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다 / 이지선
교장선생님께 관외 내신을 쓰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요, 갈 수만 있다면 집 가까운 곳으로 가야지요.”라며 웃으신다. 덧붙이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선생님, 3월보다 얼굴이 많이 삭은 것 같아요.” 이런 말은 설령 진짜여도 안 하시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런데 교실로 돌아와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많이 변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교장선생님 말씀이 맞다. 흰머리도 몇 가닥 나고, 통통했던 볼살도 쪽 내렸다.
‘어떤 곳으로 발령이 나도 이의 제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도 마냥 좋았다. 원하던 ‘수석교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1~2년 운전하는 수고로움을 견디면 목포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호기롭게 관사도 필요 없으니 다른 분 드리라고 양보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싫지도 좋지도 않았던 해남에서 다시는 근무하고 싶지 않다.
12월이 되니 엉성하게 매달아 놓은 첫 단추가 곧 떨어질 것 같다. 아이들과 하는 그림책 수업, 수업 외의 기타 잡무, 사적이거나 공적인 모임 정리, 인간관계들이 삐그덕 거리는 느낌이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말이 있다. “이 또한 지나 가리”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데 어느새 일 년이 홀딱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나를 발령내준 교육청에서는 해남에 신규교사들이 많으니 수석교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신규교사들의 수업 기술은 놀랍다. 수업안은 모범답안을 쓰듯 세세히 작성하고, 수업은 몸 속에 시계가 들어있는 듯 시간에 맞추어 물 흐르듯 유려하게 한다. 업무는 컴퓨터의 놀라운 기술들을 사용해 로봇이 일을 처리하듯 능숙하게 처리한다. 인간관계 역시 맺고 끊음이 정확해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없도록 깔끔하다. 게다가 자신감과 자존감은 너무 높아 오히려 신규수석교사인 내가 쩔쩔맬 정도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출, 퇴근 농로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목포에서 해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표면이 고르지 않아 천천히 갈 수밖에 없다. 빠르게 가면 볼 수 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봄에는 가늘고 긴 다리로 논 속을 유유히 걸으며 먹이를 찾는 크고 흰 새들을 볼 수 있다. 여름이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벼를 보며 괜히 내 논도 아닌데 뿌듯해할 수 있다. 하룻밤 새 얼마나 자라는지 자로 재 보고 싶어질 정도다. 가을, 논 양옆 개울에서 물안개가 솟아오르면 도로시처럼 오즈의 나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지금 겨울의 그 논에는 커다란 흰색 마시멜로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이 아름다운 길이 없었다면 나는 더 많이 삭았을 것이다. 얼굴보다는 마음이.
부디 다른 곳, 다른 학교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그 또한 지나가더라”며 말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첫댓글 그런다고 삭다니요? 이쁘기만 하더구만. 이 수석님 그곳에서 뿌리내리기가 어려웠나 보네요. 마음 고생 많았을 텐데 도움 되질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원하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네요.
아휴, 고생이 많았나 보네요. 이쁜 얼굴 삭으면 안 돼요. 하하!
그래도 해남 길은 예뻐서 운전하기 좋으니 잘 참아내세요.
좋은 곳으로 발령 받으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힘내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는 꼭 원하는 데서 근무하시길 바랄게요. 나중에 교장선생님께 푹 삭힌 홍어앳국 한 그릇 대접해드리세요.
울 지선 선생님, 예쁜 얼굴 다시 올라올, 맘 편한 곳으로 옮기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