 많은 소장품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본인에게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장숙환선생께서 스물두번이나 가서 마음을 준 뒤에 구입해 온 대표적인 물건 <유선 칠보 비녀>는 어렵게 마음을 주면서 자신의 소유로 만든 대상이기에 소장 하게 된 후에는 그 물건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는 물론 그 이상을 읽어 낼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또한 마음을 주어 인연을 맺은 물건들이 공개될 경우, 그 의미를 읽어 준 소장자의 깊은 마음까지 담아 보여 지게 되므로 그 물건은 단순한 하나의 장신구가 아닌 그를 제작하고 사용했던 이들의 숨결까지도 이해시킬 수 있는 전통문화의 전령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장 선생님의 소장품들이 전시장이나 도록 등에서 다른 어떤 골동품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정성을 쏟고 마음을 주고 직접 구입한 것 외에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사용했던 것들도 포함하고 있기에, 그런 전통적인 장신구들을 경제적인 투자 가치를 가진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연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울올림픽개최기념으로 열린 전시회를 통하여 장숙환 소장품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 번 아주 깊이 매료 된 것이 나의 학습 방향을 올곧게 다듬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후에는 노용숙이 작업하는 전통공예관 공방에 찾아와주시고 원앙이 노리개를 사 가셨던 것이 고마운 기억으로 남는다.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선택하셨다면 감사할 일이고 노용숙이 걸어가는 길을 격려하시는 차원에서, 한국의 미를 함께 가꾸어 가는 차원에서 베풀어주신 것이라고 여겨져서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자부심도 함께 갖게 되었다. 이후 노용숙은 매화 · 난초· 국화 · 대나무 · 모란 · 연꽃 · 포도 · 구름 · 학 · 원앙 · 물고기 · 야생화 · 봉황 등을 주제로 문양을 만들어 다종다양한 공예품에 조화시켜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더한 것들로 아취를 드러내 보이는 예술품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해 왔다. 또한 그것들만의 독특한 미를 드러내는 동 칠보판이나 은 칠보가 부착된 목공예품과 은 칠보의 품위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금속공예품들은 일찍부터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아 미술품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실용품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기에 본인은 평소에 감명 받은 자연물 가운데 그 의미와 디자인의 멋을 이 시대에 맞는 멋으로 재창조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조화를 꾀하기에 주력하였다.
육군자 (六君子, 梅 · 蘭 · 菊 · 竹 · 牧丹 · 蓮 ) ,십장생 ( 十長生 ) , 천도 · 석류 · 당초 ( 唐草 ) 문양 등과 조화를 이루며 생활 속에 접목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그 결정체는 장신구함이나 삼층장에서 동칠보로 작업한 십장생과 육군자문의 어우러짐이 드러난다 . 한국문양대전에 초대 출품 후 작품집에 수록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 1995년 경복궁 전통공예관 개관전 및 도서 발간) 됨으로써 칠보문양과 조화를 이룬 목가구등이 한국인의 주생활과 조화를 이루어 나가게 함은 물론 장신구등 신변용품 들이 의생활에서 빛을 발하고 있고, 각종 은기물들이 식생활 등에 걸쳐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빛깔구이의 멋을 뿜어 나갈 수 있도록 대중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세 번째로는 창작 작업과 아울러 함께 진행 된 전통공예 전승을 위한 교육과 문화상품 개발 연구이다. 작품개발 차원에서 칠보작업을 진행하던 중 1988년부터 경복궁 전통공예관(관장, 임 영 주)에 전통공예학교가 설립되고 칠보강좌를 운영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교육기관의 명성에 걸맞게 전통적, 한국적인 이미지 구축 작업에 더욱 전념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전통공예기법에 관한 연구와 발굴, 전승에 힘쓰게 되었고 매년 이루어지는 전통공예학교 학생의 수료전시회를 개최할 때마다 학생들의 전통적인 작품제작을 지도하고 함께 전시한 바 있다.
1995 년부터 3년간은 경복궁 전통공예관에 12공방이 개설되고 칠보공방에서 제작 시연과 작품전시를 하게 된 관계로 대한민국의 관광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경복궁을 방문하게 되는 내외국민들에게 한국공예의 진수를 선보여야 하는 책무가 주어졌었다.
생각보다 식견이 높고 미적 감각이 우수한 방문객들과 불특정 다수의 (제작에 전념하는) 전문인들의 요구와 견해를 들어야 되는 위치에서 작품 상설전시와 판매는 매우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 한국의 칠보공예를 대표하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인하여 더욱 최선을 다하여 개발에 힘썼다. 당시 석주선 선생님 (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장 )께서 전시회 개막행사에 오셔서 칠보공방을 둘러보시며 ‘ 전통칠보 파란과 매듭실의 색상 ’ 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신 것, 김용숙 선생님 ( 본인 숙대 재학시절 교양국어 지도교수로서 한국고전에 담겨진 전통공예에 관한 강의에 귀 기울이게 하신 열강, 궁중문학 권위자 ) 의 궁궐여인들의 삶과 장신구 패용에 관한 말씀, 이태영 선생님 ( 한국최초 여성법조인, 한국가구애호가이며 후에 가구박물관으로 개관된 소장품 관리 및 준비를 위한 수집) 의 한국 전통가구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관한 말씀 등을 듣고 마음에 아로새기게 되었다.
당시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문화상품을 구매해 본 경험이 있을 관광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일품공예로서의 한계, 디자인, 가격, 크기 등 제반사항이 경쟁적 측면에서 첫 번째 거침돌이 되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노용숙은 오랫동안 작업 해 왔던 칠보기법에 다품종 소량 생산 방식을 도입하기 위하여 문양을 금형작업 (철형 조각)으로 눌름질 ( 프레스 공법 )하여 작업시간을 줄이고 정확한 문양, 형태를 지니면서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빛깔구이의 멋을 지닐 수 있도록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으로는 디자인의 특성상 필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과 반복, 대칭하여 조화시킬 수 있는 장식은 투태부식기법을 도입하여 동판에 문양을 만들어서 공동 작업이 가능 하도록 하여 다품종소량생산의 효율적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색상과 다양한 문양의 개성 있는 표현이 가능 해 질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함으로서 소비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오랜 연구 끝에 한국전통공예의 백미가 되는 목공예가구들과의 접목이 가능해 졌으므로 고난도의 아름다운 빛깔구이의 깊은 멋을 담느라고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였기에 한 단계 한 단계 진행해 가면서 물심양면 총력을 기우렸었다. 특히 투태부식기법은 한국전통가구가 대물림해온 좌우대칭형의 무늬반복에서 오는 아름다움의 특징과 잘 아우러지는 방법이기에 약 40 여 년 간 같은 기법으로 전통가구의 진미를 연출하기에 적절하게 활용되어 전통공예학교의 연수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주문생산품을 제작하는 ‘대물림공법’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문화상품’이라는 이름이 처음 도입되면서 ‘크기가 작고 저렴하여야 한다 ’ 는 선입견 때문에 오히려 공예문화상품의 발전이 저해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작은 물건을 쉽게 만들어 싸게 팔아야 한다는 생각 보다는 ‘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여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고 했던 중국 명나라 문인 동기창(董其昌)은 '소중현대(小中現大)' 라 했다 ) ’ 부가가치를 높임으로써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고, 한국에 대한 추억을 값지게 간직할 문화상품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이러한 작업을 20여년 함께 진행해온 제자들과 ‘아름다운 빛깔구이 칠보예술 연구회’ 를 결성하고 12명의 연구원 ( 2010년 1회전 / 인사동 대성업드림, 2011년 2회전 / 남산골 한옥마을 전통공예관, 2012년 3회전 / 인사동 한옥갤러리 예당 , 전시자료 별첨 )들과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199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칠보항( 七寶項) ’ 의 저술을 의뢰 받았을 당시에는 유물에 탐닉하고 열심히 작업을 하던 때로 한 꼭지에 불과한 글을 의뢰받은 것이었지만 많은 책임감이 앞섰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국의 칠보에 관하여 변변한 책 한 권 출판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당시까지 대학원 석사학위 인준을 위한 논문으로만 출간 되었던 유리지, 고승관, 최정자, 안귀숙, 오영민 선생님들의 논문을 열심히 읽고 확인해 가면서 직접 연구자들에게 질문하고 자료를 확보해 나갔으며 당시 생존해 있던 이방자여사의 비서와도 전화로 통화하여 일본으로부터 칠보기술을 도입하게 된 경위 등을 확인 하였다. 이방자여사는 한국으로의 환궁이후 전개 하고자 하는 ‘ 한국의 어린이들을 위한 박애사업 ’ 에 칠보교육을 통한 인맥확충 및 각종 수제품의 제작 및 판매를 통한 재정확보를 목적으로 일본의 작업장에서 세 달 동안 칠보기술을 습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예술계에 ‘ 한국칠보작가회 창립전 ’ 개최 (1983년)로 선 보였던 작품전시에 한일양국의 작가들이 참여한 것도 이채로웠으며 일본인으로서 한국인과 결혼한 작가를 영입하였던 점과 대학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던 금속공예과 교수 유리지를 영입하여 작가회를 결성하고 전문성을 높이는데 힘을 보탠 일도 당시로서는 그의 업적이라면 업적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