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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멸절하였는가
시편 제 12장의 연구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자가 인자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저희가 각각 이웃을 향하여 헛된 것을 말하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맘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큰 것을 말하는 혀를 끊어버리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혀로 이기겠노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누가 우리를 주관하리오“하는도다.
여호와 가라사대 “궁핍한 자의 빼앗김을 당함과 가난한 자의 탄식함을 인하여
내가 이제는 일어날 것이요
내가 저를 그 사모하는 평안에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은 순전한 말씀이라
땅 풀무에 단련한 은 같으니, 곧 일곱 번 단련한 것이로다.
여호와여 당신이 저희를 지키시고
이 세대에서 영영토록 보호하시리이다.
인자 중에 비루한 것이 높아질 때에
악한 자가 두루 다니는도다.
이 시는 도덕적 타락이 극도에 달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한 기도다. 전장(全章)을 3단으로 볼 수 있으니 시인은 제1단에서 무신(無信)과 위선의 세대 중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빌고, 그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절(滅絶)시키기를 구한다(1〜4절). 제2단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몸소 대답하여 불의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자를 도울 것을 말씀하신다(5절). 그리하여 제3단에서 시인은 위로를 얻은 다음 하나님을 찬송한다(6〜8절).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구원하옵소서” 하는 말은 시인의 가슴에서, 전혼(全魂)에서 쥐어 짜이어서 폭발되듯이 나오는 호소의 부르짖음이다. 그는 그 부르짖음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한다. 자기네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향하여 타는 듯한 애소(哀訴)를 하는 그이 가슴 안에는 큰 근심 비통이 있다. 그것이 1절 하반에 나타난 것이다. 즉 인자 중에서(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혹은 교회에서) 경건한 자 신실한 자가 끊어져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행이요 비통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민족에나 경건한 자 신실한 자가 적어지고 불의한 자가 늘어가는 것이 그 멸망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가 줄어지고 진실무위(眞實無爲)한 인물이 찾아볼 수 없이 된 것은 과연 통탄불기(痛嘆不己)할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지체(肢體)가 합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이로되, 그 모든 지체에 다 각각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몸속에 영혼이 있어 비로소 지정의(知情意)의 작용이 있고 생활기능이 있는 것과 같이, 한 국가사회 안에 허다한 사람이 있으되, 그 모든 사람이 다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요, 그중에 소수의 의인이 있어서 그 사회, 그 문화의 부패를 방지하고 사멸을 면케 하고 생장발전이 있게 한다. 의인은 실로 인류사회의 귀한 혼이다. 그 혼의 광휘가 성하면 성할수록 그 사회는 건전한 발달을 하고, 그 혼의 세력이 감쇠(減衰)하면 하는 것을 따라 그 사회는 퇴패(頺敗)하고, 그 문화는 타락한다. 고로 경건 진실한 인물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날은 그 사회 그 민족의 사멸의 일(日)이다. 고금 모든 민족 중에 이 사실에 대하여 가장 진지(眞摯)하고 민감(敏感)이였던 자는 이스라엘이었다. 구약 중에는 이러한 기록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독자는 몸소 다음의 성경구절을 찾아 참고하기를 바란다. 「호세아」 제4장 1절, 「미가」 제7장 2절, 「예레미아」 제7장 28절, 제5장 1절, 「이사야」 제57장 1절, 제59장 14절, 그리고 본지 전호 김교신(金敎臣)형의 영원의 긍정을 다시 보아 이스라엘 민족이 ‘진실’이란 것을 얼마나 중히 여기었는가를 알기를 바란다.
저희가 각각 이웃을 향하여 헛된 것을 말하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맘으로 말하는도다.
신실되고 경건한 자가 끊어진 반면에 일어나는 현상은 위선과 거짓말이 일반으로 유행하는 것이었다. 고로 시인은 ‘저희’라는 말로 일반 사회의 사람 혹은 전 단체의 사람을 가리켰다. 그리고 “각각 이웃을 향하여”라는 말을 보면 그 헛된 말, 거짓말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하는 바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내적으로는 썩은 고기같이 부패하고, 외적으로는 장식한 무덤같이 평화한 사회에서는 진실한 우의(友誼)와 희생적 화합은 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하는 말과 행하는 일은 가유(訶諛)와 교사(巧詐)와 간사(奸詐)한 사교(社交), 교활한 수단, 이중인격, 약속의 배기(背棄)뿐이다.
여호와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큰 것을 말하는 혀를 끊어버리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혀로 이기겠노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누가 우리를 주관하리오”하는 도다.
시인의 열정은 구원을 구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그는 거세(擧世)의 도도한 허위, 위선을 미워하고 자기 동족을 위하여 분개하기를 심히 하는 고로 다시금 나아가 그 악인, 불의자의 멸절을 빈다. 입을 조심하고 혀를 금하라는 것은 동양의 도덕훈(道德訓)에도 있는 것이지만은 과연 입술과 혀는 무서운 물건이다. 그는 제한을 모른다. 더구나 이 타락한 세대에서는 심하였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혀에다 무한의 자유를 주고 마음대로 간교를 말하고 대언장어(大言壯語)를 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혀로 이기겠다”한다. “혀로 이기리라”는 말은 혹은 “혀에 권능을 주리라”라고 번역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누가 우리의 말을 금하거나 제지하거나 할까. 누가 우리를 주관하고 다스릴까.
우리는 우리의 혀가 있고 입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 우리 위에 주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를 볼 때에 우리에게 생각되는 것은 현금 이 세대다. 이론 만능이라고 해서 된 것 못된 것들 저마다 절대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부르짖는다. 마치 독한 물건과 더러운 냄새 나는 것을 임의로 가상(街上) 위에 내어던짐 같다. 개인에 있어서나 단체에 있어서나 타락의 징조는 위선, 쓸데없는 변설이 늘어가는 데서 보인다. 그러나 진실한 자의 눈으로 볼 때 그런 불신, 불건(不虔)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고로 하나님을 향하여 그를 멸하옵소서 하고 구한다. 만일 이것을 도덕 정도의 낮은 것이라고 비난하면 이는 시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말이요, 불의에 대한 의분을 가져보지 못한 자다. 의에 대한 사모가 간절하면 할수록 불의에 향하여는 강한 반발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호와 가라사대 “궁핍한 자의 빼앗김을 당함과 가난한 자의 탄식함을 인하여 내가 이제는 일어날 것이요 내가 저를 그 사모하는 평안에 두리라.”
시인의 이 뜨겁고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여호와 신은 응답하셨다. 시인은 이것을 직접 신의 입에서 들었다. 이때에 시인은 단순한 시인만이 아니요 선지자다. 하나님에 호소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듣는다. 고로 이때에 시는 예언으로 표시된다. 하나님은 시인의 입을 빌어 위선자와 불의한 자들로 인하여 곤란당하는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몸소 일어날 것을 말하였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불의가 가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첫째 결과는 불행한 자의 수난이다. 궁핍한 자 간난한 자 그들은 과연 가련한 자들이다. 사회의 하층에 있어서 혜택을 입는 데는 가장 떨어지고, 불의로 인하여 희생이 되는 데는 제 일위다.
그런 것을 정의의 하나님, 공평의 하나님 여호와는 묵과하지 않는다. 그는 물론 많이 참고 기다린다. 그러나 불의를 간과하는 이방신은 아니다. 고로 시인의 애소(哀訴)에 응대하여 “이제는 내가 일어나리라”한다. ‘일어난다’ 함은 처치(處置)를 취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길이 참음으로써 기다리고 견디어 왔으나 더 유예(猶豫)할 수 없는 때에 왔다.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이 불의한 자로 인하여 곤란함을 보고 노(怒)를 발하여 일어나는 날이다. 아 하나님이 노하시는 날 그날이 얼마나 두려운가. 그날 전 인류는 전율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또 우리는 그런 하나님임으로 인하여서 정의를 지키고 불의를 간과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는 하나님임으로 인하여서 그를 믿고 의지한다. 과연 그는 자기에 대한 의무를 지키지 않는 진실하지 않은 자에겐 무서운 하나님이요, 자기에게 간구하고 의지하여 충성한 자에게는 “사모하는 평안에 두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전한 말씀이라
땅 풀무에 단련한 은 같으니, 곧 일곱 번 단련한 것이로다.
발호(跋扈)하는 불의를 보고 시인은 맘에 번뇌하고 통탄하였다. 사랑하는 동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슬퍼하였다. 의인의 씨가 인자 중에서 끊어져 버리고 세상이 불의와 사악의 시랑배(豺狼輩)의 짓밟는 바가 되고 말 것일까고 절망하려 하였다. 하나님은 영원히 백성을 버리었는가 원망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탄식은 여호와 보좌에 올라갔고, 그의 부르짖음은 전능하신 자의 귀에 청취되었다. 그는 이제 여호와 자신의 입에서 직접 구원의 약속을 들었다. 고로 이제 그의 입은 찬미로 넘친다. 이제 의심도 없어지고 확신과 희망이 빛난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항상 공의롭고 진실하였음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말씀의 순결함을 형용하여 일곱 번 단련한 은이라 하였다.
여호와여 당신이 저희를 지키시고
이 세대에서 영영토록 보호하시리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 앞에 서는 것은 확신의 지팡이와 희망의 빛이다. 고로 시인은 현재의 타락한 세상을 보면서도, 불의 허위가 우세한 것을 보면서도 다시는 더 낙담하지 않고 비탄하지 않는다. 그의 눈앞에는 구원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그 이유는 진실의 신 여호와가 몸소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인제 노래한다. 전능의 신 당신이 저희를 지키고 보호하시리라고. “이 세대”란 것은 이 불의의 발호(跋扈)하는 세대란 말이다. 그중에서도 영원토록 보호하실 것임을 믿는다.
인자 중에 비루한 것이 높아질 때에
악한 자가 두루 다니는도다.
비루한 것이 높아지는 때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시대다. 도덕 표준이 저하한 시대다. 양심의 권위가 박약해진 시대다. 고로 때는 악인이 기탄없이 두려움도 없이 대보활보로 사회에 횡행한다. 악을 행하고 부끄러워도 않고 도리어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로 안다. 일반 사회도 이를 인허(認許)한다. 그런 시대에 있어서는 의인이 존재할 수가 없다. 시인은 이제, 이 의인이 아주 절종되어버린 듯한 무서운 현실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비탄의 반복은 아니다. 도리어 그 현실을 눈에 보면서 용기를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의 약속의 순전함을 믿는다. 고로 7절과 8절은 의미로 보아서는 바꾸어놓는 것이 무방하다(훕펠트시-네). 그렇지 않으면 푸릭스의 역(譯)대로 8절 첫머리에 ‘비록’이라는 말을 넣는 것이 마땅하다. 즉 이 악이 권세를 가지는 이 세대에서도 신실한 여호와 신은 의인을 보호하시리라는 확신의 위로다.
시는 수천 년 전의 것이요 특정한 한 민족 이스라엘의 사회에 관한 것이다. 마는「시편」이 전체로 그런 것같이 또는 성경의 기사가 다 그런 것같이 이 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감격과 공명을 일으키는 시다. 사회나 문화의 그런 상태가 있는 한까지 이 시는 언제든지 필요하다. 더구나 우리 조선에 있어서 우리가 제일로 부를 노래는 이 시다. 이 시를 조선에 보내면서 우리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하나 이것이 현실인 고로 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금 더 비통한 것은 이 기도의 시를 곡음(哭吟)하여야 할 형편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도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음이다. 이스라엘의 시인은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 중에서 끊어져버리고 만 줄로 알고 통곡 애호하였으나, 통곡하는 저 자신이 있는 때까지는 오히려 의인의 씨가 있었다. 정말 슬프고 정말 두려운 것은 “의인이 망하여도 맘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자가 세상을 떠나도 의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 화를 피함인 줄을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사야」, 제57장 1절)
병고를 느끼는 때까지는 오히려 소망이 있으나 병이 있어도 병고를 깨닫지 못하는 몸은 생명이 이미 떠나간 사해(死骸)에 불과하다. 악 중에 가장 두려운 악은 스스로 악임을 의식치 못하는 악이다. 사회의 암흑면에 숨어서 눈을 숨겨가며 하는 위선은 아직도 용서할 점이 있으나, 위선을 하며 위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알고 자타가 공허(公許)하여가며 하는 세대는 멸망의 길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오직 한 사람이라도 있어서 그 불의를 통리(痛詈)하고 질책해주었으면 한다. 이제 삼천리 안에는 허위뿐 아닌가. 이 백성은 거짓말하는 백성이 되어 버리고 말지 않았나. 아첨하는 백성이 되어버리고 말지 않았나. 귀를 돌리어 사회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왈 운동, 왈 획책, 왈 수단, 왈 사교 등등이 아닌가. 관리(官吏)는 나라의 것을 투식(偸食)하고 백성은 사회의 것을 도적하고 실업가는 투기가요 교육자는 어르는 엿장수요 종교가는 속이는 마술사가 아닌가. 어디 진실을 위하여 희생되었다는 일개의 소식을 듣는 것이 있나. 2천만을 들어 황해에 던지려면 말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여기 의인이 완전한 의인이 못 나더라도 적어도 의의 간구자가 나여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한강 가에 한 사람의 세례 요한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성 중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 “독사의 종류들아” 하고 의의 철편(鐵鞭)을 휘날리기다. 아 아 누가 우리에게도 있어서 백두산정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시 제12편을 올리고 “내가 이제는 일어날 것이요 저를 그 사모하는 평안에 두리라”하는 가신(嘉信)을 받아가지고 기쁨의 눈물로 하산할 것인가.
성서조선 1930. 11월, 22호
저작집30; 20-27
전집20; 11-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