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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최후공세 3단계 : 7월공세
1. 공산군의 공격계획과 아군의 배치
중공구의 6월 공세는 금성돌출부 우견부의 금성천-북한강선(아이슬랜드선)에 설치된 새로운 방어선에서 저지되었지만 선우고지 등 일부지역은 7월 초까지도 전투가 계속되었다. 항미원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6월 23일까지 6월 공세를 종결하고 24일부터 7월공세(7.13부) 준비에 들어갔다.
이는 중공이 "이승만 대통령의 6. 18반공포로석방"에 의해 6월 군사작전의 효과가 무색해 지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선전효과가 퇴색됨에 따라 한국정부에 휴전협정을 준수하도록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한편, 휴전을 앞두고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기도에서 이미 6월 19일에 "한국군 부대에 대해 새로운 공세를 펴야 한다'는 모택동의 지령이 하달된데서 비롯되엇다.
그들은 이번 공세에 금성돌출부에 배치된 국군 4개사단(수도사단, 제3.6.8사단)을 섬멸하기로 목표를 결정하였다. 그 이유로 첫째, 전선이 돌출되어 공격에 유리하고 둘째, 1차전(전초전)과 2차전(6월공세)을 통해 이 지역에 익숙하고 셋째는, 국군 방어선의 특징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이유는 방어선의 개선과 더불어 화천을 점령하여 수력발전소를 되찾으려는 전략적 기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판단 되었다.
가. 중공군의 작전계획과 부대 배치
팽덕회는 주공부대인제20병단(제60.67.68군)에 제21군의 배속을 비롯해 전차. 포병. 공병 등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제20병단은 금성 정면에 82mm 박격포 이상의 지상포 1,100문(km당 44.4문)과 전차 20대를 보유하여 병력은 3 ; 1, 화력도 1.7 : 1로 우세하였다.
공산군은 7월 10일에 공격명령을 하달 하였다. 2단계로 구분하여 제1단게는 금성 서남족 이실동-북정령-배선골과 금성천 이북의 적을 공격 섬멸하며 전선을 직선으로 만든 다음 그후 상황을 보다 제2단계로 삼천봉-적근산-장고봉-흑운토령 및 백암산으로 공격해 나가며 작전이 성공한 이후에는 아군의 반격을 격퇴할 준비를 하되 이 기간중에 디시 대량의 아군을 섬멸한다는 것이다.
(1)서집단(제68군(-1), 제54군 130사단) : 금성돌출부 좌견부 외야동-회고개에서 1단계로 이실동-북정령-월봉산-개야리로 공격, 제2단게로 중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 서쪽과 서북의 아군 공격
(2)중집단(제67군,제54군 제135사단, 제68군 202사단 1개연대) : 관대리-교암산간에서 공격하여 동산리,상산리 진출하여 지대내 아군 격멸, 제2단계로 동.서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 서쪽 및 서북의 아군 격멸
(3)동집단(제60군, 제21군(-1),제33사단,제68군 제605연대) : 제60군이 송실리-용호동에서 공격, 광대골,세현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금성천 교량과 나루터를 점령하고 금성-화천간 도로를 장악하여 아군의 반겨과 증원을 차단한다. 제2단계로 서. 중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의 아군을 섬멸한다. 제21군은 제60군의 북한강 동쪽 임무를 인수하여 방어에 주력하다 적을 적을 적극적으로 견제.
이를 위해 중공군은 제20병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좌인접 제9병단 제24군으로 하여금 양지-행정간에서 국군 수도사단 제26연대를 공격하여 섬멸하고 상구정과 하구정 간의 도로를 통제하여 김화방향으로 아군의 증원을 저지하도록 계획하였다.
공격개시일은 '53. 7. 13일로 하고 그밖에도 철원-김화의 중부전선에는 제9병단(제16, 24군)이, 서부전선에는 제19병단(제46, 1군)이, 문등리 동족 동부전선에는 북한군 2개 군단(제3, 7군단)이 합세하여 '51년도 춘계공세에 비견되는 대규모 공세였다.
나. 유엔군의 작전계획과 부대 배치
한편 당시 유엔군은 공산군의 이동에 관한 정보를 통해 적의 공세가 임박했음은 물론 주공지역으로 화천저수지 방향으로 지향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기상불량으로 적의 정확한 동태를 파악하지는 못한 가운데 각 군단장들에게 방어태세를 강화하라 경고하는 한편 국군 제2군단의 우익 방어서늬 강화에 주안을 두고 부대배치를 단행하였다.
군은 그동안 부대정비를 완료한 국군 제5사단('53. 1.29에 351고지전투를 제15사단에 인계하고 간성에서 부대훈련 후'53. 4. 10일 북한강 동안의 제3사단('52. 4. 9일 949고지 전초선으로 들어와 전투를 하고, '53.4. 10일 제5사단에 인계(제22연대는 제5사단에 작전배속)후에 미 제8군 예비로 있다가 화천 상리에서 동송으로 이동하여 6.15일 제5사단. 제8사단 작전지역을 일부를 인수하여 529관망산 전투 수행후 화천 동막동으로 철수)인수하여 6.10~14까지 883-973-949고지 전투를 실시 및 후퇴하여 신아이슬랜드선으로 후퇴, '53. 6. 26일 제2군단으로 복귀하여 제8사단과 제3사단 사이로 들어옴)
문등리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미 제10군단 좌익인 국군 제7사단의 우익을 미 제7사단(선우고지)이 인수하여 방어정면을 좁혀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정비중인 미 제24사단을 '53. 7월 12일 한국으로 이동시켜 후방지역 방아와 포로경비에 투입하였다.
2. 조공과 양공
공산군은 금성돌출부에 대한 공격에 앞서 6월 24일부터 이 지역에 대한 탐색공격과 다른 지역에서 조공 및 양공을 실시하였다.
가. 조공
(1) '53. 6.24 ~25일, 저격능선과 관망산 공격
국군 제9사단 제28연대가 방어중인 김화 서북 북진능선에 중공군 제24군 제70사단이 공격을 해 왔으나 700명의시체를 남기고 후퇴했다. 저격능선에는 제9-29연대가 방어중이였으며 중공군의 공격으로 1개 소대 전초 X고지가 피탈되었으나 또다른 전초 A고지는 240명의 손실을 무릎쓰고 방어하였다.
관망산지역은 금성천 도하에 전진기지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관측 고지였다. 당시 국군 제3사단의 좌일선 제23-2대대는 폭우속에서 중공군 제68군 제604연대의 공격을 받아 6월 26일 피탈된다.
제3사단는 군단 명령으로 북한강 남안을 제5사단에 인계하고 제22. 23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7월 3일까지 7차례의 역습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1,776명의 손실을 입었고 중공군은 2,962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8사 제3사 송실리 중공군 181사
*535 중공군180사 북한강
*485
여문리 제22연 제23연 *529 관망산 북한강
*445 금성천 북한강
제23연 제35연
금성천
제3사 제5사 *324 *462 집실리 금성천
금성천
양지촌
등대리 금성천
광대골 *472 금성천
(2) '53. 6. 26일, 북한강 동안 제5-36연대지역, 938(선우고지)고지 공격
중공군 제60군 제189사단이 1개 연대로 북한강 동안의 국군 제5-36연대 진지를 공격하여 연대는 1.3km 뒤로 물러나게 되다.
한편 중공군 제189사단은 또 다른 1개 연대로 미 제10군단 우익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의 938고지를 공격한다. 이 고지는 지난 6월 16일부터 제7사단이 제20사단으로부터 인수한 이래 학보해 왔으며 가장 중요한 1220고지에 이르는 발판으로 중요한 고지였으며 1220고지는 제5연대가 방어중에 있었다.
중공군이 '53.6.26일 21:45에 집중 포격에 이어 공격해온 중공군에 제8-2대대장 선우 용 소령은 탄막사격과 백병전으로 맞서 혈투를 벌였다. 결국 유무선망이 두절되고 전방 병력이 대대지휘소 쪽으로 몰려들었다.
"철수하지 말라, 현 전선을 고수하라"
결국 선두에서 지휘하는 선우 용 대대장은 수류탄에 전사하고 938고지는 피탈되었다. '53. 6. 27일 세차레나 자체 역습을 감행했으나 실패하자 사단장 김용배 준장은 예비인 제3연대를 투입하여 한 때 역습에 성공하지만 바로 적의 역습에 무너지고 결국 미 제10군단장의 지시로 7월 1일 탈환작전을 중지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제7사단은 1,347명의 손실(전사와 실종 포함)되고 적의 손실은 1,323명으로 추산되었다. 후일 이 고지는 대대장의 감투정신을 기려 "선우고지"라 칭하였다.
용호동 북한강
금성천 북한강 *949 *973
광대곡 *324 북한강
금성천 *462 북한강 *883 *938 *1220
양지촌 ,선우고지
외성동 구대 북한강
*780 황병동 백석산
내성동 후동 제5-36연 광석교 제7-5연
장재동 *538 북한강
제35연 제36연 제5사 제7사
백암산 1179 북한강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당시 연대장 이병형 대령(예)중장)의 증언 : 이 선우고지 피탈의 주요원인은 대대자이 통신 두절로 중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고, 그때 공교롭게도 연대장이 전쟁피로로 불면증에 시달려 잠시 연대 지휘소를 부사단장에게 위임하고 연대 후방지휘소에 있음으로 인한 지휘공백이 있었다
나. 양공
(1) '53. 6. 25~29 : 임진강-역곡천 합류지점 국군 제1사단 전초진지 공격
공산군은미 제1군단지역 역곡천 인원의 전초진지에 공격을 가했다. 이곳 진지들은 '51. 10월에 코맨도 작전과 '52. 6월 카운터작전으로 확보한 이래 몇번의 쟁탈전이 전개 되었다.
중공군은 '53. 6.25~29일에 국군 제1사단 전초 250고지(퀸고지)-199고지(박고지)를 공격하고, 7월 6일에는 미 제7사단의 포크찹고지(234)를, 그리고 미 제2사단의 화살머리고지(281)를 공격하였다.
이중에 퀸고지(250)와 박고지(199)는 임진강과 역곡천 분기점 바로 남족 계호동-정동에 위치한 고지들로 이 당시에 구군 제1사단은 임진강을 중앙에 두고 그 좌측에 제11연대(고왕산서측-노리고지), 우측에 제15연대(중사리-어적산리)로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제12연대를 예비로 보유하였다.
중공군 제19병단 에하 제1군 제1사단이 '53. 6. 25일 22 : 00시에 사단의 우전방 전초고지인 퀸고지, 박고지를 비롯해 1고지, 3고지, 마이크고지 등 5개 전초와 좌전방 노리고지 일대를 포격후, 주공을 박고지로, 조공을 퀸고지로, 양동은 노리고지였다.
국군 제1사단은 국군 해병 지1연대(-)까지 배속받아 사단 좌전방에 투입하여 중공군과 전초고지 쟁탈전을벌여, 결국 박고지는 29일 피탈되고 퀸고지에서는 고전이 계속되었다.
임진강
*117 역곡천
*대노리고지 정동
고장리 *소노리고지 임진강 개호동
*69 박고지(199) 퀸고지(250)
*닉키고지
*텟시
고양대 *밥풀고지 임진강
*165 *베티고지
마량산315 태풍전망대
임진강
고왕산355
(2) '53. 7월의 역곡천 일대 전초고지 전투
(가) 포크찹고지전투 : 피탈
중공군이 '53. 7. 6일 공격한 포크찹 234고지는 미 제1군단 우익사단인 미 제7사단이 방어중이었다. 이고지는 역곡천 지류의 바로 북쪽 하사골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지난 3월 적에게 피탈당한 불모고지(275)와 더불어 서부전선의 격전지로 알려져 있었다.
중공군 제23군 제67사단은 아군 전선에서 외따로 떨어진 234고지로 올라와 미 제17연대는 전초지역에서 4일간이나 역습을 반복하며 쟁탈전을 벌였고 중공군은 3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격전을 벌였으며 군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미 제7사단 전방지휘소에서 무리한 인원 손실을 강요하면서 지킬 가치가 있느냐에 의문점을 나타내며 적에게 넘겨주었다.
*효성산
*395백마고지
역곡천
내석교 역곡천 *281화살머리고지 역곡천
역곡천
*290 티본고지
*265 *324
*191아시널
역곡천
*255포크찹고지 *187 *에리고지 *야월산
역곡천 *천덕산477
*275 *347
불모고지
(나) 화살머리고지 (281)전투 : 방어
좌측 미 제7사단이 포크찹고지에서 전투를 하던 7월 6일, 국군 제2사단이 방어중인 역곡천 북방 화살머리고지(281)에 중공군 제23군 제73사단이 공격을 해왔다.
이 고지는 '51. 가을에 코맨도 작전시 확보한 진지로서 백마고지(395)와 더불어 역곡천 북안에 위치한 요충지다. 국군 제2사단은 지난 '52.12. 29일에 철원지역(281-중강리)에 투입되어 6개월째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지난 '53. 6. 29~30에도 중공군 제73사단이 공격해와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401명의 손실을 입고 물러간 중공군 제73사단은 7월 6일, 1개 대대 병력으로 281고지를 공격하였다. 이곳을 방어중인 제2사단 제32연대 제2대대가 설치한 2개의 소초가 피탈되자 사단 역습이 개시되어 30시간이 넘는 사투끝에 회복하였다.
'53. 7. 8일 야간에 적은 6,500발의 야포와 박격포탄을 퍼부으며 재삼 공격을 가하여 혈전이 벌어져 1개 소초가 피탈되었다. 사단은 7월 11일 역습으로 다시 회복하여 끝까지 지켰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은 500명의 손실을, 적은 750명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다) 임진강변 베티고지 전투 : 부분 방어
중공군이 주공으로 금성돌출부에 대헤 공격을 취할 때인 '53.7. 13일에 중궁군 제1군 제1사단이 임진강 서안 고양대 부근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전초인 베테고지에 공격을 가해왔다.
베티고지는 마량산 동쪽 능선상 니키고지 하단부의 무명고지로 바로 앞이 임진강이고 그 너머에 동북 쪽이 박고지다. 당시 최초 방어임무를수행하던 제11연대 제7중대 1개 소대가 적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교체되었다.
7월 15일 제6중대 제2소대(김만술소위)로 교대되었으며, 야간에 다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유개호에 의지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여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경사자를 포함하여 12명이 생존하였고, 적은 764명이 살상되었으며 아군 김만술 소위가 태극무공훈장, 미국 십자무공훈장 등 여러명이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임진강
*117 역곡천
*대노리고지 정동
고장리 *소노리고지 임진강 개호동
*69 박고지(199) 퀸고지(250)
*닉키고지
*텟시
고양대 *밥풀고지 임진강
*165 *베티고지
마량산315 태풍전망대
임진강
고왕산35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박고지 일대의 전쟁후 강력사고 (집단 사살후 월북 등)
나)하병렬 소대장의 증언
3. 금성돌출부 전투('53. 7.13)
중공군의 최후공세는 금성돌추부 양익과 임진강변 및 역곡천 변의 전초진지에 대한 조공과 양공에 이어 7얼 13일 야간에 금성돌출부로 지향되었다.
중공군은 동서 양작전 집단이 수도사단과 제3사단(제5사단 좌익 포함)을 돌파함과 거의 동시에 제6사단과 제8사단 전면에 압력을 가하면서 이들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섬멸을 기도하였다.
가. 금성돌출부 좌견부 붕괴
성산 금성
직목동 금성천
*487 회고개 *468
*473
중치령 770
*512 *552 금성천 *교암산 지형능선
*522
26연 1연
*477 *419 월봉리 수도 제6사
수태리
이청동 *월봉산482
*오성산저격능선
*424 *462 간진현
하소리 삼현
계웅산 북정령
삼천봉 승암고개 적근산
금성돌출부 좌견부는 수도사단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수도사단 전투경로]
전쟁초기 의정부-한강/시흥지구-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으로 철수, '50.8.9~9.20가지 안강.기계전투 후에 반격작전간 영양-춘양-영월-평창-속사리-서림-양양으로 진출, 양양-간성-양구-화천-신고산-안변을 거쳐 '50.10.10에 원산 점령, 영흥-함흥-성진-길주-청진-부령까지 진출, 철수간 흥남에서 '50. 12.17일 묵호로 철수(이때 제3사단 제26연대가 함께 옴, 제18연대는 다음에 제3사단 따라 구룡포로 상륙), 묵호에서 다시 서림-양양선으로 진출하여 제9사단 방어선 인수, 중공군 신정공세로 삼척까지 철수하였다가 다시 재반격으로 삼척-강릉-하진부리-속사리 진출, '51. 3.26일 38선 돌파 4. 15일 캔사스선 진출. '51.5.7~13일가지 설악산일대 점령, 중공군 5월 공세로 밀려서 대관령까지 후퇴. 다시 '51. 5. 25일부터 재반격으로 '51. 6. 3일 향로봉 진출, '51. 8. 16~23까지 서화리 동북 924고지 점령, '51. 10.12~15가지 제1기갑연대가 월비산 탈취. '51. 11. 19일에 제11사단에 인계하고 속초-마산-여수로 이동하여 '52. 3.14까지 백야사에 배속하여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52. 3. 17 화천이동(미 제40사단지역 인수), '52. 7.7~10.14까지 지형능선 및 수도고지 전투 후 국군 제8사단에 '52. 10. 25일 인계. 양주에서 교육훈련 후에 . '52. 12.10에 미 제9군단으로 배속되어 양주에서 사창리로 이동. '53. 1.1 부터 금성지구 전투(국군 제9사단지역 인수)
수도사단은 하소리에서 회고개까지 주저항선에 좌측에 재26연대와 우측에 제1연대(배속, 제1기갑연대 제3대대)를 배치하고 기갑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사단은 좌측의 제26연대는 남대천 북안에 진지를, 제1연대는 남안에 진지를 편성하였으며 중대단위로 동굴형의 거점을 편성하고 그 공간에 지뢰. 철조망으로 보강하였다.
중공군은 서작전 집단의 제68군 204사단, 203사단과 제54군의 130사단이 '53. 7. 13일 21 : 00시에 수도사단 전역, 특히 제26연대 지역에 포사격을 가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사단은 지난 7. 11일에 생포한포로를 통하여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
[주저항선 붕괴]
사단은 제26연대 지역에서 "적이 새가맣게 밀려온다"는 보고에 적의 주공을 좌측 지역으로 판단하여 화력의 우선권을 제26연대에 부여하였다.
그런자 적은 30분이 지나면서 사격방향을 우익 제1연대 지역으로 전환하여 중치령과 회고개 방향으로 주고을 투입하였다. 그들은 앙군의 동굴전술("적이 공격하면 동굴에 은폐하였다가 진내사격으로 대응")을 역이용하여 소규모 부대로 아군을 동굴에 집어넣고 주력이 부대공간 지역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군이 진내사격을 요청하는사이에 이미 적 주력이 부대간 간격을 이용하여 제2선의 전방대대 OP와 예비대 지역까지 밀고 들어와 예비대 운용도 쉽지않게 되었다.
제1연대장이 예비대인 기갑연대 제3대대를 중치령 접근로의 적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522-512고지 저지선으로 투입하였지만 이미 전방대대를 돌파한 적과 조우하여 대대장이 전사하면서 전투력이 와해 되었다. 이에 다라 회고개지역의 제2대대가 증원을 요청했지만 예비대 운용이 어렵게 되고 제1대대도 대대 OP가 적의 파괴통으로 박살나고 병력이 연대 지휘소족으로 철수하게 된다. 다만 좌측의 제3대대는 남대천의 천연적인 절벽으로 인해 적의 접근이 어려워 지탱하고 있었다.
좌익의 제26연대는 우익의 제1대대가 적 1개연대 규모의 공격을 받아 무력화될 위기에 처했다. 때마침 군단의 전투지경선 조정으로 좌익의 제3대대가 제9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제1대대 좌반부를 인수하라 명령하여 이동 중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이 부대간격을 이용하여 깊숙이 침투함으로서 증원이 불가하였고 이에 제1대대 좌단 제1중대의 전초 2소대는 소대장 황신주 소위외 모두가 포위되어 결사항전하다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리하여 좌익의 제26연대는 첫날 밤 3개 대대가 모두 남대천 남쪽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결국 수도사단은 13일 자정까지 전방 대대가 모두 유린되고 14일 새벽에는 전방대대의 OP가 공격을 받음으로서 주저항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1연대지휘소 피습]
사단장(최창언 준장)은 제1연대장(최세인대령)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고 적의 주고이 직목동-이천동-간진현 방향으로 판단하고 사단 역습을 위해 예비인 제1기갑연대장(육근수대령)에게 1개 대대는 이천동 부근으로 출동시켜 제1연대를 지원하고 나머지 1개 대대는 제26연대를 지언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하고 부사단장 임익순대령을 제1연대 지휘소로 보내어 역습방안을 조정하도록 하였다.
기갑연대장은 제2대대를 제궁동-방동-북정령을 경유 이천동으로 오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먼저 제1연대 지휘소에 도착하여, 제1연대장은 정면 역습을 기갑연대자은 우측방에 역습을 주장하여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제2대대가 도착하자 우측방에서 역습을 하기의해 제6사단 지역인 월봉리 쪽으로 진출시켰다.
[3인 3색의 작전 방향, 적은 이미 연대 지휘소를 포위했다] [기갑연대장, 포병대대장 전사, 부사단장 포로]
이때 바로 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도착하여 연대장 의견을 듣고 다시 정면으로 역습하는 안이 결정되어 부대를 되돌려 이천동 방뱡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역습부대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중공군이 연대 지휘소를 포위하여 기습을 감행하여 연대 지휘소와 제10포병대대 지휘소가 숙밭이 되어버렸다. 부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포병대대장과 작전장교가 전사하였다.
이순간 기갑연대장(육근수대령)도 먼저 도착한 기갑중대의 대오를 수습하는 한편 늦게 도착한 제2대대장으로 하여금 제5.6중대를 지휘하여 포위망을 탈출하던 중에 전사하였다.
제2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포위망을 벗어나 우측 제6사단지역 462고지에서 부대를 수습하였다.
사단장은 제1연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나머지 에비인 기갑연대 제1대대와 배속받는 제59전차중대를 14일 02:00시에 제26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좌익 제26연대가 상황을 가장보고함에 원인도 있고 제1연대는 지휘통신이 마비되어 제대로 현장상황을 알지못하는 가운데 발생했다.
14일 04:00에 상황이 잘못된 것을파악한 사단장은 기갑 제1대대를 제1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을 바꾸어, 제1대대는 117A도로를 타고 06:00시에 간진현에 도착하였다. 여기사 대대장은 제1연대의 피습상화응ㄹ 파악하고 북정령 북족에 부대배치를 하고 찰수부대를 엄호하였다. 이때 제1연대와 기갑연대는 승암고개 부근으로 집결하여 재편성에 들어가고제26연대는 큰 손실없이 철수하여 방동 남쪽에서 재편성 하였다.
[돌파 저지]
수도사단장은 기갑연대 제1대대(윤흥정 중령)가 다행스럽게 북정령에서 저지선을 형성하고 철수부대를 엄호할 때에 14일 06:00시에 미 제9군단장이 지휘소에 도착하자 1개 연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단장이 예비인 미 제3사단의 제15연대(배속, 그리스대대)를 지원하여 12:00부로 북정령의 수도사단 방어선을 인수받도록 하였다.
14일, 10:00시경에는 미 제8군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사단지휘소에 도착하여 적의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사단은 이때까지 수습된 제26연대와 제1연대(기갑연대, 하사관교육대, 제59전차중대)로, 제1연대는 117A도로 도로 북쪽 능선의 우반부를 공격하고 제26연대는 좌반부를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으로 원위치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공격으로 적의 진출을지연시켜 미 제15연대의 투입을 보장하였고 철수부대 일부도 구출하였다.
15일, 사단은 다시 12:30분에 양개 연대와 한.미군의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하여 15:00경 117A도로 북쪽 능선을 점령하였다. 이 시간에 미 제15연대는 도로 남쪽능선에 저지진지를 구축하였으며 바로 중공군의 역습이 진행되면서 수도사단은 미 제3사단 후방으로 철수한 후에 일동으로 내려와 재편성하게 된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참전용사 전00님(기갑연대 제2대대)
나는 연대장의 죽음을 지켜보며 살아야 하기에 웅덩이에 엎드렸다. 죽어가는 전우들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흐르는 것은 빗물이 아닌 빨간 피가 전 몸에 엉켜 붙었다.
나. 금성돌출부 우견부 전투(제3사단)
교암산 *770 지형능선 수도고지
제8사 제3사 여호고개 747 *572
북한강
*585 용호동
송동리
*485 관망산
여문리 22연 23연 *529 북한강
연대CP/박격포 금성천 23연 35연 36연
3사 5사 *324 *462 *629
금성천 북한강
집실리 제22연대지휘소 양지촌
*551 등대리
금성돌출부 우견부는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제3사단은 지형능선 좌측으로부터 등대리까지 금성천 북쪽을 방어하였고, 제5사단은 그 우측 양지촌으로부터 낡은터-후동-748고지까지 북한강 서안과 북한강 동안에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제3사단의 주저항선 위기]
중궁군 제60군은 이미 '53. 6. 25~7. 3일까지 관망산을 점령한바 있으며, 그후에도 적의 정찰활동은 우전방 23연대지역에 집중되었다. 중공군은 '53. 7. 13일 21 : 00시에 집중포격을 시작으로송동리-용호동 일대에서 적과 교전이 벌어졌다. 제23연대장은 적의 주공이 여호고개에서 별우지구로 이어지는 제1대대 지역에 지향되리라 판단하고 예비인 제2대대를 제1대대 후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예상과 달리 좌측 제22연대를 2개 대대로 공격하였다. 적은 이 당시에 제23연대 지역은1개 중대만을 투입하여 견제 공격을 하고 제22연대 우전방을 돌파하려 하고, 일부 부대를 우인접 제5사단 좌측방 금성천 돌출부로 침투시켜 제23연대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하려 기도하였다.
결국 7. 13일 자정경에 우전방 제22연대는 좌전방 제2대대가 고립돤 채 진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우전방 제3대대는 돌파되었고 역습지원차 올라가던 제1대대도 도중에 적의 기습으로 분산되면서 통신두절로 포병지원도 받지못한 상황에서 연대 지휘소인 집실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고 지형능선의 제2대대는 고립. 포위된 채로 적과 혈투를 벌이게 된다.
한편 제23연대 지역은 좌인접 제5사단 지역으로 침투한 적의 일부가 금성천을 324고지에서 등대리로 도하하여 전방중대를 지원중인 4.2" 박격포 진지를 유린하고 연대지휘소를 기습하여 연대후방을 혼란에 빠드렸다. 동시에 전방 주저항선에 적이 압력을 가중하여 무너지고 있었다. 적의 주공은 용호동-송실리 방향이 아니고 용호동-등대리쪽, 제3대대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었으며 대대는 네이팜탄을 폭파시키며 전차소대의 지원하에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사단역습실패]
사단장(임선하소장)은 13일 22:00시에 상황을 분석결과 적의 주공 방향이 좌측 전방에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 이에 대한 역습 준비로 사단 예비대에 출동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14일 02:00시에 사단은 돌파된 좌측 485고지를 회복하기 위해 제18연대(박경원 대령)는 제1대대를 551고지에 배치하여 제2전선을 유지하고 제2.3대대를 551고지 좌우로 기동시켜 여문리 방향으로 진출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551고지 우측으로 기동하는 제3대대는 이미 적이 진출하여 격전이 벌어지고 있어 연대장은 역습보다 침투한 적을 격퇴하자 건의했으나 사단장은 485고지 탈환을 명하여 제3대대는 적과의 접촉을 단절하며 우회하여 07:00시경 여문리에서 제2대대와 합류하여 485고지로 공격을 개시할 무렵 철수하고 있는 제22연대 병력과 뒤섞이고 적의 포격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때 적의 주력으로 판단되는 대부대가 485고지 동쪽을 돌아 남하하고 있음이 목격되었고 후방 제1대대가 적과 교전하고 있어 연댁 포위 직전에 있음을 사단에 보고 후역습을 중단하고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와같이 중공군 3개 사단으로부터공격을 받아 14일 새벽 좌전방이 돌파되고 우전방은 주저항선을 지탱하고 있으나 우후방으로 돌파 및 침투한 적에 후방이 위협받는 상황에 역습마저 실패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이 깊숙히 침투하여 제18연대는 제2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려 했으나 적이 제8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을 이용하여 적 2개 대대규모가 남하하고, 우측의 제23연대는 적 2개 연대의 공격으로 부대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병력이 무작정 금성천을 건너기 시작하여 금성천 북안에 구축하려던 제2방어선도 붕괴되었다.
이 무렵 사단은 군단으로부터 14일 14:00시까지 금성천 남안 여내곡 부근에 신방어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제18연대는 신진지를 점령하고 , 제22.23연대는 신진지 남쪽에서 부대를 수습하려 했으나 적의 포격으로 여의치 못했다.
한편 좌전방에 고립된 제222연대 제2대대는 14일 오후까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진지를 고수하다 실탄이 바닥나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14:45분 포위망 돌파를 시작하여 좌측 제8사단 지역으로 우회하여 적진을 탈출해 우군 전선으로 복귀했다.
[금성돌출부 우견부, 제5사단의 금성천.북한강 합류지점 철수]
'53. 7. 13일 중공군 제60군 주력이 제3사단을 공격하는 동안 일부 부대는 금성천과 북한강 합류지점으로 침투히여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후방에 위치한 지휘소와 지원부대들을 포위하여 제3사단을 포위하려 하였다.
이 포위기동의 성공으로 제3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7월 14일 00:45분에 금성천 동안 돌출지역에 배치된 국군 제5사단 제35연대 제1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제35-1대대는 324고지와 462에 1개 중대씩 배치하고, 배속된 1개 중대는 북한강 남안에, 그 직후방 689고지에 예비로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사단은 적이 도섭이 가능한 금성천과 북한강 합류지점을 경유하여 백암산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 사단장(김종갑 소장)은 사단포병과 미 지원포병을 이곳으로 집중하여 적의 공격을 파쇄하려 했다.
적은 14일 02:00시에 도하를 개시하였다. 이에 제35연대장은 에비 제3대대(-1)를 후방 780-낡은 터로 추진하였으며 14일 08:00에 제1대대는 462고지를 피탈당하고 양지촌 남쪽으로 밀려났다.
교암산 *770 지형능선 수도고지
제8사 제3사 여호고개 747 *572
북한강
*585 용호동
송동리
*485 관망산
여문리 22연 23연 *529 북한강
연대CP/박격포 금성천 23연 35연 36연
3사 5사 *324 *462 *629
금성천 북한강
집실리 제22연대지휘소 양지촌
*551 등대리
외성동 수곳지 *780 황병동
내성동 후동 북한강 광석교
장제동 *538
*백암산 1179 *1051 *876 제35연 북한강 제36연
수동령
이에 사단장은 적이 백암산 방향으로 남진할 것을 우려하여 주파령 남쪽 어두운 골에 위치한 예비인 제27연대(-)를 14일 08:00시에 파수골로 이동시키고 제36연대에 배속된 수색중대를 백암산 동측으로 전환하여 적의 진출에 대비하였다.
결과적으로 금성돌출부 우견부는 14일 08:00시경 제3사단은 금성천 남안으로 밀리고, 제5사단 제35연대의 금성천과 북한강 합류지점 남안인 324-462고지가 피탈됨으로서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다. 금성돌출부 선단지역 전투
중공군은 금성돌출부 양견부를 돌파하여 선단지역 부대의 측후방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선단지역은 금성 남쪽과 교암산-지형능선-612고지를 연하는 전선으로 이중 회고개 동쪽에서 교암산까지는 제6사단이, 그 동쪽으로부터 지형능선 분기점 690고지를 지나 612고지까지는 제8사단이 방어하였다.
적은 이 선단지역에 4개 사단 이상의 전투력으로 밀어붙였고, 국군 양개 사단은 이들 고지를 상실하고 양인접 사단의 전선 붕괴로 금성천 이남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6사단의 교암산 부근 전투]
제6사단(백인엽 소장)은 제7연대가 회고개-사천리를, 제19연대가 사천리-교암산을 방어하고 제2연대를 예비로 보유하고 있다가 7월들어 적의 활동이 빈번해지자 예비인 제2연대에서 3대대를 제19연대로 배속하여 교암산지역을 방어하도록 한다.
금성천 금성 117번도로
117번도로
회고개 *407 17번도로
*418
금성천
*374 *395 능동 *394
*369
금성천 *442
*하고개 사천리 *교암산 770
제1연 제11-9연 제7연대 제7연 제19연 제19연 제2연
가학리 금성천
상산리
* 월봉산
죽대리 능동 금성천
*729
큰들 제6 금성천 제8사
배선골(어선동) 노동리
진현리 삼현
'53. 7월 12일, 사단은 적의 공격이 명확해지자 제2연대 전체를 교암지역에 배치하고, 13일 밤에 군단 예로 들어온 제11사단 제9연대를 금성 남쪽 전선에 투입하였다. 따라서 사단은 예비가 없이 4개 연대 전방으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교암산 전방 전초에서 9시간 지연]
적은 '53. 7. 13일 21:00시에 교암산 전초지역에 공격을 시작으로 전 전선에 무자비한 포격과 동시에 전면 공격을 개시하엿다. 당시 교암산 지역은 제2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으며 3개 중대로 전초진지를 운용하고 있었다. 결국 교암산 전방 전초인 제6중대는 당일 밤에 6차례의 적의 공격을 맞아 분전하여 중대장 김교수외 모두가 전사하고 10명만이 14일 아침에 탈출하였다. 제5중대도 무전기의 고장으로 아무런 지원없이 혈전을 벌이다 새벽에 일부가 탈출해 나왔다.
사단 전초진지를 돌파한 적은 사단 좌단 하고개, 중앙 능동, 우단 교암산 방향으로 주저항선을 공격하여 먼저 17번도로를 끼고 있는 제19연대가 먼저 돌파되었다. 이에 제19연대는 적의 인해전술에 농락되어 교암산을 피탈당하고 결국 금성천을 건너 노동리에서 병력을 수습하였으며, 좌단 제11사단 제9연대는 제2대대가 하고개 북방에서 제6-7연대의 주저항선을 인수받아 14일 새벽까지 고수하였으나 적이 수도사단과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하여 월봉산, 죽대리 등후방지역을 강습함으로서 결국 11:00시에 철수하여 좌인접 수도사단과 연계하여 진현리-삼현선에서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제7연대는 전방 대대인 제1대대를 노동리로 철수시키고 연대(-)는 금성천 남쪽의 729고지-배선골-큰골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여 전방부대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로써 제6사단은 14일 오전, 지현리-삼현-배선골-큰골에 저지진지를 편성한 제11-9연대와 제7연대(-)의 엄호하에 금성천을 건너 노동리에서 부대수습에 분주하였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금성돌출부 선단 제8사단의 지형능선 전투]
2연 10연
교암산 770, *765 지형능선 690
제10연 제16연
제6사 제8사 *612
제10연 제16연
금성천 *606 제16연 제22연
상산리 금성천 *585
*535
여문리
금성천 집실리 22연 23연
제8사 제3사
*479
*504
*551
금성천
세현리 *472
별우 금성천 금성천
밤성골
*596
돌출부 선단 좌반부는 제8사단이 방어하였다. 사단장 (송효찬소장)은 제10연대를 교암산 동단 765-지형능선 정점 690고지에, 제16연대를 612고지 일원에 배치하고 제21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53. 7. 13일 22:00시경 사단 정면의 중공군이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했고 사단의 유선이 모두 두절되었다. 지형능선 전바의 제10-10중대 제1소대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하지만 14일 아침 적이 전초간격을 이용하여 후방으로 침투하여 포위가 됨으로써 생존자들은 탈출을 기도해야했고 다른 전초들도 상황은 같았다.
전초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에 우회한 적들의 공격으로 지형능선 690고지가 23:30분에 피탈되었다. 또한 교암산 동단 765고지에 제10연대 관측소도 기습을 받아 연대장 작전주임 등이 부상을 입고 철수하게 되며 '7.14일 01:30분 경에 피탈되었다. 그러나 제10연대는 예비 제2대대로 역습을 실시하여 765고지 등 주 저항선을 모두 회복하였다.
제10연대 우전방 제16연대는 제3대대(수색중대 배속)를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제1대대를 전초로, 제2대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연대는 계속되는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있었으며 일출 후 제8사단 제16연대 상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반면 우인접 국군 제3사단의 제22연대 지역이 무너져 여문리, 집실리가지 적이 출현하고 있는 상황에 연대 예비지역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53. 7.14일 11:00시에 군단으로부터 15:00시까지 금성천 남안으로 내려와 신방어선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이 철수를 개시할 때에 중공군이 제3사단 좌측방을 돌파하여 그 일부가 17번도로를 차단하려 별우지구로 치단고 있는 징후가 포착되고, 적이 집실리에 출현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의 중요 감제고지인 504고지를 점령하여 사단의 철수를 위협하였다.
사단의 철수는 우전방 제16연대 예비의 엄호하에 제10연대가 먼저 철수하고, 다음 사단 예비 제21연대의 엄호하에 제16연대가 철수하였다. 제10연대는 주파리로 향하였고 제16연대는 596고지에 저지진지를 편성하기 위해 밤성골로 집결하였다. 마지막으로 제21연대가 18:00시경 금성천을 도하한 다음 주파령으로 남하하였다.
한편 밤성골에 집결중이던 제16연대는 저녁 식사중 적의 기습을 받아 분산 됨으로써 사방거리로 철수하게 되었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라. 신주저항선 구축
제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은 정확한 상황보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공군 6개 사단이 돌출부 양견부를 돌파하여 깊숙히 침투한 것으로 판단하고 국군 부대가 중공군의 양익 포위에 들어서는 안된다고 판단, 14일 06:00시에 이들 부대들(수도사. 제6.제8.제3.제5)로 하여금 돌출부의 기저선인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여 신방어선을 형성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제2군단장(정일권 중장)은 14일 11:00시에 금성천 남안 신방어선을 형성하도록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금성천
신주저항선
진현리
*633 금성천 북한강
신주저항선
*602 삼현
103번도로
주파리 신주저항선 북한강
*541 신주저항선
미3사 11사 *백암산 1179 *876 제5사 미45사
송동 *삼천봉 살구령 *1051
*적근산1073 백암동
제9사 미3사 제11사 제8사 제5사
*장고봉830 *주파령 645 고둔골
고비운리
*895
*1048 *915 *782
수리봉 가는데
대성산1175 사방거리
그러나 수도사단과 제2군단 예하 부대들이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적의 추격이 계속되어 금성천 남안에서의 신방어선 편성에 실패하였다.
수도사단(최창언 준장)은 미 제3사단 제65연대가 117A번 도로 남쪽 능선에 투입되어 저지선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북쪽 능선의 쟁탈전을 벌이다 철수하였다.
제6사단(백인엽소장)은 배속된 제11-9연대가 진현리-삼현 선에 저지진지를 형성하였을 뿐, 제2. 19연대는 노동리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주파리로 집결중이고, 제7연대는 배선골-큰골에서 전방연대를 엄호하다 전방연대에 휩쓸려 추동을 거쳐 주파리로 철수하였다.
제8사단(송효찬소장)은 주파령을 향하여 철수중에 있었고, 제16연대가 밤골 596고지일대에서 저지진지 점령에 실패하고 분산되어 사방거리 남쪽 부촌리에서 수습할 정도였다.
한편제8사단의 우익 제3사단(임선하소장)도 제18연대만 신진지에진입하고 제22. 23연대가 적의 포격으로 분산되어 소성동-흑운토령을 넘어 주파리 동쪽 동막동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제5사단(김종갑소장)은 북한강 좌익이 돌파되어 103번도로를 타고 백암산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제2군단은 14일 11:00시를 기해 군단장 명으로 금성천으로 철수했으나 중공군의 근접 추격과 철수시의 혼란으로 삼현-금성천-북한강에 연하는 신방어선, 아이슬랜드선 형성에 실패하고, 중공군이 게속추격하여 특히 제3사단을 후속한 적이 내성동리와 흑운토령을 넘어 백암산으로 목표로 추격해 왔다.
이에 제2군단은 금성천 방어를 포기하고 지현리-633-주파리-백암산-수백암산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엔군 사령관은 일본에있는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급히 한국으로 공수하여 국군 ㅈ제9사단의 일부를 인수시켜 수도사단의 좌익을 강화하는 한편, 15일 12:00시부로 미 제3사단으로 하여금 수도사단지역을 인수시키고, 수도사단은 군단예비로 전환되었다.
또한 군예비인 제11사단을 제2군단에 배속하여 제6사단과 교대시키고,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7사단을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하였으며, 제8사단과 제5사단으로 제3사단 지역을 분담 방어토록 하여 전방전선을 정비하고 제6사단과 제3사단을 예비로 전환시켰다.
이에 따라 제2군단은 제11사단이 진현리-주파리, 제8사단이 주파리-백암산 서던에, 제5사단이 백암산-1051-876고지에서 적을 저지중이었다.
그러나 제5사단이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53. 7. 15일 18:20분에 백암산을 피탈당하여 백암산과 소백암산선에서 물러나 백암산남쪽 수동령에서-고둔골-수상리 남족 고지군에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결과적으로 제2군단은 '53. 7. 15일 저녁까지 와이오밍선(삼천봉-적근산-주파령-1048-782-재안산 북단 가는대)북쪽의 진현리-삼현-주파리-수동령-고둔골-고비운리-전석-748고지를 잇는 선에서 새로운 저항선을 형성하였다.
마. 제2군단의 반격
*수도고지
평강 회고개 *690지형능선 북한강
*교암산770
*오성산1062 월봉리 개야리 금성천 송실리 *572 이청동 *482월봉산 피의고지 여문리 *529 북한강
남대천 *462 *602삼현 금성천 *462
*819 등대리
흑운토령* *662 *832
주파리
*적근산 *백암산 *소백암산 1073 1178 1048
주파령
'53. 7. 15일 국군 제2군단이 와이오밍선 전방의 신방어선에서 적을 저지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16일에 반격적전으로 금성천을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중공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점령한 진지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하며 사상자처리 등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이에 제2군단장(정일권 중장)은 적을 저지 중에 있는 3개 사단을 반격으로 이전시키기로 결심하고 공격명령을 7월 15일 12:00시에 하달하였다.
(1) 국군 제11사단은 진현리 633고지-삼현리 602고지선을 점령하라
사단은 제9연대가 제6사단에 배속되어 철수할 때 진현리 633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우전방 제13연대로 삼현 602고지를 점령하고 나아가 별우지역의 425고지, 406고지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제20연대(-)는 예비로 후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우익의 제13연대는 7월 15일 16:00시에 공격을 개시, 제2대대가 삼현 602고지 방향으로진격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이어서 16일 06:00시에 제3대대가 700고지를경유하여 602고지 동측고지를 공격하고 , 이날 제2대대가 다시 602고지를 공격하여 17일 04:00시에 점령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425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좌익의 제9연대는 사단에비 1개 대대를 배속받아 진현리633고지 서측 462고지를 점령하여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그러나 제13연대는 18일 02:00시에 중공군의 역습으로 602고지가 피탈되어 제13연대는 사단으로부터 1개 대대(제20연대 3대대)를 배속받아 19일까지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53. 7. 19일 제11사단은 제13연대를 예비로 전환하고 제20연대로 602고지를 공격하엿다. 미 제5공군의 항공지원과 사단포병 및 미 제461중박격포 대대의 화력지원 속에 2개 대대 병진으로, 무려 5차례의 돌격으로 602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제1대대 1중대는 이 고지를 점령했을 때에 중대장을 포함하여 8명뿐이었고, 제3대대도 42명의 전사자와 249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러나 다시 7월 20일 03:25분에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어 회복하지 못했고, 제9연대가 602고지 공격을 위해 점령했던 602고지 서측의 552고지도 함께 빼앗겨 회복하지 못했다.
(2) 국군 제8사단은 흑운토령(851)을 공격하여 탈환하고 금성천을 확보하라
흑운토령은 851고지로 전방 모든 고지를 감제하는 중요지형으로 사단장(송요찬소장)은 동막골에서 수습된 제21연대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연대는 제2대대로 흑운토령을, 제3대대로 고지 서측 652고를, 제1대대로 17번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406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53. 7. 15일 19: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서측 406고지는 점령하고, 16일 다시 주간공격으로 흑운토령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동측의 감제고지를 적이 점령하고 있어 사단은 제16연대를 투입하여 백암산 서측의 1118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금성천 남안의 고지를 확보하여 흑운토령을 고립시켜 놓고, 제21연대가 흑운토령 북쪽의 569-625고지를 점령하여 배후를 차단한 가운데 제16연대가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사단은 7.18~19일 금성천 남안으로 진출하여 거리실~성동리까지 금성천을 방어하였다.
(3)제5사단은 백암산을 탈환하고 금성천을 확보하라
반격작전 개시전에 제5사단은 백암산-소백암산선을 상실하고 백암산 후방 수동령-고둔골-748-수상리에서 적을 저지하고, 제36연대는 북한강 동안을 방어중이었다.
새로 부임한 사단장(장도영소장)은 2개연대로 백암산(11179)-소백암산(1051)-876고지선을 회복하고, 이어서 좌익의 제27연대는 백암산에서 819-689고지로 뻗어내린 능선을 확보하고, 우익의 제35연대는 876고지에서 833-780고지로 뻗어내린 능선을 확보하여 금성천과 북한강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53. 7. 16일 06:00시에 제27연대가 백암산, 제35연대가 소백암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때 우익의 제35연대가 876고지에서 측방공격으로 소백암산을 점령했으나 모두 적의 역습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군단장은 좌인접 제8사단에 배속되어 백암산 서측 1118고지를 공격중이던 제6사단 제7연대를 제5사단으로 배속전환시켰다. 이어 17일 제6-7연대와 제5-27연대가 백암산을 제35연대가 소백암산과 876고지를 공격하게 하였다.을 우회하여 그 북방의 고지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53. 7. 18일 제6-7연대가 백암산 사측 1118고지로, 제27연대는 백암산을, 제35연대는 소백암산으로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결국 제6-7연대가 118고지를 탈환하고, 제27연대는 항공기와 전차의 지원하에 18일 제2대대가 백암산을 탈환하게 되고, 제1대대는 계속 진격하여 북한강변의 662,642고지를 점령하고 제7연대도 금성천 변의 819고지를 탈환하게 된다. 이어서 제35연대는 소백암산도 탈환하여 사단은 금성천-북한강변을 확보하게 되었다.
(바) 전선정리
금성천 북한강
@금성
@오성산 @봉화산 @교암산
*949 *어은산
남대천 *633
@김화 *적근산 *백암산
미3 국11 국7 국7 국8 국8 국6 국6 미45
*주파령 가는대 *백석산
@와수리 @사방거리 *재안산
@다목리
국군 제2군단은 7월 19일, 반격작전을 실시한지 3일만에 금성천을 확보하고 반격목표를 달성하였다. 당시 군단장은 금성천 북안으로 공격을 하려했으나 휴전협정에 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하여 미 네8군사령관이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전선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7월 20일 군단 예비 제7사단을 제11사단과 제8사단 상디 17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여 적의 주접근로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군단 예비 제6사단으로 하여금 우전방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시켜 군단 우익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제6사단은 금성천 남안 양지촌까지의 작전책임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제6사단은 양지촌에서 북한강 서안의 방어에 주력하였다.
이에 다라 제3사단은 사방거리에, 제5사단은 화천에 예비로 있다 제3사단은제8군의 예비가 되었다.
이 금성천 돌출부의 전투는 종심상으로는 4km에 불과하지만 이 ''53. 7. 13~18까지의 전투에서 아군은 14,373명(전사 2,689, 부상 7,548, 실종 4,136명)의 손실을 입었고, 중공군은 확인돤 손실 27,412(사살 27,216, 포로 196명)명과 추정살상 약 38,700명을 합하여 도합 66,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중공군의 항미원조사에는 이 전투간 33,253명이 살상되었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