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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장코뱅 추천 3 조회 262 26.05.30 07:30 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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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37 새글

    첫댓글 즐거운 가정의 달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 11:04 새글

    네, 알겠습니다.

  • 작성자 07:41 새글

    <호크마 주석: 고린도 전서>

    =====6:9
    불의한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남색하는 자나 - 관사 없이 사용된 '아디코이'(' , '불의한 자')는 '악을 행하는 집단'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성', 곧 '악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대적 관계에 놓여진 자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교회공동체와 같은 또 하나의 집단적 공동체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행하는 악의 성질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동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악의 동지 의식에 의해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강한 대조를 이루는 세력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로부터 철저하게 배척 되었다. 본절에 기록된 다섯 가지의 악의 형태는 모두 불의한 자들에게 속한 것으로서 성적 타락과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수 있다. (1) '음란'(* ,포르네이아)은 모든 형태의 성적 타락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자세한내용은 5:1 주석을 참고하라. (2) '우상 숭배'는 당시 이방 신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 특히 성적 타락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이방 신전들은 성적 타락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 작성자 07:41 새글

    (3) '간음'은 특별히 결혼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성적 타락을 지칭한다. (4) '탐색'(* , 말라코스)은 원래 '유약한', '여자 같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이 단어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남자들과 더불어 음행하는 자들 중에서 수동적 위치에 있는 상대자를 뜻하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Barrett). 여기서 특별히 주색(酒色)에 빠진 것을 뜻하는 말로서 동성연애자들을 지칭하는 '남색하는 자'(* , 아르세노코이테스)와 같은 부류의 사람, 곧 자기의 몸을 동성연애자에게 내어 맡기는 부끄러운 악을 행하는 자들을 뜻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플라나스데'(' )는 갈 6:7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당시의 논쟁 가운데서 자주 사용되었다(15:33;눅 21:8;약 1:16). 이것은 '외부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보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유혹을 극복하라는 뜻이 더 강하다. 당시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만한 지혜로 도덕적 수준을 규정하였으며, 하나님은 거룩한 삶의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이러한

  • 작성자 07:42 새글

    것들이 악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6:10
    도적이나...하나님의 나라를...받지 못하리라 - 본절에 기록된 악들은 앞절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앞절의 행악은 주로 자기의 몸을 더럽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주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종류의 악들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이들 역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제외되었음을 강조한다.
    (1) 도적(* , 클레프타이) - 전문적인 강도라기 보다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2) 탐람하는 자(* , 플레오네크타이) - '자기 욕심에 의하여 이웃의 것을 탐하는자'를 의미한다.
    (3) 술 취하는 자(* , 메뒤소이) - '술로 인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자들'을 의미한다.
    (4) 후욕하는 자(* , 로이도로이) - '남을 비방하는 자'를 뜻한다.
    (5) 토색하는 자(* , 하르파게스) - 탐람하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완력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자'(extortioner)를 의미한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 만연하던 죄상(罪狀)을 지적하여 그들의 수치를 자각시키고

  • 작성자 07:42 새글

    성도 본연의 사랑과 순결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음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다.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바울은 고리도 교인들의 옛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 본절은 두 가지 의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있더니'(' , 에테)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1) 미완료 과거로서 지난 날을 회상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지난 날에 너희는 이방인과 같은 죄악에 빠져 있었으나'를 뜻한다. (2)미완료의 반복적 의미라면 그 뜻은 '지난 날에 너희가 죄악 가운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러한 죄악 가운데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후자는 '티네스'(* ,'너희 중에')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 가운데 있는 '몇 사람' 또는'일부'(개역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음)가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은 전체 문맥 속에서 의미를 재고해 볼 때 전자의 의미가 강한 것 같다. 바울은 지금 죄악들을 나열하며 지난날 고린도 교인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살 때의 죄악과 예수 안에서 얻게 된 새로운 삶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너희 중에 이러한 죄에 빠져

  • 작성자 07:42 새글

    있던 자들이 있었으나'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이는 그리스도의 모든 인격과 사역을 포함한다(Morris). 그리스도의 피는 성도들을 정결케 하였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성화(聖火)의 소망을 갖게 하였다. 특별히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영위하는 성화의 삶의 원동력임을 시사한다(롬 8 : 4, 14, 17).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이제는 더 이상 죄악 가운데 묻혀 있지 않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헬라어 원문은 접속사 '알라'(* , '그러나')를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을 뜻하는 세 동사 앞에 각각 하나씩 기록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 일어난 세 가지 사실을 열거한다. 먼저, '씻음'에 해당하는 동사 '아펠루사스데'(' )는 부정 과거중간태로서 죄로부터 씻음을 받은 것을 뜻한다(행 22:16;계 1:5). 보통 신약성경에서는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를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에밥티스데산'(* ,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을

  • 작성자 07:43 새글

    사용하여(행 19: 5) 그 의미를 전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아펠루사스데'가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함께 기록된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때문이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행 2:4;롬 6:3). 혹자는 '아펠루사스데' 를 중간태로 기록한 것은 세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세례는 세례받는 자의 선택과 고백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두 동사와 구분하였다고 한다('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은 모두 부정 과거 수동태로 기록 하고 있다, Bachmann).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보다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을 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Morris, Barrett). 그러므로 '아펠루사스데'는 중간태로 쓰였으나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는 수동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Lenski). 다음으로, '헤기아스데테'(' ,'거룩함')와 '에디카이오데테'(' ,'의롭다 하심')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들이 의롭게 된 것과 거룩하게 된 것은 이미

  • 작성자 07:44 새글

    과거의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主導的)인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본 구절에서 주의할 점은 바울이 세 동사를 사용하여 그들의 현재적 신분을 설명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의'의 개념 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Calvin). 즉, '죄 씻음'과 '거룩'과 '의'는 그들의 죄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들이 새로운 의의 삶을 지향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법정적 선언의 개념을 가진다.

  • 08:56 새글

    늘 풍성한 설명입니다. 초신자나 주석 없는 분들은 더욱 도움이 됩니다.

  • 작성자 08:24 새글

    <호크마 주석: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세상 근심 - 바울은 두 종류의 근심과 그 각각의 결과들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앞절 내용과 연결하여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근심을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하여 '신령한 근심'이라고 정의하였다(M. Henry). 이에 비해 '세상근심'은 분노하고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이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발전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근심에 대한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에서와 다윗이다(Hughes). 그 이후에도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히 12:16,17). 그러나 자기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 작성자 08:24 새글

    받았다(시 51:1-19). 둘째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이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타락하였던(마 26:24) 반면,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통곡하며 회개하였다(마 26:75). 고린도 교인들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였으며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이렇게 바울의 사랑('준엄한 편지')에 응답한 그들은 결과적으로 '영적 사망'을 낳는 죄의 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Martin).

    =====7:1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겪은 근심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다. 구체적 증거들은 다음의 7가지로 정리된다.
    간절하게 하며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심을 갖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변명하게 하며 - 이에 대해서는 대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 탄원(歎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분하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

  • 작성자 08:25 새글

    고린도 교인들이 의분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과거에 고린도 교인들은 이들에게동조하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방임하였었다.
    두렵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사모하게 하여 - 7절에서처럼, 복음을 심어준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나타낸다.
    열심있게 하며 - 이는 회개와 성결의 실천을 위한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한다.
    벌하게 하였는가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한 자들을 공의에 입각하며처벌하였음을 말해준다.
    깨끗함을 나타내었으니라 - 본문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의 본래적인 무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있던 잘못이 용서된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혹자는 본문의 '나타내었느니라'(* , 쉬네스테사테)가 '입증하였느니라'를 뜻한다고 본다(Barrett).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무죄함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한 것(9, 10절)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범한 잘못을 회개한 것이

  • 작성자 08:25 새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한 것이라고 한다. 칼빈(Calvin)도이와 유사한 견해를 보여주는 바,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편한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들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으며 이에 대해 그들은 분명하고도 진심에서 우러난 증거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과도 일치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Harris, Lowery)은 '고린도 교인들은 전에 실제적인 잘못을 했으나 지금은 회개하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본절을 해석한다.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고린도를 향한 '가슴 아픈 방문'이었다. 그런데 그 방문이 가슴 아픈 방문이 되었던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고린도 교인들이 보여준 태도와 관련이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는지 아니면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떤 경우이든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바울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 보여준 행동에 대해 회개를 하였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과

  • 작성자 08:26 새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자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의 두 견해는 다 참조할 수 있으며 굳이 어느 하나 선택할 필요는 없다.

  • 09:59 새글

    좋은 설명에 공감합니다!

  • 작성자 08:28 새글

    시51:17

    <호크마 주석>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 여기서 '상한 심령'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1) 자신이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자임을 절감하며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이라는 견해(Calvin. C. B. Moll. Keil) (2)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은 가운데 과거의 죄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아픔을 간직하는 마음이라는 견해(Hengstenberg, Rawlinson) 등의 해석이 있다. 그러한 본 시편 전체가 사죄를 위한 간구에 해당되며. 특히 본절과 16절은 하나님께 범죄한 다윗이 아직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중 (1)의 견해가 타당하다.

  • 10:00 새글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통회하는 ‘상한 심령’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제사임을 깨닫습니다.
    내 무능함을 겸손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할 때, 비로소 참된 사죄의 은총과 회복의 찬송이 시작됨을 고백하게 됩니다.

  • 11:04 새글

    @노베 아멘!

  • 작성자 08:31 새글

    칼빈은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11절의 불의한 자들의 죄악 목록이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더 극적으로 부각하기 위한 대조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성도들의 과거가 아무리 비참하고 더러운 죄인의 상태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반전을 짚어냅니다. 이 구절에 등장하는 죄 씻음과 거룩함 그리고 의롭다 하심이라는 세 가지 단어는 본질적으로 모두 동일한 의의 선상에 있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칼빈은 이 선언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로 단번에 이루어진 법정적 선언의 개념을 가진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확증하며 성화의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이 본문을 주해합니다.

  • 10:01 새글

    비참한 죄인의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로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은 이 법정적 선언이 복음의 참된 위로와 성화의 능력을 깨닫게 해줍니다.

  • 작성자 08:31 새글

    루터 역시 이 본문을 종교개혁의 핵심인 '이신칭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루터는 9절과 10절에 나열된 무서운 죄악의 목록들이 율법의 엄격한 고발이자 인간의 전적 타락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11절의 "그러나 너희는 씻음을 받았다"는 선언을 통해, 신자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결단이나 개선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사역 덕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전적인 수동적 은혜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신자가 비록 여전히 연약할지라도 복음의 약속 안에서 이미 완전히 의롭다 함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이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 10:01 새글

    율법의 고발 앞에 철저히 타락한 죄인일지라도, 인간의 도덕적 개선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사역으로 이미 완벽한 의인이 되었다는 이신칭의의 선언이 전적인 수동적 은혜를 붙들게 만듭니다.

  • 작성자 08:32 새글

    칼빈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과 11절을 주해하면서 진정한 회개의 본질과 그 역동적인 열매를 깊이 있게 분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단순히 감정적인 후회나 자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거룩한 통회라고 정의합니다. 반면 '세상 근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채 죄책감과 절망에만 갇혀 결국 영적인 사망과 파멸을 낳을 뿐이라고 경고합니다. 특히 11절에 나열된 열심, 사모함, 간절함 등의 영적 반응들을 언급하며, 참된 회개는 반드시 삶의 구체적인 태도 변화와 거룩한 열매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과적으로 칼빈은 이 본문을 통해 율법적 공로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신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성화의 필연성을 확증합니다.

  • 10:02 새글

    단순한 자책에 머무는 세상 근심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거룩한 통회가 참된 회개의 시작임을 다시금 깊이 깨닫습니다.
    율법적 공로주의를 배격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로 인한 삶의 태도 변화와 거룩한 열매를 강조한 균형 잡힌 복음적 주해가 가슴에 깊이 와닿습니다.

  • 작성자 08:33 새글

    루터는

    고린도후서 7장 10절과 11절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복음적 회개의 핵심 원동력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이 근심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고행이 아니라, 성령께서 율법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깨우치시는 거룩한 떨림이자 은혜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반면 '세상 근심'은 하나님의 용서와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죄에만 함몰되어 유다처럼 절망과 영적 사망에 이르는 불신앙의 결과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11절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간절함과 열심을 보며, 참된 회개는 죄인을 위로하시는 복음의 약속을 붙잡을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믿음의 고백이라고 가르칩니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신자가 이 거룩한 근심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 10:03 새글

    성령께서 양심을 깨우치시는 거룩한 떨림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절망 대신 위로의 복음과 십자가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루터의 복음적 회개 관점이 큰 울림을 줍니다.

  • 작성자 08:34 새글

    루터는

    시편 51편 17절의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예배의 태도로 봅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기에, 오직 성령에 의해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과 죄인 됨을 깨닫고 완전히 부서지는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때 일어나는 통회는 자학이나 절망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를 완전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갈망하게 만드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한 마음을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에서 복음의 가장 감격적인 위로와 이신칭의의 소망을 발견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신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적 공로를 자랑하는 대신,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깨뜨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 10:04 새글

    자신의 자기 의를 완전히 버리고 철저히 부서지는 상한 심령이야말로 하나님이 결코 멸시하지 않으시는 은혜의 통로이자 이신칭의의 소망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 작성자 08:35 새글

    칼빈은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의 본질이 외적인 종교 의식이나 위선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철저한 영적 겸손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이 아무리 화려한 예배와 예물을 드릴지라도,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아픔과 낮아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가식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칼빈에게 있어 '상한 심령'이란 죄를 미워하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마음이 깨어지고 낮아져,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용서와 은혜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을 통해, 신자가 낙심 속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법정적 위로를 제시합니다. 결과적으로 칼빈은 참된 예배와 성화의 삶은 자신의 죄를 통회함으로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매일 삶을 굴복시키는 데서 시작된다고 주해합니다.

  • 09:01 새글

    과거의 비참한 죄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그러나(알라)'라는 강력한 반전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선포가 가슴을 뜨겁게 울립니다.
    우리의 어떠함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은혜로 이미 완벽한 신분 변화를 이루어 주셨다는 법정적 선언이 영적 패배감에 빠진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거룩한 용기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이 오늘도 우리가 의의 삶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원문의 시제와 수동태에 담긴 복음의 진수를 성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은혜롭고 명쾌하게 풀어내어, 듣는 이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게 만드는 최고의 메시지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주신 세 가지 선물인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기억하며, 세상의 유혹 앞에서도 "그러나 나는 달라졌다"고 당당히 외치며 승리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 작성자 09:48 새글

    아멘!

  • 10:06 새글

    포스팅 해주신 2026년 5월 31일 묵상을 바탕으로, 핵심 내용을 제가 정리해 보았습니다.

    * 기독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을 믿는 신앙이기에, 참되게 거듭난 성도에게는 반드시 도덕적·윤리적 성화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성경의 죄악들을 현세에서 효과적으로 억제하며 기독교가 흥왕해온 역사적 경험의 결과이자 성도들이 살기 좋은 체제입니다.
    * 고린도전서 6장 11절 원문의 세 번 반복된 '그러나'는 성도가 과거의 죄악에서 벗어나 신분과 삶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바뀌었음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은혜로 '이미' 이루어진 수동적 사건입니다.
    * 신자는 때로 낙심할지라도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근심을 통해 참된 회개와 변화를 경험하므로, 늘 새로운 신분을 기억하며 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10:17 새글

  • 11:09 새글

    정말 요약을 잘 해주셔서 크게 참고가 됩니다.

  • 10:07 새글

    거룩하신 하나님, 저희가 과거에는 죄악 중에 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미혹과 패배감 속에서도 늘 새로운 신분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거룩한 근심을 통해 매일 죄를 이기며 의로운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 11:05 새글

    아멘!

  • 11:06 새글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허락하셔서 거룩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교만을 버리고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게 하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삶의 구체적인 태도 변화와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아멘.

  • 11:11 새글

    구원받은 신자라면 성화된 삶이 당연한 것이고, 만약에 성화의 증거인 열매들이 없이 고전 6:9 이하의 불의가 나타난다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봐야 한다는 뼈 때리는 충언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도덕률폐기론이라는 미혹을 수용했다간 유병*, 다락*처럼 망하고, 동성애 옹호 모 목사처럼 망한다는 것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도덕률폐기론까진 아니더라도 고전 6장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자만했던 자들이 어떻게 망신을 당하고 추락해가는지도 잘 보아야겠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하다가 망해가는 자들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어찌나 많았던지요. 우리는 정말 조심하고 끝까지 겸손해서 두려움으로 구원을 완성시켜 나가야겠습니다.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친기독교적이라는 것에 공감합니다. 다만 영미의 천민형 자본주의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자들의 오만과 편견, 비도덕과 비윤리의 수치를 보인 것이 노예제를 찬성했던 미 남부의 백인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물론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착한 주인들도 있었지만요.
    기독교인의 착한 양심을 잘 일깨워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11:29 새글

    좋은 분별에 매우 공감합니다.

    베려야 원조가 양심을 버려야 영혼이 산다는 궤변을 자주 말했다고 교계에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그 방계 조직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흔하고 공통적인 특징은 비도덕, 비윤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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