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그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1948년, 목월은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과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고,[3] 1950년 이화여자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6월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문학가협회 별동대를 조직, 1953까지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이 되어 문관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목월은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하였고, 1959년 4월, 한양대학교 조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한양대학교에서 후학을 키우는 일을 계속적으로 담당하였다.
목월은 1977년, 자신이 봉직한 한양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해인 1978년, 그는 자신이 출석하던 원효로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고 동년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고 돌아온 후, 지병인 고혈압으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남편을 찾아갔습니다. 부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후 그 모습이 너무도 남루하고 곤궁해 돈 봉투와 함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두툼한 옷을 건네고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목월과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해 헤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여인에게 다음의 시를 선물하면서였지요.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목월의 아들인 박동규 교수의 글에서도 목월의 아내는 훌륭한 모습을 보입니다.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경상북도 월성 출신.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연세대학교 · 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47년 한국문필가협회 발족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문학운동에 가담, 문총(文總) 상임위원 · 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 ·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총무 · 공군종군문인단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하였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山雅房) · 창조사(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잡지 『아동』(1946) · 『동화』(1947) · 『여학생』(1949) · 『시문학(詩文學)』(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하였다.
처음은 동시를 썼는데 1933년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지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본격 시인으로는 1939년 9월 『문장(文章)』지에서 정지용(鄭芝溶)에 의하여 「길처럼」 · 「그것은 연륜(年輪)이다」 등으로 추천을 받았고, 이어서 「산그늘」(1939.12.) · 「가을 으스름」(1940.9.) · 「연륜(年輪)」(1940. 9.)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