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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태: 20. 혈루증의 여인. 막9:18-26
(마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마 9: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마 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9:23)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마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마 9: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마 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마9:18-26)
성서 속의 여인들(20) - 혈루증의 여인
성서 속의 여인들을 지금까지 설교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여인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복된 여인들이었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 여인은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은 무명의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지금까지 거명되었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여인입니다.
오늘은 성경에 자신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간절한 믿음이 얼마나 큰복을 얻게 되는지를 가르쳐준 믿음의 여인을 살펴봄으로 우리가 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9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몇 가지 사건이 함께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중풍 병에 걸린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오는 것을 보시고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축복하셨고,
또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고 있던 레위라고 불렸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는데 이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나아와서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라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기에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 집에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고 계실 때 한 직원이 나왔다고 본문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기록된 막5:21절 이하에서는 이 직원에 대하여 그가 야이로임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이때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고 기록하고 있고 눅8:41절 역시도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야이로라는 사람은 당시에 회당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회당장이 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요즘으로 말하면 아마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책임자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라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곳을 세워놓았는데 그곳에서 교육과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방에도 그런 기능을 대신하는 작은 집회시설 같은 것을 두었는데 그 곳을 회당이라고 불렀고 그곳을 유지하고 보수하고 또 교육을 총괄하는 책임자를 회당장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유대교에서 큰 책임을 맡고 있는 그 였지만 딸이 죽어가니 그도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 나와서 고쳐 달라고 간청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옛말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유대교에서 회당의 첵임자인 회당장이라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닌데 그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셔서 손을 얻어서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당시에서는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이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흔쾌히 허락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시는데 마침 12년을 혈루증으로 앓은 어떤 여인이 가만히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12년의 세월이라면 참으로 오랜 세월이 아닙니까?. 그 오랜 세월동안 이 여인은 혈루증이라는 부인병을 앓았던 것입니다. 이 병은 정말 어렵고 힘든 병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산부인과에 속하는 부인병의 일종인데 레15:25절에서는 이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병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을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부정한 여인이라고 비난받고 소외당했던 그런 아픔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다행히 이 여인은 그래도 가진 재산이 있어서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뽐내던 그 많은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기 위해서 많은 돈을 써 보았지만 그 병에서 낫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여인이 들은 것은 예수라는 사람에게 가면 이 병에서 치료를 받을 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막5장에 보시면 그렇게 노력하고 수고하였지만 이 여인의 병은 더 깊어졌고 가진 돈도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태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삶을 살던 이 여인이 마지막으로 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는 예수라는 사람에게로 가면 병을 치료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예수님께 가서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힘으로 고쳐보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의 병은 더 깊어졌고 오히려 종교적으로 부정한 여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뜻 나서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이 여인이 왜 가만히 옷자락을 만질 생각을 하였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왜 당당하게 나서서 고쳐 달라고 하지 못하고 뒤에서 옷자락만 만지려고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니 자신이 지금 이렇게 절박한데 무슨 체면이 있겠습니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런 마당에 다른 사람 눈치를 볼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절박한 자기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의 옷을 가만히 만진 것을 보면 결코 자신이 드러낼 존재가 못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이 여인은 슬며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이 만졌던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그 옷자락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만지기만 해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여인은 왜 가만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까? 좀더 당당하게 예수님께 나아와서 간청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가진 돈도 다 허비했고 병도 더 심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았겠습니까? 겸손히 조용히 다가가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상반된 믿음을 발견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공인된 사람인 야이로는 주님께서 직접 자신의 집에 오셔서 딸의 몸에 손을 얻으면 살겠다고 말을 하였는가? 하면 이 무명의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이 무슨 효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무슨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행5:15절에 보시면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말씀 한마디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으니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과 능력을 행하니까? 사람들이 감히 베드로를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받았으면 하고 병든 자들을 거리로 메고는 나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행19:12절에 보시면 소아시아 각 곳을 다니면서 많은 기적과 희한한 능력을 행하는 바울을 보면서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얻으면 병이 나았다" 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그림자나 바울이 땀을 닦은 그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그 많은 병자들을 살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을 살렸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가진 믿음이 그들을 살린 것이지 바울이 땀 딱은 손수건이 무슨 효험이 있고 장막을 기울 때 무릎에 얻고서 작업하던 그 천 조각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게 미혹이 되어서 이런 것들을 우상으로 삼고 숭배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화폐 단위가 얼마나 커졌는지 억대, 또는 밀리언 하면 굉장히 큰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익숙해 졌는지 보통 은행에 근무하는 여자 직원들이 공금을 10억 20억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것들이 무슨 효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여러분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여인은 옷자락만 만져도 낳겠다는 것을 확신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여인이 가진 절박한 상황에서 가진 겸손한 믿음입니다. 결코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소박하고 겸손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모두 다가 주님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겸손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22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확증하시기를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귀한 것은 이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만졌어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는냐? 하시면서 주위를 돌아보십니다. 마가복음에 보시면 제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에워싸 미는데 어찌하여 누가 옷에 손을 대었다고 하시느냐? 면서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다 알고 게신 주님께서 가련한 여인이 내 옷자락을 만져서 치료 받기를 원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면 되는데 꼭 그것을 굳이 아시기 위해서 누가 그랬느냐? 는 것입니다.
왜 굳이 이 여인을 찾으셨을까? 그것은 이 여인의 아픔을 공식적으로 치료하고 선포하기 위해서 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한 사람이 됨을 선포하기 위해서 주님은 이 여인을 그토록 찾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두려워하며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사실대로 여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라고 축복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솔직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주님 앞에서 나의 부족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주님은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소원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만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가 있는 교훈을 살펴보면
첫째: 여인이 가진 겸손한 믿음이 자신을 살렸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겸손한 믿음을 가지자. 무엇이 겸손한 믿음인가?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는 것이 겸손한 믿음입니다. 누차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한 사람이었기에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자신은 온전한 사람이 될 수가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내 세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엡2:8,9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인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으시대고 무엇을 가지고 방자히 행하겠습니까? 나 자신을 살펴보고 은혜를 사모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것 입니다.
오늘 12년을 혈루증으로 앓았던 이 여인은 결국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자 그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믿음과 용기와 결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런 말입니다.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간절한 믿음의 자세가 결국은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둘째: 야이로 처럼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은혜를 얻을 수가 있다. 야이로 그는 당시에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다. 그런데 그는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 체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서 엎드렸다.
마태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은 기이히 여기셨다.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길 이스라엘 중에서 이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진실한 믿음을 가졌던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자신 아래도 부하가 있는데 저들에게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만 하시면 내 종이 나을 수가 있으니 말씀만 하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기분이 좋으셔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하셨는데 그 하인이 그 때로부터 나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높으면 예수님보다 얼마나 더 높겠습니까? 왕하5장에 보시면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존귀한 자이기는 하지만 문둥병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집에 있던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사 이스라엘 땅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는 그를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 그때 그는 굉장히 분노하였지만 그가 낮아져서 그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그 몸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비결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비결임을 알고 우리의 주어진 자리에서 더욱 겸손하고 낮아질 때 우리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낮아진 야이로 그는 귀한 딸을 다시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을 고침받은 그 여인은 자신의 믿음으로 그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야이로의 딸은 누구의 믿음으로 인하여 살림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야이로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자나가시는 예수님을 청하여 자신의 집에서 기도해 주기를 청한 그 야이로의 믿음이 딸을 살린 것이고 슬픔에 쌓인 가정을 기쁨의 가정으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른 사람을 살리기를 원합니다. 소망이 끊어진 자에게 소망을 전달해 주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쁨과 희망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야이로의 믿음이 한 가정을 살린 것처럼 우리들의 믿음이 이 시드니 지역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일에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가 있도록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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