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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명동촌 시대 4
윤동주 출생과 항일투쟁의 명동촌(1917년 ~ 1920년)
시인 윤동주의 명동(1917년)
명동사람들과 용정 3.13만세 시위
명동촌의 무장 단체들과 간도대학살
용정❰3.13독립만세시위❱후, 북간도 각지에서의 항일투쟁은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는 무장투쟁 단계로 들어섰다.
명동촌에서 살았던 김신묵은 “만세 운동 당시 우리 간도의 지도자였던 김약연 선생은 계시지 않았다. 러시아에 가서 시베리아와 만주 대표들과 회합을 하고 상해로 내려가던 길목에서 (중국 경찰에게) 잡혀간 것이다. 그게 독립 만세를 부르기 직전이었다. … 이때부터 독립운동은 한결 뜨거워졌다.”63) 라고 회고한다. 무고한 청년들의 죽음을 지켜본 간도의 조선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독립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
❰3.13독립만세시위❱후 충렬대는 그 중에서 중심이 되는 20세 이상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광성학교 교사 김상호를 대장으로 하는 ❰맹호단❱을 조직하여 용정, 국자가, 두도구 등 지구에서 일제와 친일파들을 공격하였다.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일본경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맹호단❱이었다. 동척회사와 일본영사관에 불을 지르고 용정 민회장을 체포하고 구속하였으며 조선인 경찰들이 사직서를 쓰도록 협박하며 친일파를 암살하고 친일단체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며 ⌜대한독립신보⌟를 간행하였던 것이다.64)
1919년 4월 후 간도국민회 남부지방회는 명동촌 명동학교에 그 사무실을 두었다. 남부총회 직속으로 경호대원 37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명동학교와 정동학교 충렬대원 출신이었다. 마진은 화룡현관공서 관원의 신분을 이용하여 그들을 지도하며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김약연과 정재면이 없는 명동은 물론이고 명동학교를 보위하며 회령-용정, 명동-무산 일대 간의 길을 순찰하며 조선인과 중국인을 불심 검문하여 수상한 자를 감금하였고 친일간첩들이 명동에 잠입하는 것을 막았다. 남부총회는 또 명동학교에 법무부를 설치하고 맹호단, 경호대를 지휘하여 친일파와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심사 처리하는 동시에 조선인들이 일본영사관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며 조선인들 간의 분규를 직접 중재하며 중대한 문제는 중국지방 관청에 보고하여 중국법에 의하여 해결하도록 하였다. 65) 그러나 국민회 경호원들이 의심스러운 사람을 붙잡아다가 생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66)
흔히 사가들이 1920년 1월 4일 동량어구에서 일어난 ❰15만원 탈취사건❱을 흔히 명동학교 출신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기술하는데 그건 지나친 과장이다. 최봉설, 한상호는 와룡동 출신이며 창동학교 졸업생들이다. 최봉설의 부친 최병균과 한상호의 부친 한영운은 창동학교 설립후원자들이었다.67) 윤준희는 회령 출신으로 서전서숙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당시 영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중에 구춘선을 도와서 틈틈이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는 캐나다장로회 소속의 청년이었다.68) 임국정은 함흥태생으로 창동학교 출신이며 당시 용정에 살며 철형광복단에 가입한 캐나다장로회 소속 청년이었다. 모의가 다 끝나고 늦게 가담하게 된 박웅세는 명동학교 졸업생이고 김준은 명동 사람이다.69) 그러므로 이는 와룡동의 창동학교 출신의 거사로 보는 것이 맞다. 어쨌든 그들은 일제가 조선은행에서 용정출장소로 송금하는 일화 15만원을 탈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무기를 사려다가 엄인섭의 밀고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 당하였다. 15만원의 정보를 제공한 전홍섭은 회령에서 잡혀 15년형을 언도 받았고 최봉설은 노령으로 탈출하여 1923년 적기단 조직에 참여하여 단장으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한다.
명동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자유의 종⌟이라는 신문을 만들었고 두도구 부근의 학생들은 ⌜태극기⌟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었다. 당시 일반인들은 일제가 발행하는 ⌜간도시보⌟를 많이 구독하였으므로 학생들은 ⌜자유의 종⌟과 ⌜태극기⌟와 비밀리에 등사한 소형 신문들을 간도 및 국내에 까지 배포하였다.
일제는 1920년 5월 27일 명동과 정동학교와 인근 마을을 완전히 폐쇄하고 중국 군경으로 하여금 교사와 학생들을 체포하게 만들었다. 29일에 명동학교는 봉쇄되었으며 요직들과 맹호단, 경호대 등이 로령, 라자구, 무산 건너 쪽으로 이동하였다. 일제의 대대적인 수색이 있은 후 북간도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길현 이북, 왕청현 대소왕청 등지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기지는 명동, 정동, 창동으로부터 의란구, 하마탕, 대소왕청, 명월구로 옮겨졌다. 그렇다고 명동 부근의 독립운동이 중지된 것은 아니다. 유하천, 유예균 등 국민회 의사부 임원들이 남아서 독립군 모집, 군자금 모금, 항일의식 고취 작업을 계속하였고 명동학교가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은 후에 국민회 총회장 구춘선이 명동으로 와서 용암촌에 머물렀고 로령에 있는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도 10월 30일에 명동에 들어왔다.
1920년❰간도대학살❱때 일제는 명동학교를❰불령선인❱의 근거지로 보고❰청산리전투❱전에 토벌을 감행하였다. 10월 22일, 22명의 일본군이 명동에 몰려와 촌민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하고 학교와 주택을 수색하였다. 일본군은 수색에 저항하는 허익근, 이용훈, 최홍택 등 10여 명을 살해하고 90여 명의 교직원과 마을 주민들을 체포하였으며 명동학교와 명동교회 그리고 마진의 집을 소각하였다.70) 재미있는 것은 명동촌 사람들 전원이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본의 토벌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으로 중국 경찰이 명동에 출두하였으며 일본군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입회하에서 학교와 주택을 수색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도 1920년에 있었던 명동촌의 학살보고가 위와 대동소이하다.
“명동교회는 중학교실과 9,000여원 가치의 비품을 전부하고 교인 중에 허익근, 박용훈, 최홍택 3인이 참살을 당하고 김병영71)은 중국육군에게 총살되었으며 한상수, 장성순은 사형에 처하고 기여(其餘)는 복역자와 구금자가 90여인이더라.”72)
두 기록은 명동학교와 마진의 집이 불에 타고 10여인 또는 6인이 죽임 당하였으며 체포당한 자가 90여 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아주 다른 기록이 있다.
“청산리 근교 사람들은 말도 못하게 많이 죽고 노루바위에서는 예배당에 교인들을 집어넣고 불을 질러 버렸다.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총으로 쏴서 죽이고 해서 거기서만 오륙십 명이 죽었다.
일본영사관에서는 미리 예비 검거를 했다. 명동에서는 무작정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회의를 열고 문재린을 비롯해 5인이 먼저 일본군에게 자수해서 큰 화를 면했다. 남편은 12월에 일본 영사관에 갇혀서 약 두 달 정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 밤마다 사람을 내다 죽이는 때였는데 명동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풀려나왔다. 일본군은 명동학교를 불사르고 독립운동가 마진의 집을 불 지르는 정도로 명동을 지나갔고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73)
일제의 ❰간도대학살❱에 명동은 학교와 마진의 집만 불에 타고 무사히 지나갔다는 기록이 또 있다.
“이 소식을 들은 명동교회 간부들이 회의를 열었다. 간장암 청년들이 그토록 참혹하게 이중 삼중으로 당했으니 명동도 참변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회의 결과 가만히 앉아서 일을 당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몇 사람이 주민 전체를 대신해서 자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대표 다섯 명을 뽑았다. 명동대표로 최선택 목사, 국민회 동구 대표로 김정규 선생, 국민회 경호부장 김강, 명동학교 대표 김석관 선생, 국민회 동구 서기이자 ❰독립신문❱기자 문재린이 뽑혔다.
이들 다섯 사람은 11월 10일에 자수하고 구속되었다. … 실제로 김강 국민회의 경호부장, 그리고 남성호 장로의 아들이자 영사관 경관으로 모반을 한 남보라는 처형을 당했다. 나머지는 1921년 2월 10일에 풀려났다.”74)
앞의 두 기록과는 너무 다른 기록에 놀라게 되는데 송우혜 또한 ⌜윤동주평전⌟에서 명동학교와 마진의 집만 소각 당했다고 말한다.
“어쨌든 명동에 진입한 일본군은 함부로 행패하지 못했다. 단지 명동학교와 그 옆에 위치한 마진 소유의 비어 있는 집 한 채만 소각하고 갔을 뿐이다.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당시 ‘경신 대학살’이라고 불리도록 처참했던 대토벌을 최초로 당하면서도 명동 마을 사람들이 학살은커녕 구타조차 당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그것은 오로지 명동마을이 큰 규모의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갖고 있는 기독교촌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일을 벌였다가 나중에 일본과 서구 열강 사이에서 시끄러운 외교 문제가 일어날 것을 일본군 나름대로 경계한 것이다.”75)
송우혜의 주장대로 기독교촌이고 학교 마을이라 시끄러운 외교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일제가 그냥 지나친 것 인가? 그렇다면 와룡동 창동학교와 자동의 정동학교의 학살과 방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다른 무엇이 있는가? 송우혜의 주장을 따르게 되면 1차 사료에 해당되는 장로회 사기에 나오는 기록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사실과 사실 아닌 허구가 섞여 있는가? 아니면 송우혜가 인용하고 있는 김신묵과 문재린의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용정❰3.13독립만세시위❱때 윤동주는 세 살이었다. 세 살 아이가 아버지와 가족들, 마을 사람들을 통하여 무엇을 보았을까?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무엇을 느꼈을까? 맹호단과 결사대, 경호대의 훈련과 모임으로 소란해지고 삼엄해진 학교에서, 예배 시간마다 눈물로 드려지는 독립을 구하는 기도의 탄식과 통곡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까? 아니면 아이의 동심으로 평안하였을까?
❰간도대학살❱ 때 윤동주는 네 살이었다. 네 살의 겁 많은 아이가 부모님과 가족들, 마을 사람들을 통하여 무엇을 보았을까?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무엇을 느꼈을까? 일본 군인들이 명동학교에 불을 지를 때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에 서있었을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있었을까? 일본군의 말에 꼼짝 못하고 벌벌 떠는 교사들과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팽팽한 긴장으로 숨 막히는 시간에 울었을까? 겁에 질려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을까? 살기등등한 일본 군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가슴 속에 살얼음처럼 내렸을까?
그가 받은 쇼크는 무엇일까? 그가 겪었던 부끄러움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때에 시작된 것일까? 장로교의 사기에 나온 기록대로 라면 그 자리에서 수색을 거부한 세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때 그들의 죽음에 얼마나 쇼크를 받았을까?
사회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명동촌 (1920년 ~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과 명동중학교 폐쇄(1920년 ~ 1025년)
1885년 청조가❰이민실변정책❱으로 봉금령을 풀고 조선인들에게 합법적인 이주를 허락하며 두만강 동서로 700리 남북으로 40~50리를 조선인전문개발구역을 주었을 때 조선인들은 자리를 잡자마자 서당을 열어서 자녀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혈연, 지연으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조선의 서당과 문물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당시 이들을 이끈 것은 유교 가치관이었으며 충
6부로 계속됨
2026년 2월 6일 금요일 자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 주
63) 문영금 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458쪽, 삼인, 2006
64) *연변역사학회 외 편⌜서전서숙 100주년 기념문집 력사의 종소리⌟, 312쪽 연변인민 출판사, 2006
*리태수 주필 ⌜륙도하⌟, 38쪽, 연변인민출판사, 2013
*용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 3.13반이운동 80돐 기념문집⌟, 240쪽 연변인민 출판사, 1999
*백민성 편⌜유서 깊은 명동촌⌟, 연변인민출판사,2001
65) 리태수 주필 ⌜륙도하⌟, 38쪽, 연변인민출판사, 2013
66) 문영금 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458쪽, 삼인, 2006
67) 이옥희 ⌜뜻으로 읽는 북간도 독립운동 이야기⌟,87쪽 2023
68) 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29쪽,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8,
69) 문영금 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478,479쪽, 삼인, 2006 70) 총서편집위원회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561쪽, 민족출판사, 1999
71) 김병영은 용정 ❰3.13독립만세시위❱때 중국군경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72) 양전백, 함태영 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13,614쪽,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73) 문영금 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84,85,459,460쪽, 삼인, 2006
74) 문영금 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87쪽, 삼인, 2006
75) 송우혜 ⌜윤동주평전⌟, 65쪽, 서정시학,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