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의 절반은 하늘의 뜻 / 정선례
농사의 절반은 농부의 몫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 짓는다는 말이 있다. 아침부터 시작하여 진종일 내리고도 모자라 여름 장마처럼 몇 날 며칠 비가 쏟아졌다. 그런가 하면 정작 여름장마에는 오지 않아 마른 논에 물을 대며 하늘만 쳐다봤는데 가을로 접어들어, 또 들이부어 물난리가 났다. 가을비는 김장 채소 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비가 자주 와서 볏짚을 제때 묶어 내지 못해 겨울 작물인 보리, 사료 작물 뿌리고 로터리를 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김장 배추 심고 며칠 후 물 폭탄을 퍼부어 모종과 흙이 쓸려 내려가 도로처럼 밭 가운데가 길이 났다.
지난겨울이 예년보다 따뜻해서 지구 온난화로 각종 애벌레 유충이 기승을 부렸다. 논농사를 주로 짓는 전남, 북 지역에 특히 심했다. 중국으로부터 남부 지역으로 6, 7월에 바람을 타고 날아 왔기 때문이다. 들녘이 순식간에 병충해가 번져 볏대 줄기 아랫부분에서 수액을 빨아먹어 잎이 황갈색 빛으로 변하여 말라 죽어 수확이 불가능하다. 한 마리가 300개의 알을 낳는다. 10월인데도 한여름 더위다. 유례없는 폭염으로 기상 이변에 따른 개최 수가 늘어 나고 산란 횟수가 많아졌다. 지금껏 한 번도 벼멸구가 이렇게 기승을 부린 적이 없었다. 여름철 기온이 올라가면서 병해충 확산으로 시름이 이만저만 아니다. 벼꽃이 지고 가을 햇살에 알곡이 누렇게 익어 가야 할 벼들이 들녘 곳곳에 쓰러져 있다. 농가의 노력만으로는 예방이 어렵다. 기후 변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농가의 몫이 되었다
방송과 농업 기술 센터, 지역농협 방제단에서 벼멸구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남편은 수시로 논을 둘러보러 나갔다. 이게 바로 농사에 진심인 농부의 마음이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요즘은 영농이 기계화되어 농협이나 개인에게 공동 방제 드론을 불러 농약을 뿌린다. 병충해가 보이면 치료제를 쓰고 안 보이면 예방 약제를 살포한다. 항공 방제 드론은 편리하지만 논에 들어가서 어깨에 줄을 끌고 가며 직접 뿌리는 것보다 방제 효과는 떨어진다. 예년에는 농약을 한두 번 치면 벼를 거두웠다. 그런데 올 해는 농가에서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자고 일어나면 바로 옆에 논으로 옮긴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기만 해도 우리 논으로 번질까 지레 염려가 되었다. 손 놓고 우두커니 바라만 볼 수는 없었다. 농약 회사별로 벼멸구약을 사와 농약 살포 기계와 커다란 통에 물을 가득 담아 약을 섞어 실었다. 이른 아침에 약을 뿌리러 들녘으로 나갔다. 고성능 농약 치는 대를 어깨에 매고 뿌릴 때 농약 줄이라도 잡으려고 나도 함께 나갔다. 꼼꼼하게 흠뻑 농약을 쳤더니 조금 안심된다.
농지는 논둑으로 경계선이 있어 구분한다. 농사에서도 논둑을 같이 쓰는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논둑을 베거나 농약을 뿌리거나 보리나 벼를 거둘 때 이웃 논에서 물이 들어와 제때 수확이 어렵다. 퇴비를 낼 때도 논에 물기가 있으면 화물차가 논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해 트랙터로 잡아당겨야 한다. 이웃 농지의 상황을 봐 가며 배려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이웃도 있어 안타깝다. 6월 초에 벼를 심어 가을에 거두고는 보리나 사료 작물을 심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 싹이 올라와서 혹한을 견디고 5월 말 같은 시기에 겨울 작물을 베어낸다. 벼가 익을 때쯤이면 태풍이 몰아와서 쓰러지거나 물에 잠기는데 올해는 다행히 태풍은 없었다.
농작물 재해 보험에 해당되었다. 이상 기후 탓에 병해충이 많이 생겨 다수 농가가 피해를 입은 까닭이다. 벼멸구의 경우 최초에 건의할 당시 농림 축산 식품부는 충해는 농가가 관리할 수 있고, 지원 사례도 없어 재해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이상 고온으로 생긴 벼멸구 피해를 농업 재해로 인정되어 피해 보상이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미처 사진을 찍어놓지 않고 빨리 수확해 버린 농가들은 피해 보상 접수를 못 했다고 한다. 읍면 사무소에 피해를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을 첨부해야 되기 때문이다. 한 해 수고가 헛수고로 돌아갈 뻔했는데 적은 금액이나마 보상받아 다행이다. 갈수록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충해로 농작물 생산량이 줄고 농가 소득이 줄어든다. 농사 쉽지 않다.
아마도 농부라면 올겨울에 눈이 많이 오기를 바랄 것이다. 지금 들에는 보리와 사료 작물인 이탈리안 나이 풀이 새파랗게 자라고 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 날이 추우면 그해 겨울이 몹시 춥다는 말이 있다. 동짓날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올겨울 새하얀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